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봄향기□ 리기춘

2019-04-25 14:16:50

차디찬 바람을 휘감고 으스대던 동장군이 봄아씨의 따스한 숨결에 주눅들어 살그머니 사라지였다. 꽃샘추위도 얌전하게 떠나가니 대지의 만물이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고 산천이 고운 빛갈로 새옷 단장하는 화창한 계절이 다가왔다.

봄기척이 창문을 노크한다. 고층아빠트 창가에 다가서 창문을 시원히 열었다. 그윽한 봄향기가 가슴에 잔잔히 스며드니 봄빛에 맑아지는 내 눈길은 어느덧 초록빛 스카프를 예쁘게 두를 차비를 하는 모아산 너머로 평강벌 웃목에 자리잡은 고향마을에 가닿는다. 그리움이 즐벅한 눈동자에 고향의 봄이 새물거린다.

농가의 봄은 언제나 싱싱하고 산뜻하였다. 깜찍한 열매를 잉태하고 있는 살구꽃이 싱그러운 향기를 봄바람에 살살 흔들어 날리고 터전의 마늘싹이 여린 머리를 빠금히 내밀어 새콤한 봄내음을 선물한다. 초가집 처마밑에서는 제비식구들이 봄노래 부르며 들락거리고 암탉이 노란 병아리를 거느리고 뜨락의 봄빛 사이로 오락가락한다.

일년지계 재어춘이라 봄빛 무르익는 이 계절이면 우리 산촌마을은  봄파종으로 한창 들썽인다. 그때 농사일의 생력군인 우리 팔가자 상남 5대 청년들은 항상 오구작작 우사칸마당에 모여 생산대장의 일배치를 기다린다.

은흥골안의 한전밭 콩박기 일을 하는 날이 즐거웠다. 소수레를 앞세우고 씨엉씨엉 걸어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가슴은 봄빛에 활랑거리였다. 노을빛에 따스하게 익은 해살이 산간 길섶에서 한창 푸르러가는 이름모를 잡풀들을 살살 어루마져주고 금방 파란 차림새를 갖춘 민들레가 동그랗게 웃어주니 봄볕사랑 담뿍 안고 걷는 기분 한결 산뜻해진다. 덜커덩 덜커덩 굴러가는 수레바퀴소리가 흥겨운 노래가락를 연주하는듯 아침해살이 새물거리는 코구멍에서 봄노래가 흥흥 흘러나온다.

일밭에 이르러 살진 이랑이 굽이치는 넓은 한전밭을 흐뭇이 바라본다. 봄해살이 부푸는 땅우에 금실은실을 눈부시게 늘이는데 겨우내 잠들었던 애기풀들이 푸릇푸릇 미소를 보내고 어디선가 뻐꾹뻐꾹 봄소식을 알리는 은은한 뻐꾸기의 울음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얼마나 화창한 시골의 아침인가! 봄날의 상쾌한 기분이 청춘의 가슴에 싱싱하게 스며든다.

“일을 시작합시다.” 대대 공청단서기의 명분에 어울리게 내가 선줄을 끌었다. 청년 남녀들은 제각기 밭이랑을 하나씩 타고 일을 시작하였다. 총각들은 씨앗을 담은 싸리나무다래끼를 옆구리에 차고 처녀들은 작은 보자기를 행주치마처럼 허리에 둘러 주머니를 만들어 씨앗을 담고 조막호미로 흙을 폭 파서 콩씨 네댓알씩 박아넣는다. 청춘남녀가 어울려 일하니 모두들 힘겨워하는 기색이 없이 펄펄 날았다.

쉼시간이 되니 총각들은 밭머리에 모여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하는데 처녀들은 밭이랑 사이에 파란 잎파리 한들거리는 달래캐기에 여념없다. 점심반찬거리 보탬을 위해서였다.

해가 중천에서 재글거리는 점심참이 되자 밭머리 둔덕 아래의 샘터에 단란히 모여앉아 자기가 갖고 온 도시락을 풀어헤친다. 너무나도 간소한 도시락이다. 조밥이 아니면 입쌀알이 약간 얼룩한 강냉이밥에 무우오가리무침이나 고추짠지 같은 반찬에 고추장이 전부다. 그래도 처녀들이 샘물에 깨끗이 씻어 헹구어 낸 봄달래가 맛갈스러운 반찬이 되였다. 하얗게 통통 살진 달래를 고추장에 뚝 찍어 먹는 매콤한 맛이 너무나도 향기로웠다. 서로 허물없이 간소한 반찬을 나누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소박한 청춘들의 점심참은 그야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이다.

봄볕이 짙어가는 오후, 저 멀리 시골 하늘가에서 달려온 아지랑이가 밭고랑을 메우며 새물새물 춤추고 낮잠을 깬 노고지리가 허공에서 은방울을 굴리며 봄파종을 재촉하고 있다.

오후에는 강냉이씨 박는 일이였는데 콩박기와 별다름이 없지만 포기사이 간격이 늘기에 별로 볶아치지 않아도 일축이 퍽퍽 났다. 오후는 느슨하게 일을 다그쳐 일찌감치 하루 일을 마무리지였다. 하루 일을 깔끔히 끝낸 보람찬 기분이 젊은 가슴들에 흐뭇이 벅차오른다. 모두들 허리를 쭉 늘구며 이마의 구슬땀을 후련히 훔치고 정성스럽게 씨앗을 묻은 밭이랑들을 기분좋게 쓸어본다. 봄볕 사랑 속에 노르므레한 곡식싹이 움트는 소리를 듣는듯 찬란한 미소가 구리빛 얼굴과 연분홍 얼굴마다에 반짝인다.

일터를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하냥 즐거움이 넘친다. 길옆의 풀꽃들이 봄볕 사랑으로 활짝 피여 눈맛을 즐겨주고 금방 파랗게 모여 든 길짱구들이 줄지어 손벽을 치며 반겨준다. 이 저녁에 시원한 산들바람이 날아다니는 산촌길은 시흥이 도도히 넘치는 랑만의 길이였다.

석양빛이 금방 짙어가는 이른 저녁이여서 나는 산내음이 이끄는대로 산언덕에 올라 봄볕을 머금고 붉게 물든 진달래 가까이에 다가섰다. 아, 봄의 선구자 하고 가슴에 터지는 격정으로 진저리치며 진달래 가까이 다가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예술적 정취로 그 예쁨에 흠뻑 젖어들었다. 진달래 옆에 잠간 머물러 돌아가려다가 행복한 아쉬움이 풀리지 않아 금방 망울진 진달래나무를 몇가치 꺾어들었다. 집의 유리병에 옮겨 봄향기를 집에서 향수하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언덕를 내려 남골에서 흘려내리는 시내물가에 가 맑은 물에 먼지 묻은 얼굴을 씻고 나면 한결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저기 시내가 수양버들 푸릇한 이파리들이 실바람을 물고 재롱부리는데 버드나무 초리에서 알락까치가 꼬리를 달싹이며 깎-깎- 청쾌하게 목청를 뽑는다. 귀맛 즐겨주는 까치울음소리에 더욱 흥분된다. 오늘 저녁에 집에 가면 꼭 희소식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연변일보》 통신원이였던 나는 까치가 반겨주는 울음소리에 내가 쓴 통신기사가 신문에 실리지 않았을가 하는 예쁜 생각 그리고《연변일보 통신》소책자가 처마밑 우편함에서 날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즐거운 생각이 머리에서 맴돌아치였다. 까치울음소리가 선물한 즐거운 기분이 앞서가는 처녀들 속으로 줄달음쳤다. 선희야, 정희야 부르며 처녀들과 엉키여 희희닥거리는 봄날의 즐거움은 너무나도 화려하고 청춘의 정열은 너무나도 싱싱하였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고향의 봄이였던가! 인제는 그때의 봄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창가에 머물러 있던 착한 봄볕이 향수에 젖은 내 눈귀의 이슬을 훔쳐준다. 강산이 몇번 변하는새 내 귀밑머리에 흰서리 얼룩지여도 젊은 시절의 즐거운 날이 가슴에 파랗게 숨쉬고 있음에 감개가 벅찬다. 우리 ‘토종청춘’들의 그 시절 소박한 삶의 즐거움을 우리 자손들이 리해할 수 있을가. 리해하든 못하든 괜찮다. 제나름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닌가. 지나간 봄날이야기를 추억 속에 저장해두고 기념하리라고 마음을 애모쁘게 달래면서 젊은 정감을 보듬는다. 추억의 갈피속에 새여나오는 고향의 봄향기에 잠간씩 취해보는 것도 행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운 사념을 접는다.

세월은 갔어도 추억은 남아있다, 고향의 옛 모습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어도 추억의 봄향기를 내 인생의 끝자락까지 품고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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