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향기

2018-11-09 09:21:49

고희가 되여 ‘아, 이젠 늙은이가 되였구나!’ 하고 서글픔에 한숨을 지였는데 일흔아홉, 어언 1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갔다. 이제 사람들이 내 이름 뒤에 ‘옹’이란 글자를 더 붙여주겠으니 ‘아이고, 정말 생의 종착역에 닿았구나!’ 하는 생각이 갈마들면서 하늘 가는 차표를 손에 쥔 기분이다.

그래도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멈출 수 없다. 아니, 시간의 촉박에 더 빨리 더 많이 배우고 싶고 일하고픈 충동에 늘 마음이 조인다.

나는 문학을 사랑한다. 그것이 내 일이기에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쓴다. 한어도 열심히 자습하여 아직은 첫돌애의 걸음마 수준이긴 하나 그래도 어벌쩡하게 소설도 쓴다.

내가 끈질기게 한어자습을 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에피소드가 있다.

1997년도에 나는 첫 작품집 《고향의 느릅나무》를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작품집이 출판되자 칠대하시 일보사 기자가 취재하러 우리 학교에 찾아왔다. 그런데 기자와 마주앉자 가뜩이나 한어수준이 낮은 데다 긴장하기까지 하여 도저히 의사표달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 그때 조영춘 선생님이 옆에 있었는데 내가 말하는 꼴이 말이 아니여서 나를 대신하여 번역해주었다.

“이봐 은철이, 은철이 한어수준이 말이 아니야! 고급교원이고 작가여서 작품집까지 출판한 사람의 한어수준이 그렇구야 어떡해? 참!”

기자가 돌아간 후 조영춘 선생님이 나를 보고 나무리는 말이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얼굴이 뜨거워보기는 난생 처음이였다. 조영춘 선생님은 중학시절 나의 조선어 선생님이였다. 초중 3학년 때, 나는 처녀작 <봄맞이>라는 동요를 작사작곡했는데 선생님의 지도하에 《송화강》 잡지에 발표하게 되였다. 그러니 선생님은 나를 작가로 성장시킨 은사였다. 선생님은 교장직에서 퇴직한 후 다시 학교에서 일어교학을 하면서 나와는 스승과 학생의 관계이자 동료로 허물없이 보내는 사이였다.

내가 고중을 졸업한 후 선생님은 벌리현조선중학교 교장으로 계셨는데 그때 나는 음악학원 작곡학부 시험에서 락방되여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일에 종사하는 사원이였다. 비록 사원이기는 해도 나는 문학의 꿈을 품고 시, 수필, 소설과 같은 작품들을 륙속 《송화강》 잡지와 《흑룡강일보》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후에는 농촌소학교 민영교원으로, 대과교원으로 사업하기 시작했다. 1978년 봄 선생님께서는 벌리조선족중학교에 내려온 하나밖에 없는 연변대학 조선어 통신학부 명액을 나한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연변대학 제1기 통신학부 졸업장을 얻게 되였고 졸업 후에는 벌리조선족중학교에 전근되여 조선어 교수를 하게 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웠지만 선생님의 말씀에 조금도 반감을 품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나는 열심히 한어자습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0년, 환갑나이가 되여 퇴직할 때 나는 한권의 《중조사전》을 3년 사이에 더는 볼 수 없는 파지로 만들어버렸다.

정년퇴직한 후 나는 연태한국어학원, 할빈리공대학 원동학원 조선어학원 등 대학에서 조선어강의를 하였는데 학교에 출근하면 학교에 가서 교수용 사전을 쓰면서도 퇴근 후 기숙사에서 보려고 또 새 《중조사전》을 샀다. 그 《중조사전》은 2010년 70세가 되여 교단을 떠날 때에 또 파지가 되여버렸다. 그해 10월, 나는 만년을 조선족이 집중되여있는 연길에 와서 살려고 이사를 왔다. 연길에 와서 또 《중조사전》을 샀는데 그것도 지금은 파지가 되여 새것을 사야 할 형편이다.

대학에서의 조선어강의는 나를 놓고 보면 한어수준을 높이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처음부터 한어로 교수안을 썼고 한어와 한국어로 된 《과외한국어열독지도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나는 늘 한족학생들과 대화를 하여 한어발음을 익혔고 그들은 나한테서 조선어발음을 익히기에 힘썼다. 그러다보니 방과 후 내가 있는 숙소는 언제나 조한 대화 훈련교실이 되군 했다.

한때 나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언젠가 나는 ‘사회주의를 향하여 달린다’란 말을 한어로 ‘社会主义向跑’로 말하여 큰 웃음거리를 자아낸 일이 있었다. 그 후부터 친구들은 뽈을 차다가도 헛발질을 하면 “은철의 한어수준이야!” 하고 놀려주군 하였다. 그렇게 놀림을 당하면서도 나는 한어를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은사님의 한마디 나무람에 기어코 한어를 잘해보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에게 한가지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은사님의 한마디에 수치를 느껴 한어자습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건 계기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어자습을 하면서부터 점차 한어자습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느낌은 힘이 되여 내 몸에 피로를 모르는 끈질긴 의지가 생기게 했다.

나는 한어를 자습하게 되면서부터 조선족작가들의 작품을 한어로 번역하여 중국문단에 소개하고 나도 직접 한어로 작품을 써서 중국문단에 내놓고 싶은 야심까지 가지게 되였다.

그러나 한어로 작품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이였다. 연변의 유일한 성급 한어문 문학잡지 《천지소소설》만 봐도 하루에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소설원고가 130~140여편에 달한다. 거기에서 겨우 한두편만 선택하여 채용한다.

그래도 나는 연길에 온 후에도 끈질기게 한어자습을 하면서 작품도 썼기에 2014년에는 끝내 국가급 문학신문 《문예보》에 수필을 발표하였고 《천지소소설》에도 소설을 발표하게 되였다. 그러나 아직 언어사용에서 부족되는 점들이 많았다. 그래서 편집들의 직접적인 협조도 받게 되였는데 특히 《천지소소설》의 주필 황령향 선생은 조선족들의 투고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성 있게 지도해주는 분이다. 내가 지금 한어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은 이런 한어문 편집들의 도움도 많았다는 것을 특히 언급하고 싶다.

사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배워야 할 것들이 끝없이 많다. 배움이란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과정인바 배움의 과정과 배움의 성과에서 얻는 것은 삶의 향기다. 명석하게 알고 사는 것과 모르면서 무식하게 사는 것, 거기에는 질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향수가 있다. 하기에 나는 천당으로 가는 차에 오르기 전까지 삶의 도리와 그리고 문학, 음악, 생활, 건강 등 모든 분야의 지식을 탐구하면서 더 짙은 삶의 향기를 감수하고 싶다. 한어에 대한 배움은 배워야 할 항렬에서 하나의 실례에 해당할 뿐이다. 세상에는 배워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고 많은가. 배움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의 향수를 느끼는 것, 나는 여기에 삶의 보람이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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