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두 다리여□ 최균선

2019-05-23 15:35:28

건실한 두 다리로 온당하게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은 남들이 씨엉씨엉 힘차게 걸어가는 모습을 부러워할리 없다. 그만큼 걷기가 습관처럼 된 사람들에게 있어서 절실한 체험이 다가오지 않는 법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교정에서 물러나와 사무한 신이 된 후 봄, 여름 가을 롤라스케트를 타지 않으면 신들린듯 자전거려행을 하고 겨울이면 빙장에서의 질주를 즐기던 내가 요추간판돌출증으로, 련쇄반응인 좌골신경통으로 지팽이 신세를 지게 되면서 새삼스레 두 다리를 두고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길에서 지팽이를 짚고 다니는 불구자나 로약자들을 볼 때면 나도 언젠가 폴싹 해지거나 혹은 어떤 사정으로 지팽이에 의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저 남의 일 같지 않았지만 아파봐야 아픈줄 안다고 마침내 내가 겪어보니 나의 ‘위대했던’ 두 다리가 얼마나 고마운 기관이였는가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고 내 두 다리가 효자보다 낫다는 항간의 경세지언을 재삼 음미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걷는다는 것은 육체활동 중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걷기를 시작하는 그 순간, 체내는 물론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상상도 못했던 변화가 시작되는데 피의 순환속도가 상승하여 몸속 지방이 분해되고 산소공급으로 두뇌활동이 활발해지므로 최고 보약이라 한다. 그래서 운동은 병원이 되고 발은 의사가 되는게 아니랴, 그 뿐만 아니라 걷는 행위에는 깊은 세계가 존재한다. 두 다리에 실린 몸의 각부위를 움직이게 되는 도보는 나름대로의 실재감을 확인하게 하며 행복감을 다른 방식으로 느끼게 한다.

사실 철봉에 지꿎게 매달려 요추간판돌출이 호전되였는가 싶더니 설상가상으로 좌골신경통으로 ‘불구자자’로 고생하다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소실된다더니 기적같이 나아서 지팽를 팽개치고 다시 두 다리로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인생길은 저믈었어도 가는데까지는 가야하니 운명신이 보살폈는가!

그래서 거의 매일이다싶이 연집하 방뚝길을 얼마간씩 걷다가 돌걸상에 앉아 조석으로 보행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을 유정하게 보게 되였다. 동병상련으로 측은한 눈길이 가게 되는 사람들, 다이어트인지 하느라고 열심히 걷는 젊은 남녀들을 보면서 두 다리로부터 머리에 쓰잘데 없는 상념을 관통시켜본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두 다리, 건실한 사람이면 다 걷는 보행문제는 심히 무료한 화제이지만 일상의 문제도 달리 파고 들면 또 다른 의미를 찾아게 되고 심각해질 수도 있다. 보행능력은 조물주가 하사한 기본적인 본능이다. 찾음과 얻음을 위해 분주한 인생길에 다리 없는 분발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어두운 밤, 골목길 뉘집 창가에 그만 잊고 걷어들이지 않은 비에 젖은 옷가지 같은 지난 시절의 수많은 추억들을 다시 헹구어 본다. 지금까지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두 다리에 바람을 일구며 달려왔지만 무정한 세월의 류수에 흘러가버린 삶의 흔적들과 더불어 나의 두 다리에 넘치던 힘은 점점 멀어져갔다.

그냥 젊어서 살 것처럼 자신있게 동분서주하며 방황해서였던지 지금의 초라한 내 모습은 어디에 서있으나 뭇 눈길에 동정심이 넘칠만큼 보기 구차하게 되였다. 오래전 스쳐간 젊은 시절의 꿈은 뒤안길로 사라졌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걷기만 하다보니 지치고 지쳐버린 오늘, 누군가에게 기억되여지는 존재이기보다는 내 자신에 충실한 생명체이고 싶었는데 그마저 뒤끝이 모호하다.

강가의 마른 검불에 성냥을 죽 그어 불태워버리듯이 초라한 추억의 페지들을 불살라버리고 시들어버린 가슴을 부풀려보며 자신에게 고함을 질러 질타해보면서 곧 지나가버린 과거가 될 황혼빛 추억을 만드는 내가 무료하기도 하다. 밖은 넓은 자유의 공간이지만 열릴줄 모르는 새장 속에서 속절없이 울다가 목이 쉬여버린 앵무새처럼 그냥 습관처럼 하잘 것 없는 추억으로 여생을 엮을 수 밖에 없으렸다.

우연히 세상에 왔지만 필연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처럼, 멋도 모르고 받아안은 의무를 실행하는 것처럼 걸어온 파란만장한 나의 인생려로, 그렇게 걷고 걸어오다 가 결국 허무함에 쓴웃음을 흘리며 또 다른 생명의식이 꿈지럭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더구나 내 사색의 준마도 인젠 지쳐서 헐씨근거리는 것은 또 얼마나 실망스러운 일인가, 이제 얼마간 남은 여생길에서 사색마저 시들었다는 리유로 마땅히 가는데까지 열심히 가야 할 두 다리에 힘을 불러보는 것도 얼마나 무모한가!

그저 건강장수에 안주하는 내 실체를 나 스스로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되고 아이러니컬한지 모른다. 이제 나에게 남아있는 길에 퍼더버리고 앉아 생명활동을 시간을 맡겨버리기엔 너무 아쉽다는 생각에 억지로나마 나를 일으켜 세우고 두 다리에 힘을 주어보는 것이 내 자신의 생명의 확충인가?

밤새 몰래 내린 눈 우에 찍던 첫발자국을 떠올려본다. 그 발자국들이 건강을 확인해준다. 걷는다는 것은 육체적 생명력을 확인하는 생명운동이다. 굽이굽이 휘돌아진 동량골 산골길을 걷던 일이 생각난다. 산골길을 혼자 걸을 때 자연은 듣기의 소양을 키워준다. 혼자 걸으면서 보행의 고달픔을 맛보는 자체가 인생의 의미를 새겨준다. 먼먼 길도 걸어보았다, 마음을 지어먹고 하는 걷기는 운동항목이지만 일상생활에서 늘 보행하며 다리의 공능을 확보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가진다. 걷기는 생명의 근본을 깨닫게 하고 산하를 자기 몸안으로 불러들이는 생명의 확보이다.

한 사람이 온건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을 약속 받은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나무들은 뿌리를 가지고 광풍폭우에도 버텨내지만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기에 험난한 인생의 고개길을 넘어갈 수 있다. 걷기를 보장받은 삶, 걷기를 즐긴다면 그 어떤 역경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삶을 소유한 표징이다. 걷기는 인생과 생명에 대한 성찰의 시작이자 련속이다.

운동이 아닌 일상으로 내키는대로 보행을 즐길 수 있다면, 부지런히 움직이는 두 다리와 함께 명상도 뒤따르고 자신있게 밟아나가는 발밑에서 유익한 사색을 뚜렷이 찍을 수 있다면 이제 다른 욕심이 없을 것 같다. 굽이굽이 인생길 고개마다에서 비바람에 휘청거리면서도 악착스레 걷고 걸어온 나의 두 다리, 다른 사람이 대신 걸어줄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그냥 걸어야만 하던 두 다리여!

다비드르 브르통이란 사람은 ‘걷기례찬’에서 걷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라고 썼다. 침묵의 횡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둥말둥하지만 걷기는 확실히 자기 사색의 연장선을 긋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걸으면서 흔히 자기에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등의 근원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어 좋지 않은가! 물론 행선지를 모르고 가는 인생길이기에 선택의 갈림길에서 주춤거리기도 하지만 두 다리가 성하다면 역경의 오솔길도 홀로 걸을 수 있다.

그래 맞다, 고생많았던 나의 두 다리야, 힘내자, 뚜벅뚜벅 걷지는 못해도 휘적휘적 그냥 걸어보자. 들길을 걸어가야만 오는 봄, 가는 여름, 오는 가을, 가는 겨울의 숨결을 피부로 느낄 수 있으려니… 청청 맑은 날에 호듯호듯 정다운 해살을 받으며 여유롭게 걷는 것은 더 이를데 없거니와 우산을 받쳐들고 비속을 걷는 것도 또 다른 생활의 풍경선이거늘 다리야, 끝까지 고생해주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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