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동의 아들 리경천
음력 1월21일은 리경천의 생일이다.이날 마침 약수동일대에 들어간 그는 잠간 지체하고 떠나려 했다. '혁명자도 사람이겠지.생일날에 잠간 들렸다가 떠날 셈인가,못 가네.'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았다.자식을 혁명에 내놓은 후 발편잠을 쉬지 못하던 어머니가 아닌가.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용가가 없었다.

2019-07-15 09:39:49

2019년 4월 26일 밤, 연길시 원 대우호텔에서 리창윤(왼쪽 세번째 사람) 선생과 다섯째 동생 리창선(좌1), 넷째 동생 리창신(오른쪽 첫 사람)과의 모임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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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5월 30일 밤, 5.30폭동에 총궐기하면서 투도구령사분관을 겹겹히 포위한 각지 혁명군중들이 쏜 렵총 등으로 하여 령사분관 담장은 여러 곳에 탄알자국이 어수선하였다. 지난 80년대 투도구으로 가서 현지답사할 때 그날의 탄알자국으로 보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18년 12월 31일 현지답사차 투도구를 다시 찾았을 땐 투도구령사분관 그 자리엔 새 건물들이 일어서면서 그제날 담장과 령사분관 옛 건물들이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새 건물 안 뒤뜨락에 약간의 옛 담장과 한채의 건물이 댕그라니 보일 뿐이였다.

5.30폭동 후 적들은 겨끔내기로 평강벌 각지와 약수동에 달려들어 행패를 부리였다. 리경천은 5.30폭동 그날 밤 경찰서 일본 부서장놈과 박투하면서 량볼과 코등 등에 생채기를 낸 데다가 귀방울을 떼운데서 약수동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나돌아야 하였다. 장인강골안의 청룡하 남동 석골이 피신길의 한 피신점이였다.

악이 난 적들은 리경천을 붙잡지 못하게 되자 약수동 리경천의 집사람들을 매일 들볶았다. 적들은 리경천의 어머니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마구 흔들어대다가 고추가루물을 입에 쏟아붓기도 하고 리경천의 아버지 리동권 로인은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면서 미쳐 날뛰였다. 지어 그해 겨우 일곱살밖에 안된 리경천의 둘째아들 리종호의 목덜미를 쥐고 돼지우리 기둥에 되는대로 박아놓았다. 어린 것의 머리가 터지면서 피가 흘러내리였다.

이 어린이가 이후 자라서 결혼하고 안해를 맞아들이니 안해되는 분은 1924년 생이고 애명이 박금단인 박순희씨이다. 그리고 이들 리종호와 박순희 부부 사이 맏아들이 리창윤씨로, 리창윤씨를 통해 리경천 렬사의 가족관계가 쭈욱 펼쳐지게 된다.


1987년 박상활렬사비 락성식 때 리경천 렬사의 둘째 며느리이고 리창윤의 모친인 박순희(애명 박금단)이 유서깊은 약수동 상촌옛터의 버드나무를 어루만지는 사진.(2006년 별세, 리창윤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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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7월 10일과 11일, 평강구 제1차 당원대표대회가 약수동에서 열리고 제1기 중공평강구위가 산생하였다. 대표대회에서는 상급 당의 지시에 좇아 추수폭동과 무장투쟁문제를 중심과업으로 내세웠다. 대표대회는 또 적의 손에서 무장을 탈취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하면서 신춘이 군사총책임을 지고 평강구유격대 건설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리경천은 동지들과 함께 신춘을 도와 약수동, 소양구, 대양구, 장안강 등지 청년골간들 가운데서 유격대원을 물색하여 주었다. 7월말에 유격대가 건립된 뒤 그는 주요정력을 평강구 쏘베트건립과 추수폭동 준비에 두었다.

드디여 9월 7일에 평강구 쏘베트정부 건립대회가 약수동의 상촌에서 열리였다. 중촌엔 수백명 농민군중과 소선대원들이 모이고 상촌팔간집엔 평강구 각지에서 모여온 대표와 상급동지들로 빼곡하였다. 대표들은 약수동의 리봉삼을 쏘베트정부 회장으로 선출하고 선전, 행정, 경제, 군사, 법정 등 여러 부문을 두었으며 ‘쏘베트건립대회결의안’을 한결같이 통과하였다.

이어 토론의 중심은 경축대회문제에로 돌아갔다. 평강구 군사책임자인 신춘을 대표로 하는 사람들은 세린하의 대지주 손가네 집을 치는 것으로 쏘베트 성립을 경축하자고 주장하였다. 리경천은 이를 극구 반대하였다. 권총 한두자루와 작탄 몇개로 좋은 무기에 수십명 사병까지 가지고 있는 손가놈집에 접어드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ㅡ리경천의 이 정확한 의견은 적지 않은 대표들의 찬성을 받았다.

쟁론은 매우 심하였다. 두 의견은 서로 대립되였다. 결국 신춘의 주장이 다수로 통과되여 장인강 군중들이 도착하면 저마다 붉은기를 들고 행동하기로 결의하였다. 일단 결의가 지어지자 리경천은 자기 의견을 보류하였다. 다행히 장인강 군중들이 아직 당도하지 못했을 때에 중국륙군대가 밀려들었다. 급보를 받은 당조직에서는 불필요한 희생을 피면하기 위해 군중들을 급히 해산시켰다. 리경천은 무거운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 가슴이 거뜬하였다. 그날 어떤 동무들은 그를 ‘우경기회주의자’요, ‘겁쟁이’라고 조소하기도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평강구 제1차 당원대표대회에서 산생된 중공평강구위는 상급 당조직의 지시에 좇아 “착취자의 토지허가증, 고리대, 차용증서를 빼앗아 태워버리며 추수폭동을 보편적으로 전개”할 결의를 지었다. 그 뒤 8월과 9월 두차례 열린 구위 당확대회의에서는 또 추수폭동과 감소감식투쟁을 보편적으로 전개할 것과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고농민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리경천은 당조직의 분공에 의해 자기 집이 있는 소양구로 갔다.

아래우 마을에 30여세대 인가를 갖고 있는 소양구는 약수동 서쪽 산너머에 있는 산재마을인데 일찍 리경천에 의해 혁명의 터전을 닦은 고장이였다. 소양구의 마을들은 평강벌 지주들의 세력범위였다. 평강벌 지주들은 해마다 마름들을 보내여 소작인들을 감독케 하면서 일년 내내 지은 곡식을 당지에서 타작하여 소작료를 바치게 하였다.

1987년에 실화 계렬영화 《장백의 투사들》 촬영중 박상활 렬사를 형상화한 실화영화 《버들넋》을 찍을 때 약수동 버드나무 앞 기념사진. 사진 좌 2가 배우 리동범, 좌 5가 작곡가 최삼명, 좌 6이 리경천 렬사의 둘째 며느리 박순희, 좌 8이 연출 허동활, 좌 9가 항일렬사 리경천의 손자 리창윤. (사진 리창윤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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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구로 돌아간 후 리경천은 외지처럼 단순히 지주집 낟가리를 헤쳐가거나 낟가리에 불을 지르는 것이 처음 취할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인차 소양구 장대로부터 마을 앞을 흐르는 물역까지 소선대보초를 세우고 군중모임을 가진 한편 무대를 꾸미고 외지공연대를 청해왔다. 고운 원피스에 붉은띠를 두르고 돌아가는 처녀들, 성수나게 박자를 쳐가는 음악지휘, “온 세상 녀자들 일어납시다. 승리할 그날까지 싸워 봅시다.” 흉벽을 쾅쾅 울리는 혁명의 노래소리-소양구사람들은 밝아올 앞날에 취했다. 진보적 청년들은 혁명에 한맘으로 단합되였다.

리경천은 소선대원들에게 삐라살포 임무를 주면서 마을과 지주집 낟가리에 뿌리도록 했다. 헛되이 날리는 건 모두 회수해들이게 하고 매일 저녁마다 새로 찍은 삐라뭉치를 소선대원들에게 넘겨주었다. 삐라내용도 모두가 3.7제, 2.8제 실행에 대한 것,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낟가리를 태우겠다는 경고 등이였다.

삐라살포 활동은 매일 계속되였다. 마름을 통하여 삐라내용을 전달받은 평강일대의 지주들은 주눅이 들었다. 평갈벌의 추수폭동의 기세를 제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지체할 일이 아니였다. 소양구일대 밭들을 독차지한 지주들은 마름을 시켜 농민들의 요구를 일일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양구일대의 추수투쟁은 아무런 충돌이나 류혈투쟁이 없이 원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전해까지만 해도 가을에 가서 2~3푼 리자를 주기로 하고 지주집 뒤주에서 뜬 좁쌀을 가져다 우려먹던 농민들은 1930년도 지은 곡식을 거의다 먹게 되였다. 농민들은 공산당이 농민들의 질고를 헤아려준다고 싱글벙글하였다.

화룡현내에서 맹렬히 일어난 1930년 추수폭동은 필경 당내 ‘좌’적 령도의 산물이였다. 추수폭동은 비록 일제와 봉건통치배들을 심대히 타격하고 군중을 단련하여 이후 항일의 력량을 키우는 데서 마멸할 수 없는 역할을 했으나 문제점도 드러났다. 무턱대고 “폭동, 폭동”하고 웨치면서 지주집 낟가리를 헤치며 불을 지르거나 곳곳에서 주구를 잡아 많은 지주들은 일제측에로 내몰았고 조직을 지나치게 폭로시켰다.

놈들의 탄압은 갈수록 우심해졌다. 조직은 엄중히 파괴되였거나 지하로 들어가고 혁명자들은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5.30폭동에서 귀방울을 떼운 리경천은 신분이 탄로되였고 놈들이 주목하는 중점대상의 하나로 되였다.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약 100리가량 떨어진 안도현 도목구 일대로 들어갔다. 하나 그 곳에서도 귀방울이 떨어져나간 리경천은 신분이 쉬이 드러났다. 리경천은 현내 개산툰일대에 가 계속 혁명사업에 종사하라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끝간데없이 뻗어간 산발에 올랐다. 어디를 보나 눈뿌리 아득한 숲의 바다였다. 도중에 그는 황구령에서 호랑이를 만나 혼쌀이 났다.

음력 1월 21일은 리경천의 생일이다. 이날 마침 약수동일대에 들어간 그는 잠간 지체하고 떠나려 했다.

“혁명자도 사람이겠지. 생일날에 잠간 들렸다가 떠날 셈인가, 못가네.”

어머니는 아들을 붙잡았다. 리경천은 가슴이 뜨거워났다. 자식을 혁명에 내놓은 후 발편잠을 쉬지 못하던 어머니가 아닌가.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역할 용기가 없었다. 가간사를 돌볼 수 없는 ‘불효자식’이였으니깐 말이다. 그는 부모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안해와 아이 등 일가식솔들과 함께 생일날을 보내고 이튿날 다시 길을 재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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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에 나선 이 상봉이 마지막으로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화룡현 개산툰에 이른 리경천은 중공개산툰구위와 련계를 맺고 지하사업에 나섰다. 하지만 때는 귀방울이 떨어진 사람을 붙잡으라는 룡정 간도일본총령사관의 훈시가 하달된 뒤여서 개산툰일대는 편안치 못하였다. 리경천의 앞길은 걸음마다 위태로왔다. 그는 겨울기간 귀걸이를 하고 모자를 삐딱 내려 써서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차 넘겼으나 봄철 이래 사정이 달라졌다. 그에겐 달라진 귀를 제대로 할 재간이 없었다.

1931년 5월초, 그는 팔도하자일대에서 경찰서 순사놈들과 맞띠웠다. 낌새를 챈 놈들은 한쪽을 삐딱 눌러쓴 그의 모자를 와락 잡아챘다. 신분이 탄로되였다. 그는 불현간 맹호같이 몸을 날리며 순사놈들과 좌충우돌하였다. 그 서슬에 놈들은 일시 비실비실 물러섰다. 리경천은 중과부적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리경천은 그 길로 팔도하자(남양평) 경찰서로 끌려갔다. 악착스런 고문이 뒤따랐다. 리경천은 이를 악물었다. 죽을지언정 굴하려 하지 않았다. 놈들은 회유와 기만술을 피워댔지만 그의 마음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5월 5일, 리경천은 팔도하자경찰서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공산당 만세!” 높이 웨치였다. 피끓는 30대 후반의 한창 나이였다. 약수동의 아들 리경천은 다시는 동지들과 한길에서 싸울 수 없었고 다시는 부모처자가 생활하는 그리운 약수동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옹근 반세기-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생 시절에 필자는 약수동 항일력사 조사차 약수동을 찾았고 약수동 박상활 렬사의 친동생인 박동활 로인 등 분들로부터 리경천 렬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로부터 다시 근 40년 세월이 흘러갔다. 올해 4월 26일 밤 연길시 원 대우호텔에서 리경천 렬사 둘째 아들 리종호씨의 맏아들 리창윤씨와 둘째, 셋째 동생과의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다. 뒤늦게야 필자는 리종호씨는 슬하에 7남매를 두었는데 맏이가 1946년 약수동 태생인 리창윤씨라는걸 알게 되였다.

모두가 끌끌한 항일렬사의 후대들이였으니 리창윤씨는 필자 화룡2중 시절의 은사로서 197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선후하여 화룡고급중학교-화룡2중 교장, 훈춘시교사연수학교 교장으로 사업한 경력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9기, 제10기 인대 대표였다. 필자의 은사이면서 필자의 연변대학 조문학부 선배이기도 하였다.

은사님의 넷째 동생 리창신씨는 1957년 생,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였다가 1976년에 제대한 후 선후하여 훈춘시공안국과 연변조선족자치주 물자국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다.

은사님의 다섯째 동생 리창선씨는 1959년 생이고, 통화사범학교 졸업생으로서 도문 6중, 화룡5중 공청단단위 서기로 활동하였던 교원출신이기도 하였다. 그 후 선후하여 연변의학원 학생사업처 책임자로, 연변의학원 간호학원당위 서기로, 연변대학당위 조직부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연변대학 교육기금회 전직 부리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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