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은 있어도 효성은 있을지…

2018-07-12 16:14:09

일전에 아침을 먹으려고 식탁에 마주앉았는데 안해가 웃어대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걸 보라며, 아주 재밌다는 것이였다. 나는 핸드폰에는 아주 숙맥이여서 전화를 걸고 받는 것까지는 알지만 다른 건 전혀 모른다. 그러다 보니 핸드폰에 얼굴을 박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거, 정신이 잘못됐군.’ 하고 측은하게 생각했는데 꼭 그런 건 아니였다. 나의 안해는 핸드폰 박사다. 상해에 가서도 핸드폰으로 장을 보고 지하철을 타고… 손가락 두개로 사통팔달이였다. 하여 나는 계발과 교육을 많이 받고 배우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도 유치원 정도여서 안해가 나를 많이 보살펴주고 있다.

안해가 주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기막히게 재미있는 영상이였다. 우리가 대학 다닐 때 수수밥과 시래기국을 한데 담아서 먹던 대짜배기 고뿌와 똑같은 고뿌에 욜(먹이)을 담아서 닭을 먹이는데 엄지로는 수탉 한마리와 암탉 한마리고 애기 주먹만한 노랑병아리, 알록병아리가 십여마리나 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병아리들은 키가 안되여 욜을 먹지 못하고 안달아하는데 암탉은 욜을 물어내서는 땅바닥에 놓아 병아리들이 먹게 하지 않는가?! 그러나 수탉은 고뿌에 주먹만한 대가리를 꾹 들이박고는 그야말로 제정신 없이 욜을 먹어대고 있었다. 수탉의 가슴팍 밑에서 안달아하던 서너마리 병아리들은 부성애에 실망하고 격분하고 어미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놈들이 오자 암탉은 특별히 그들에게 욜을 물어주었다. 수탉 곁에 있던 병아리들이 부성애에 실망하고 격분했다는 건 그들이 수탉의 종아리와 발을 쪼아놓고 엄마 쪽으로 ‘기이’하는 행동에서 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탉은 부지런히 욜을 먹어대고 있었다. 암탉의 모성애는 너무도 자연스러웠고 병아리들은 뱅글뱅글 돌면서 어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놈들의 거동도 너무 신통했다. 글쎄! 한입 먹은 놈은 물러서고 다음 놈이 먹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 고것 참!…

아이 때 나도 우리 집 마당에서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날 병아리를 거느린 어미닭이 독수리와 결사적으로 싸웠는데 우리 집 검정개(새끼를 낳은 지 얼마간 됐었다.)도 합세를 해서 독수리를 물리쳤다.

안해와 나는 웃으며 감탄하며 영상을 반복해서 보았다. 누가 제작한 작품인지 너무도 생동하고 진실하고 고상하고 예술적이고 흥미진진하면서도 교육적이여서 참말 고맙고 감사했다.

짐승의 모성애도 숭고하지만 인간의 모성애는 세상에서 제일 순수하고 위대하고 강렬하고 강대한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감정에서 제일 선천적인 훌륭한 정이다. 나는 이전에는 녀성을 우습게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녀성 숭상주의자다.

그날 아침 후에도 나와 안해는 영상에 대한 감상을 말하며 다시 보기도 했다. 그러던중 우리는 저도 모르게 북경에서 목격한 한 사실을 회고하게 되였다. 그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도 충격적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아들집에서 손녀애를 돌보고 있었다. 손녀애가 태여나서부터 고중에 입학할 때까지 우리는 여러해를 북경에서 살았는데 옆집 즉 이웃집은 절강에서 온 한족 장씨였다. 장씨네는 형제자매가 여덟인데 상당한 부자인 것 같았다. 호주인 장복은 아들로서는 막내고 항렬로는 여섯째라고 하였는데 아버지는 이미 작고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들은 소학생 오누이를 키우고 있었다. 장복의 어머니는 성이 진씨였다. 진씨도 우리처럼 ‘후근부장’이였다. 그는 여덟 자식을 돌보며 ‘전근’해 다니다가 여섯째네가 곧 셋째를 낳게 되여 다시 여기로 ‘전근’해왔다고 하였다. 풍더분한 로친네가 무던해보였는데 나이는 우리보다 네살이 우였다. 우리 두집은 아주 화목하게 지냈다.

장복의 셋째 아이(녀자애)가 네살 되던 해다. 초겨울인데 어느 날 진씨가 풍을 일궈 풍대인민병원으로 실려갔다. 병원에서 치료를 잘했는지 아니면 본래 병세가 위독할 정도까진 아니였는지 진씨는 죽지 않고 두어달 후에 집으로 실려왔다. 우리가 볼 바에는 병원에 실려갈 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았다. 진씨는 전혀 운신을 못했다. 장복은 이미 전탁보모를 구해놓고 있었다. 우리는 장복 내외가 효성을 제대로 한다고 감탄하였다.

그해 음력설이다. 장복의 형제자매들이 우르르 륙속 모여오는데 아이들까지 20여명은 되는 것 같았다. 장복이네는 집이 커서 우리 집 방을 쓰라 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요점만 말한다면 후에 알았지만 그들이 어머니가 풍을 맞아 넉달이나 되여 이번에 처음으로 이렇게 모여온 것은 부담문제를 담판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앓아누운 어머니를 모르는 척 할 수 없으니 겸사겸사해서 왔겠지.

사나흘이 지나니 모두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장복네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나간 후 우리는 진씨를 보러 갔다. 집에는 발목을 접지른 큰애가 있었다. 보모가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진씨의 방에서는 악취가 정말 지독했다. 보모가 설 쇠러 가고 없었던 것이다. 장복이 어머니의 시중을 건성으로 한 걸가?… 그 상황을 목격하고 우리는 모르는 척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진씨는 풍을 맞았지만 정신만은 말짱했는데 그날 진씨는 여러번 흐느껴 울면서 신세 한탄을 끝없이 하였다. 듣지 않을 수도 없고 듣자니 들을수록 기가 막히고 원통하였다.

진씨네 부부는 산전수전 소 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년년생의 여덟자식을 키워냈다. 그들 부부는 번갈아가며 구걸을 하기도 했고 지어는 바다로 나가 밀수를 하기도 하며 그야말로 천신만고를 다하여 자식들을 키웠다고 하였다. 남편은 밀수길이 트자 거기에 열중하다가 그만 풍랑으로 죽었다. 아버지의 목숨으로 자식들은 한밑천씩 잡고 지금 살 만하게 되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번에 모여들어 계속 싸우다가 뿔뿔이 달아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복은 자식들마다 어머니 생활비를 한달에 2000원씩 공평하게 안자고 주장하고 형제자매들은 너희 집에서 고역에 시달리다가 풍을 맞았으니 당연지사 두말 할것없이 네가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법이며 원칙이며 인간의 도덕이며 도리며 량심이며… 많은 말들을 하며 밤낮 시비를 하고 싸우다가 헤여졌다고 하였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 진씨의 방에 찾아와 한번이라도 따뜻한 눈길로 작별인사를 건네는 자식은 없었으며 그렇게 애지중지 뒤바라지를 해준 손군들도 할미를 들여다보는 놈 한놈 없었다고 하였다. 자식들의 얼굴은 첫날 한번씩 보았지만 손군들은 보자고 불러도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나.

진씨는 “사람이 늙으면 곱다는 사람이 없다.”느니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느니 하며 자식들의 부담으로 되지 말고 이젠 어서 죽었으면 제일 좋겠으나 셋째 아들과 막내딸이 가슴에 걸린다고 하였다. 다른 자식들은 다 근심걱정되는 것이 없으나 셋째는 상처하고 딸을 데리고 홀애비로 살고 있고 막내는 리혼하고 딸애와 함께 혼자 사는데 그것이 자꾸 가슴에 걸리며 아프다고 하였다. 우리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 글의 제목에 <모성은>라고 화두를 던진 것은 역시 진씨네를 두고 한 말이다. 물론, 세상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나의 장모님의 생신이다. 이번 생신은 장모님이 95세가 되는 큰 경사여서 우리는 온 집 식구가 출동하였다. 장모님의 생신은 그야말로 성대하였다. 생신이 지난 이틀 후 아들과 며느리는 사정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고향 연변에서 한달 가깝게 지내면서 장모님을 동무해드렸다. 북경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장모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하며 큰절을 올렸다. 장모님은 우리 부부의 손을 잡고 끝내 눈물을 떨구고야 말았다… 비행기에서 안해는 어머니의 옛말을 끝없이 하였다. 어떤 것은 나도 잘 아는 일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주정뱅이 시아버지와 풍을 맞은 시어머니를 16년을 하루와 같이 욕창 한번 없이 깨끗하게 모셨다는 장모님이시다. 안해의 형제자매는 모두 아홉인데 안해가 맏이고 동생들은 모두 출세를 해 행복하게 살았다. 그제 날 산골에서는 얼마나 보기 드문 일인가?! 나의 처가집은 마을에서 제일로 꼽히는 가난한 집이였지만 장모님은 늘 ‘모범며느리’, ‘모범학부모’로 수두룩한 상장을 받아안았다고 한다.

내가 장인과 장모를 정말 대단한 분들이시다고 감탄하니 안해는 동감을 하면서도 처연한 기색이였다. 장인은 칠년 전에 돌아가셨고 장모님의 년세는 백수에 가까우니… 하지만 로인들의 앞일을 어찌 알랴. 그래서 안해도 처연한 심정인가 보다…

우리가 북경으로 돌아온 지 며칠 되는 어느 날, 복도에서 장복의 안해를 만났더랬다. 시어머니 진씨의 문안을 하였더니 그녀는 해쭉 웃으며 “쓰라.(死了)”라고 하였다. 진씨는 아마 69세였을 것이다. 우리는 더 긴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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