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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자장가

  • 2018-06-28 16:31:52

가끔씩 내 허벅지에 자리하고 있는 외투 단추 크기의 흉터를 일별할 때마다 상처의 아픔을 덜어주던 어머니의 유일무이한 자작 ‘명곡’인 자장가가 떠오르면서 오매불망 행복한 추억에 사로잡히군 한다.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한 그 이듬해 봄 청명날, 난데없이 되알진 총소리에 우리 개구쟁이들이 달려가서 보았더니 나의 셋째 형이 앞집 대장간 벽을 향하여 빈 탄약통 밑굽을 돌 우에 놓고는 도끼등으로 내리치는 것이였다. 땅 소리와 함께 삐돈이 탄알처럼 대장간 벽에 박히는 것을 구경하며 10여명 되는 애들은 좋아라고 환성을 질렀다. 한번은 땅!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상하게 나의 오른쪽 허벅지가 때끔거리는 것이다. 내려다보니 일본 군수품 천으로 새로 지어 입은 바지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바지를 내리고 보니 허벅지를 타고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질겁한 나머지 와아ㅡ 하고 울음을 터뜨리자 바빠맞은 셋째 형은 급히 소수레를 몰고 15리 상거한 벗밭골의 의사집으로 달려갔다. 한족의사는 상세하게 진찰하더니 다행히 뼈나 혈관을 다치지 않았으므로 삐돈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한번쯤 고름이 생기고 나서 근육이 씌워지므로 별일 없을 거라고 하였다. 그제야 셋째 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고 긴장한 표정도 풀렸다.

그러나 한마을에 사는 돌팔이 의사가 나서서 자기가 삐돈을 꺼낼 수 있다면서 납작한 침 끝으로 살을 뚜져놓고 거기에 청강수를 떨궈놓았다. 생살이 타들어가는 데서 오는 아픔은 구곡간장이 온통 찢어지는 듯한, 마치 뼈를 깎아내는 아픔과 같아 어린 내가 참기엔 너무 큰 고통이였다. 바닥을 대굴대굴 구으는 나를 부둥켜안고 달래던 어머니는 아예 나를 둘쳐업고 동네 애들이 뛰노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조금이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삐돈은 1센치메터도 더 되는 깊이에 박혀있어 돌팔이 의사가 내린 ‘처방’으로는 치유가 불가능한 것이였다.

첫 아픔이 멎자 한족의사의 말 대로 상처가 곪으면서 다시 참기 어려운 고통이 몰려왔다. 어머니는 또다시 울면서 객기를 부리는 나를 둘쳐업고 헝겊뽈을 차고 있는 애들 틈에 끼여 달리기 시작했다. 열살이나 되는 나를 업고 애들과 어울려 뽈을 찼으니 어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가? 하지만 그렇게라도 내 고통을 덜어주려고 어머니는 온몸이 물참봉이 되면서 버텼다. 저녁에는 또 나를 가슴에 꼭 안고 머리와 얼굴을 쓰다듬어주면서 당신의 자작곡인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일자무식인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란 그저 코노래로 흥얼거리면서 16박자로 된 곡에 ‘자장- 자장- 애기- 자장-, 우리- 애기- 잘도- 잔다-’라는 ‘가사’를 붙인 것이였다. 그 노래를 몇십번이고 거듭 부르시면 나는 어느새 깊은 잠이 들군 했다.

자식 아홉을 낳았으나 내 우와 아래로 셋을 홍진미열로 가슴에 묻어야 했던 어머니는 당시 내 허벅지의 상처를 보고도 경악할 정도였다. 자식의 아픔을 대신할 수 없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속을 끓였을 어머니가 안타깝다. 그러나 그 아픔의 시간은 어쩌면 나에게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하다.

며칠 뒤, 상처에는 누우런 고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가슴을 졸이며 고름을 짜내였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나서며 “어디 좀 보자” 하시더니 그 투박한 엄지손가락으로 꽈악 눌러짜는 것이다. 나는 금시 숨이 넘어갈 듯한 고통으로 괴성을 질러댔다. 덕분에 상처는 빨리 아물게 됐으나 밤마다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자장- 자장-’ 하며 자장가를 불러주셨다.

시간은 류수와 같아 어언 70여년이 지났다. 오늘까지도 나의 허벅지에는 당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제 더 이상 아픔은 없으나 상처를 볼 때마다 나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애수에 넘친 눈빛을 보는 듯하고 다정함이 넘치던 어머니의 감미로운 자장가 소리가 귀전에 들리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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