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서행기
□ ​​박정희

2018-07-19 14:50:31

아버지의 서안행을 생각할 때면 나는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와 단 둘이 그렇게 즐거웁게 보낸 나날이 머리 속에 생생하여 늘 행복에 도취되군 한다. 끼니마다 둘이 함께 마주앉아 밥을 먹었고 날마다 함께 상점이나 백화돌이를 하거나 함께 공원 산책을 하였으며 시간이 좀 많으면 함께 서안의 명승고적들을 유람하였다. 아버지는 호기심도 많았고 이야기도 아주 잘 하시여 집에 있을 때처럼 말머리가 너무 무거워 그렇게 어려웁고 위엄있던 아버지인 것이 아니라 스스럼없는 다정한 친구 같았다. 지난번 우리반 동창모임을 서안에서 하였는데 대안탑에 가서 대부분 동창들이 아무데나 걸터앉아 탑 꼭대기만 올려다 볼 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기어코 끝까지 올라갔다. 아버지가 마치 나에게 손짓하는것 같아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안배받아 출근한 첫날, 나의 첫 일터인 장도반송파실로 들어간 나는 너무도 상상이외여서 아연해났다. 높고도 넓은 큰 기계실에 은회색 기계들이 나란히 줄을 지어 서있고 기계들 사이로 나진 통로에서 앞으로 걸어가면서 보노라니 좌우쪽에도 모두 기계들이 빼곡히 줄지어 서있었다. 줄과 줄 사이에는 계량기, 측량기계들이 바퀴달린 차우에 놓여있었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통로 량쪽켠에 서있는 매 기계틀마다에 홍색, 람색, 황색 등이 반짝이였다. 전화 선로가 고장나면 그 선로가 소속된 기계틀의 홍색등이 번쩍번쩍 빛났고 벨이 요란히 울리며 확성기에서는 고장선로 량쪽 기계실에서 서로 대방을 부르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기무원들은 고장를 처리하느라고 분주히 뛰여다녔다. 기계실 맨 뒤에까지 갔다가 다시 뒤로 돌아서서 사위를 휘익 둘러보니 각종 기계들, 측량기계들 등 모든 설비들의 앞면에는 수 많은 작은 전구들이 반짝거렸다. 더구나 기계실의 전화선이 몽땅 통과되는 계기대는 벽처럼 아주 큰데다 온 앞면이 모두 플라그소켓과 작은 전구로 구성되여 더구나 가관이였다. 밤이 되여 설내의 전등을 끄면 기계실은 아마 밤하늘의 별무리들보다 더 황홀할 것이다.

저녁에 숙소에 돌아온 나는 잠들 수가 없었다. 온 나라가 빈궁하고 락후하던 어린시절 방송도 신문도 전등도 없는 시골에서 촌 아이들의 제일 큰 희망은 공인호구가 되는 것이였다. 돈을 쥐여보고 쌀밥을 먹을 수 있고 환한 전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오늘 나는 공인이 되였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좋은 기계실에서 출근하게 되였으니 참으로 꿈만 같았다. 나는이 기쁨을 나 혼자서 향수할 수 없었다. 생활이 극도로 곤난하였던 지난 세기 60년대 3년재해 시기에 나는 고중에 입학하였다. 농민들의 생활은 더 없이 지탱하기 힘들어 우리 녀자반에서 집이 먼 농촌 아이들은 거의 다 울면서 학업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 반은 학생들이 너무 줄어들어 겨우 일년을 견지하고 해산을 선포했으며 전 학년을 몽땅 털어 반을 다시 편성하였다.

우리 집은 생활이 너무 곤난하여 마을의 보조대상였다. 이런 정황에서 다 큰 내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고 부모님이 그토록 고생하는 것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마을사람들은 보는 사람마다 나더러 학교를 그만두라고 권고하였다. 학교를 다닌다는 것이 너무나 죄책감에 시달려 끝내 나도 용단을 내렸다. 유일하게 나의 부모님만이 나서서 견결히 나의 퇴학울 반대하였다. 내가 이런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여난 것은 이 세상 더없는 행운이였다.

학교를 계속 다니는데는 막심한 곤난이 많았다. 아침에 쌀알이 약간 들어있는 채소밥을 먹고 십여리를 걸어야 되니 학교 어구에 닿기 전에 배가 고파 책가방을 꼭 껴안고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야 하였고 온하루 점심은 물론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는 주린 창자가 경련을 일으켜 참기 어렵고 눈앞이 아찔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간 동무들을 생각하면 그 곤난이 나에게는 곧 더 없는 행복이였다. 그 노력과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켰을가? 대학에 가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집에서 큰 로동력이 될 수 있으니 부모님들을 좀 편안히 살게 하려고 나는 날마다 앞장서 부모님과 함께 일을 했다. 그런 나에게 대학입학통지서가 제일 먼저 날아왔다. 그러니 나의 직업은 부모님의 영명한 결책과 그로 인한 천신만고로 이룩한 성과이고 그들이 아낌없이 흘린 피땀으로 빚어진 열매이다. 나는 꼭 부모님께 그들의 희생을 보여주고 싶었고 그들에게 고생 끝의 락을 맛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가 친척 모두 한마을의 농민인지라 한늬 기차를 타고 어디에도 놀러 가보지 못한 부모님을 시내 구경도 시키고 싶었다.

몇달이 지나 겨울이 오고 농한기가 되니 나는 아버지를 먼저 모시려고 하였다. 한달 월급이면 편도 표값은 푼하지만 월급을 네다섯달 밖에 모으지 못한데다가 숙소가 불편하고 더구나 로정이 멀어서 부모님 두 분 모두 모셔오긴 사정이 딱했다. 아버지는 마을에서도 사람들 모두 엄지손가락을 뽑는 분이셨다. 허리병이 있어 밭갈이 같은 힘든 일은 못하지만 대신 머리를 잘 쓰고 세심하여 담배모 벼모를 키우고 논물을 보고 건조실 불을 보는 등 기술일은 해마다 아버지의 몫이였다. 아버지는 손재간이 있고 부지런하여 어디 가서 보고 온 것이면 다 할줄 알았다. 우리 집의 책상, 걸상, 밥상, 풍구 등은 모두 다 아버지가 손수 만든 것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점차 마을의 ‘의무수리공’이 되였다. 아버지는 배우기를 즐기므로 글도 좀 알고 사리가 밝아 젊어서는 촌장도 했었다. 이런 아버지기에 나는 얼마든지 그 먼길을 혼자 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도 한어말을 모르는 것이 근심이 되여 역전 승무원에게 보이라고 나의 주소와 차 타는 날자, 시간을 적어 주었다. 그리고 길에서 주의할 점 특히는 기차 시간을 어기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길에서 편지가 분실될가봐 똑같은 편지를 집에다 세번이나 부쳤다.

아버지가 도착하는 날 나는 기쁨에 겨워 나는 듯이 역전에 달려갔다. 기차가 도착하고 려객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나는 한 사람이라도 놓칠세라 눈 박아 보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다 가고 마당이 텅 빌 때까지도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찌된 일일가. 차를 잘못 탔을가. 나는 머리를 한대 얻어 맞은 듯 뻥해났다. 오후에 다시 역으로 나가보았지만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이 아찔해났다. 차에서 얼핏 잠이 들어 내리는 역을 놓쳤을가? 벼라별 생각을 다하며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서 언뜰거렸다. 저녁 11시가 되여 나는 다시 역전으로 줄달음쳤다. 막차이니 아버지가 꼭 탔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서. 하지만 내 희망은 보기좋게 무너지고 나는 견디지 못하고 란간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가? 한어로 제대로 모르는 아버지더러 차를 세번이나 갈아타면서 이 먼 곳까지 오게 했으니 모든 것이 다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자책과 후회에 눈물만 흘렸다. 홀연, 눈앞이 어두워지는 것 같아 고개를 쳐들었더니, 맙소사, 아버지가 서계셨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자리에서 막 뛰였다. 철이 든 이후로 아버지에게 안겨본 것도, 아버지가 그토록 반갑게 느껴진 것도 처음이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서 아버지는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장춘에서 기차를 찼을 때 옆에 락양으로 가는 비슷한 또래의 승객의 앉았는데 가는 방향이 같으니 내릴 역을 걱정말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북경에 도착했을 때 그 분이 이렇게 한번 나오기 힘든데 천안문구경이나 하자고 제안해 아버지는 흔쾌히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렇게 천안문과 고궁을 참관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나서 밤차를 타고 왔다는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분이 얼마나 고마왔는지 모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다. 기차에서의 피로를 다 잊은 듯 반듯하고 널다란 아스팔트길을 걸으며 좋아하셨고 그 길을 환히 비추는 가로등을 보면서 탄복해하셨다.

이튿날부터는 내가 출근한 뒤면 아버지는 이 곳 저 곳 구경하고 저녁이면 낮에 구경한 것들을 나한테 흥미진진하게 들려줬다. 기무원들은 야근이 많았기에 나는 또 낮에 아버지와 함께 다니기도 편리했다..

서안에 온지 열흘쯤 되는 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아직 채 구경하지 못한 곳도 많은데 며칠이라도 좀더 놀다가 가라고 만류했으나 설이 지나면 새해 농사준비도 해야 한다며 자꾸 나를 재촉하셨다. 하긴, 서안의 겨울은 낮은 춥지 않으나 난방설비가 없기 때문에 밤은 무척 견디기 힘들었다. 하물며 평생을 뜨끈한 온돌에서 살아오신 아버지시지 힘들었을 것이다. 어쩔수없어 나도 아버지의 요구를 따랐다. 하지만 또 사달이 생겼다.

평생 기선을 타보지 못하셨다면서 돌아갈 때는 기차로 천진까지 가서 기선을 타고 대련에 간 후 다시 대련에서 기차를 타고 집에 가겠다는 것이다. 맙소사! 나는 아버지가 서안에 올 때의 일이 생각나 절대 안된다고 반대해나섰다. 이후 돈이 더 모여지면 꼭 아버지를 모시고 기선을 탈테니 안전하게 기차로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할 수 없이 나는 천진으로 가는 기차표를 떼고 아버지께 로비를 푼푼히 챙겨드렸다. 사흘이 지나 아버지는 대련에 도착했다며 전보를 쳐왔다. 그제서야 나도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후, 차를 타보지도 못했고 연길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한 두메산골에서 아버지의 서안려행은 그야말로 잇슈가 되였다. 마을사람들은 너도나도 아버지를 부러워했으며 수시로 우리 집에 찾아와 시가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단다. 비 오는 날이나, 쉴참이면 아버지는 당시 농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스팔트나 가로등, 층집, 공원, 공공뻐스, 바다, 기선 등에 대해 얘기했고 기차를 타며 거쳐간 장춘, 북경, 천진, 대련의 견문을 이야기로 구수하게 엮어내려갔다.

후에 사업의 수요로 나는 서안을 떠나게 되였다. 생활도 점차 펴여 나는 꼭 부모님을 모시고 나의 모교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정작 아들 둘을 낳고 살다보니 아들들이 대학을 가는 때까지도 유람이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문득 이러다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어머니께 함께 유람을 떠나자고 제안했더니 다리가 아파 걷지 못하겠다며 단호히 거절하시는 것이다. 이미 늦었다.

지금 나는 언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때에 부모님과 함께 려행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얼마든지 제일 좋은 것으로 다 해드릴 수 있는데 말이다.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고 우리는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많은 편리들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으며 함께 누리고 싶은 부모님은 더이상 그 걸 누려볼 기회가 없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이지만 유독 후회약만은 살 수 없다. 완벽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가? 완성인 것 같다. 래일은 누구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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