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샘터□ 최 문

2019-08-16 09:43:41

나는 무더운 여름날에 랭장고에서 시원한 병샘물을 꺼내여 마실 때마다 추억 속의 고향의 샘터를 떠올리게 된다.

나의 고향 샘터는 시내에서 5킬로메터 남짓이 떨어진 한 시골에 자리잡고 있다. 봄이면 깎아세운 듯한 절벽에는 진달래, 살구꽃이 만발하고 산기슭에는 개암나무가 숲을 이룬다. 심층용암을 뚫고 퐁퐁 솟구치는 티없이 맑고 깨끗한 샘물은 졸졸 흘러 시내물을 이루고 버들방천에는 산천어가 뛰논다. 유독 이 샘물에서만 동틀 무렵이면 나타났다가도 해가 뜨면 사라지는 기장쌀알 같은 상고와 물새우가 있다. 상고는 사람들의 골격병치료에 좋은 비방약으로 알려져있으므로 이 샘물은 약수로도 불리운다.

1920년대, 고향은 산골짜기에 띠염띠염 자리잡은 산재호마을이였다. 아버지의 동년을 보내던 뒤동거우 샘터 부근의 옛집도 일제의 ‘3광정책’에 의해 강제로 집단마을로 이주하였다. 일제는 마을주변에 높은 담장을 쌓고 네면에 보초망을 세워 항일유격대와 군중과의 련계를 차단하려고 망녕된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샘물처럼 솟는 항일투쟁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수많은 항일투사들은 식량난을 겪던 그 간고한 나날, 고향의 샘터에서 기아와 갈증을 풀었고 망국노의 설음과 치욕의 눈물을 씻으며 항쟁의 불길을 거세차게 지피였다. 당시 고향의 샘터는 항일투사들의 숙영지로, 비밀련락지점으로, 회의장소로, 항일대오집결지로 되였다. 그러므로 유명한 청산리전역에서 항일명장 김좌진 장군이 거느린 부대는 일제의 한 분대를 전멸하고 휘황한 전과를 올렸고 일제는 화룡신동소학교 운동장에서 추도회를 소집하는 추태극을 벌리기도 했다.

해방 후 고향의 샘터는 항일투사들의 발자취가 력력히 찍혀있는 유서깊은 곳이였다. 화전농의 후손인 아버지는 광복과 토지개혁을 맞고 땅을 분배받은 가슴벅찬 희열에 구술땀 흘리며 밭을 일구다가도 고향의 샘터에서 시원한 샘물로 목을 축이며 농사를 지었다. 나도 동년시절, 아버지를 따라 수레에 앉아 샘골로 갔다가 밭머리에서 소를 타는 재미로 방목하며 동년시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시골의 개구쟁이인 나는 일본침략자들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증을 공소하는 집단부락의 옛 토성에서 밤이면 숨박곡질과 전투놀음에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부모님의 손에 잡혀 끌려가기가 일쑤였다. 가끔 저녁이면 임할아버지의 항일투사들이 왜놈들과 싸우던 피어린 투쟁이야기에 홀딱 반하여 밤이 깊어도 자리를 뜰줄 모르며 잔뼈가 굳어졌다.

고향의 샘터는 우리 가족의 생명수로, 나의 젖줄기마냥 푸른 꿈을 키워주었고 희망과 리상의 경지에로 오르는 원동력이 되였다. 1960년대초, 고향에는 특대 자연재해가 덮쳐들어 아사위기를 겪었다. 어머니는 중병환자인 아버지께 이웃의 로동자집에서 준 쌀로 미움을 쑤어 대접시켰고 샘물을 길어다 갈증을 풀게 했다. 우리 식구는 내가 시내가에서 잡아 온 물고기에 애호박을 넣은 국으로 보래고개를 넘겼다.

그 시절, 나는 가수나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 최대의 념원이였다. 나는 마른 날, 궂은 날을 헤아리지 않고 이른아침이면 샘터로 달려가서 샘물을 마시고 몸을 씻은 후 산이 쩌렁쩌렁 메아리치도록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면서 목청을 한껏 틔웠다. 50년 후 나의 로년에 특이한 랭수욕건강관리습관은 고향의 샘터에서 키운 것이다. 이런 보람으로 나는 겨울에도 가정의 째진 가난으로 솜옷 한벌 입어보지 못하여도 건강한 몸으로 고중을 졸업하고 사범학원에 입학하였다. 교원시절, 나의 랑독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늘 아나운서 못지 않다고 머리를 끄덕여주었으며 학생들은 어문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고향의 모내기철이면 생산대모내기의 동원방송은 내 몫이였다. 이른 아침이면 단잠에서 깨여나 눈을 비비며 잠자리에서 일어나 대대사무실로 나가 방송을 틀어놓고 웅글진 목소리로 ‘일체는 모내기 돌격전으로!’라고 구호를 웨치며 사원들을 피곤에서 깨우고 논판으로 동원하던 격정시대의 추억은 한편생 고향의 샘터와 더불어 내 가슴을 적셔주는 건 어찌하랴!

나의 큰아들이 뽈을 차다가 넘어져 다리뼈에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고향의 샘물과 상고를 떠다가 먹였더니 얼마 안되여 건강이 회복되였다. 어머니가 80여세의 고령에 뇌출혈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년간 생사를 다툴 때에도 나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과 유언을 들어 어머니가 운명하는 순간까지 고향의 샘물을 입에 떠넣어 드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오늘 고향과 샘터는 몰라보게 변하였다. 샘터의 오솔길도 세멘트로 층계를 만들었고 주위에 화단과 놀이터도 만들었다. 고향의 샘터는 태양의 계절 가을을 맞아 빨간, 하얀 코스모스들이 만개하여 꽃잔치에 제법 흥그럽다. 찌그러진 초라한 초가집들 온데간데 없고 울긋불긋 빨간 벽돌기와집들은 보란듯 가로세로 줄지어 들어섰고 샘물을 끌어들여 집집마다 수도물을 마시고 있다. 비만 오면 질척거리던 마을의 좁은 흙길은 넓직한 포장도로로 변하였고 마을 옆으로 통하는 지난날 자주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생명을 앗아가는 화근이던 경사도가 가파른 공로는 평지길로 개변되였다.

넘실넘실 황금파도 설레이는 가을철에 산들산들 바람에 고향의 샘물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찰랑찰랑 고향의 샘물은 대자연의 푸른 꿈과 풍요로움의 서정으로 고향의 기꺼운 변화를 노래부르며 해란강에 흘러든다. 고향의 샘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색바램이 없이 초심과 사명을 잊지 않도록 오늘도 나의 가슴속에서 세차게 흐르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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