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언덕□ 김명숙

2019-01-11 08:43:35

언덕 만큼 높은 산이 보인다.

무덤같이 작고 아담진 산도 보인다.

펑퍼짐한 아낙의 히프처럼 높지는 않지만 둔중한 산도 보인다.

나는 산을 무척 좋아한다. 산이라는 ‘산’자만 들어도 귀가 솔깃해서 들뜨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틈만 나면 이 산 저 산 찾아다니며 방황한 시간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올망졸망 그 모양이 어떠하든지를 막론하고 웅기중기 그 품위가 높고 낮음에도 막론하고 산행이라면 추호의 망설임이 없이 흔쾌히 나서군 하였다.

내가 산을 이다지도 즐기는 리유중 하나라면 산에는 계절마다 특유한 향기가 물씬물씬 흐르기 때문이다. 산의 향기는 맑고 신선하다. 깊은 산 바위틈에서 퐁퐁 솟아나오는 샘물처럼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가 하면 이른아침 이슬이 함초롬한 나무에서 금방 따내린 생생한 복숭아마냥 신선하다. 그 향기에 지칠 줄 모르고 자석에라도 끌린 듯 나는 늘 빨려들고 있다. 산의 맑고 신선한 향기를 한껏 마시고 나면 어둠처럼 짙어가는 도시의 오염으로 흐리터분하던 머리가 한결 정화되고 내내 갑갑하고 무겁기만 하던 가슴이 펑 뚫린 듯 가벼워지면서 새 에너지가 온몸을 전률한다.

산이 그립던 어느 날 나는 작은 여가의 틈에도 산행에 올랐다. 작은 산발을 타고 언덕에 오르는데 문득 나를 향해 날아오는 이상한 시선들에 그만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산행에 나섰다면 최소한 그에 어울리는 복장이나 신, 배낭 같은 걸 갖추는 게 기본이 아닐가? 하지만 나는 작은 소지품은 물론이고 직장에 출근하던 정장차림 그대로 나섰으니 행인들의 눈에 의혹을 자아내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목깃까지 꽁꽁 여민 각양각색의 멋진 등산복차림에 등산모자, 마스크까지 착용한 대오 속에 목깃이 훤히 드러난 얇다란 양복차림인 나는 등산길에 불편함보다는 내 자신이 파랗고 세련된 잔디무덤 속에 끼인 밉상스런 한포기 가라지로 느껴지면서 수치감을 가실 수가 없었다. 내 몸을 한참씩이나 참빗질하는 시선들을 감당하지 못해 나는 그만 숲속에 몸을 옹송그리고 말았다. 행인들이 하나, 둘 멀리 사라졌지만 나는 의연히 내 초라한 몸뚱이를 드러내지 못하였다.

문득 어린시절 같은 또래의 조무래기들에게 쫓기여 방향을 잃고 황황해서 어쩔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어떻게 알고 나타나셨는지 어머니가 나타나서 나를 꼭 품어주시던 일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날 그 고요한 야산의 작은 숲이 어쩌면 내 어머니의 품같이 그토록 포근하고 아늑했으며 내 신상의 오기들까지 모조리 가려주고 덮어주면서 보듬어주는 듯싶었다.

허구한 날들에 나는 늘 이렇게 주변의 산들을 찾아다니며 말 없는 대화도, 속심도 수없이 나누었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어리숙한 그 모습들을 바라보노라니 어느 날 부지중 이름 높은 명산에 올라보고픈 생각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리움은 날마다 짙어갔고 강렬한 그 충동은 좀처럼 삭일 수가 없었다. 중국의 5악(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 3산(황산. 려산. 안탕산) 한국의 5대 명산 (북한산, 덕유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일본의 다이센, 후지산, 효노센… 이름있는 산들을 수없이 검색해보면서 나는 눈앞의 절승경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연신 감탄을 쏟아내고 말았다. 우아한 봉우리들, 사람을 무색하리만치 미묘한 풍경, 게다가 거기서는 신기한 메아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향기 또한 끝없이 감미롭고 매력적일 것이다.

나는 드디여 명산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명산관광은 준비부터 복잡했다. 명산에 어울리는 비품 또한 명품이여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하고 기차 타고 비행기 타고… 명산에 닿고 보니 참으로 그 기분 더 이를 데 없었다. 시야에 안겨드는 그 웅위함에 모든 피로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솟구치는 격정을 금할 수 없었지만 일종 망설임도 없지 않았다. 오를 수 있을가? 아니 단념할 수는 없다. 오매불망 그리던 명산, 어떻게 찾아온 명산인데. 나는 신들메를 단단히 조이고 정상을 향해 톺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금지구역을 피해 좁고 가파로운 행도를 따라 붐비는 인파 속을 헤가르며 요리조리 몸을 피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험한 산령을 톺는 힘보다는 몰려오는 인파 속을 헤가르는 힘이 곱절 들었다. 코등과 이마에 땀이 배이고 이어 숨이 턱턱 고르로운 호흡을 저애하였으며 다리가 떨리기 시작하였다. 잠간 걸터앉아 쉬고 싶었다. 하지만 곳곳마다 차고넘치는 행객들로 나는 인파의 덫에 끼인 채로 밀려가기 시작하였다. 산중턱에 닿지도 못했는데 숨은 더더욱 가빠졌고 다리는 후둘후둘 심하게 떨렸다. 발걸음이 점점 늘어지자 뒤따르던 행객들이 불만을 담은 눈길로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어데라도 몸을 잠간 피신시키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두 다리를 퍼더버리고 떡하니 물앉고 싶었다. 하지만 상행선과 하행선이 따로 뻗은 이곳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정상을 향해 톺는 길밖에 없었다. 이젠 몸에 겨불내가 콱콱 풍기고 전신이 물참봉이 되였다. 겨우 중턱까지 올라 산정의 최고의 경지를 즐겁게 감상하지 못한 채 하행선을 그리던 나는 도리머리를 저으면서 자신에게 호된 질책을 안기였다. 명산을 그리는 내 욕구가 또다시 살아났다. 나는 이를 악물고 톺아오르기 시작하였다.

웅장하고 기묘한 봉우리, 깊숙한 계곡과 높은 벼랑, 뭇새들의 지저귐과 여울물소리를 그리며 젖먹던 힘끼지 다 빼서야 나는 끝내 절정에 오르게 되였다. 오직 명산에 대한 동경의 힘으로 버티다 나니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아름다운 경지를 흔상하는 일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가 곱절 급했다. 하지만 정상에는 생각보다 더더욱 무수한 사람들이 북적거려서 나는 잠시 머물자리조차 찾지 못한 채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소중한 시간만 흘리였다. 산을 톺는 길에 여기저기 부대끼고 긁힌 자리가 땀에 절어들어 진통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잠간 시원한 바람이라도 쏘이면 피로가 가셔질 것 같았다. 하지만 바람도 지칠 대로 지친 내 마음에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바람은 상상외로 차고 쌀쌀하여 오뉴월에도 얼굴이 시려났다. 메아리가 그리웠다. 오매에도 듣고 싶던 메아리! 그 메아리 속에 내 아픔을 모조리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끼리끼리 웅성거릴 뿐 아름다운 메아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실망의 금이 서리기 시작하였다. 명산이라면 꼭 메아리가 있다는 보장이 없다. 또 명산의 메아리가 더 아름다울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막연한 생각이다. 명산의 향기 또한 명품으로 느끼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사람냄새에 땀냄새에 푹 절어들어 곱절 오염된 느낌에 나는 당금 질식될 것만 같았다. 명산의 향기, 바람, 메아리에 대한 내 무지한 사유와 못난 허영심으로 나는 그만 깊은 자책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는 명산에서 내렸다…

새롭게 여기저기 생겨난 상처에 말라든 피자국을 보니 마음이 무지무지 아팠다. 명산을 등지고 내려오는 이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었고 내 발자국이 찍혔던 옛 산이 그리워났다. 아름다운 첫사랑의 정처럼 티없이 맑고 깨끗한 정이 그리웠다. 비록 웅장하고 기묘한 봉우리, 깊숙한 계곡과 높은 벼랑, 뭇새들의 지저귐과 여울물소리를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절주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한테는 너무도 편한 곳이였다. 그곳에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랍없이 뛰여가도 달갑게 받아주고 포근히 품어주는 웅심이 있다. 또 나만의 감수와 나만의 사색을 마음껏 가질 수 있는 널직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웅얼웅얼 알아듣지 못할 소음도 없이 또렷한 언어로 진솔한 마음을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내 발길이 오늘은 또다시 그곳에 옮겨진다.

절경도 없고 메아리도 없지만 내 높이로 서서 내 눈으로 굽어볼 수 있는 그리고 숨도 가쁘지 않는 나만의 산언덕(山岗)에 오르고 싶다.

김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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