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바랜 추억 한쪼각, 그땐 그랬지…

2019-09-04 08:49:26

앨범을 펼치지 않으면 기억 저 너머로 아스라하게 사라져버리는 추억의 편린들, 그땐 그랬지... 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꼭 같은 세대를 겪었던 사람들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았던 그 시절, 똑같은 오또기 저금통, 똑같은 샌들이 너의 집에도, 우리 집에도 있었다. 같은 세대의 추억이 모이면 그 시절의 력사가 된다.

70, 80세대의 앨범 속으로 들어가보자.

할머니가 만든 치마저고리

(조련화, 39세, 일본)

작년 봄, 엄마가 일본에 오시면서 나에게 뜻깊은 선물을 하나 안겨주셨다. 그것은 나의 돌잔치 때 외할머니께서 손수 만들어주신 색동저고리였다. 엄마는 “이젠 네가 건사해라.” 하며 나에게 넘겨주셨다. 4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저고리는 색도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력력했지만 한땀한땀 깃들어있는 할머니의 사랑이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엄마의 말씀을 빌자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소녀가장이 돼야 했던 외할머니는 손끝이 여물기로 소문 났다고 한다. 집안일은 물론 고된 논밭일까지 솜씨가 여간 내기가 아니였고 나를 비롯한 모든 손자손녀들의 돌잔치 한복도 직접 만들어주셨다고 한다.

올해 외할머니는 87세이다. 집안 사정과 건강문제 때문에 할머니는 부득불 한국 료양병원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지난 6월, 심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무작정 티켓을 끊고 한국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외할머니는 이리저리 휘청이던 손녀의 힘든 마음을 알아채셨는지 말없이 서랍에서 크림을 꺼내어 발에 발라주고 부드럽게 마사지를 해주셨다. 내 기억에 외할머니의 손은 약손이였다. 어렸을 적 아프던 배도 할머니께서 손으로 문질러주시면 감쪽같이 나았다.

사실 효도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어 외할머니를 찾았지만 되려 외할머니의 약손으로 마음을 마사지받고 치유받는 느낌이였다. 외할머니의 손은 아직도 너무 부드럽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왕창 전달해주셨다.

“우리 손녀 많이 힘들구나, 힘내, 할머니가 계속 응원해줄게.”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에는 이런 응원의 메시지가 가득 들어있었다.

오늘도 나는 외할머니랑 멀리 떨어진 일본땅에서 색동저고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외할머니를 그린다. 외할머니 꼭 건강하세요, 다시 뵙는 그날까지…

그리운 감독- 최은택
(최미란, 39, 연길)
서른살 이전에는 세월이 쏜살같다는 말을 리해하지 못했다. 서른이 넘고보니 하루하루 일년일년이 고속철도처럼 빠르다.
지난 주말, 집정리를 하면서 나온 옛날 빛바랜 사진 한장 그리고 사인, 1997년이 십년 전인가 했는데 손꼽아 보니 무려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5년 전후로 우리에게 박태하 감독이 있었다면, 20여 년전 우리에게는 최은택 교수님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한참 까마득한 당시, 나는 한창 축구에 미쳐있었다. 나뿐이 아니고 아마도 거의 모든 연변사람들이 축구에 미쳐있을 정도로 우리 연변축구의 전성기가 아니였나 싶다. 그 중심에 최은택 교수와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장경화, 김청 등 지금 들어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이름들이 있다. 당시 매일 방과 후면 연변팀 선수들이 련습하는 것을 보러 강뚝으로 가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내처 앉아있었다. 주말이면 련맹전을 보러 경기장에 가거나 TV앞을 지켰다. 당시 발행됐던 《스포츠신문》도 한기도 빠짐없이 전부 사서 보고 또 저장했다. 오늘 보면 추억이 되는 교수님의 사진과 사인들도 그 당시 어느 날인가 연변팀 뒤를 따라다니다 얻은 결과물이다.
최은택 교수에 대한 연변사람들의 사랑과 존중은 하늘과 같았다. 여직 연변축구를 거쳐간 감독이 수없이 많고 많지만 그 중에서 감히 대부라 불리는 사람은 명실공히 최은택 교수밖에 없다. 말수적고 조용한 학자같은 최은택 교수, 그 당시 과연 어떤 결심으로 이 땅을 찾으셨을가. 있다는 건 열정뿐인 척박하고 거친 연변땅을. 그리고 어떻게 이땅에서 기적을 쓰셨을가.
최은택 교수는 우리의 자랑이였다. 같은 최씨인 덕분에 우리 아버지의 애정은 더 말할나위 없었다. 그중 기억나는 말씀이 있다. “우리 최씨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잘생겼다. 최은택 교수님을 보고 너 아버지 보면 알리지 않느냐. 그냥 막 생겨도 이 정도인데 작정하고 꾸미면 얼마나 멋있겠냐.”
다른 사람들에게 이름을 소개할 때도 우리는 “최은택이라는 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최은택 교수가 떠나고 연변축구가 기로에 들어설 즈음 나 역시 고향을 떠나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취직하게 됐다. 그 시간동안 연변축구는 낡은 사진과 사인과 함께 고향집 깊은 서랍속에서 고이 잠들어갔고 내 마음 깊숙히 간직됐다.
이젠 고인이 된 그 이름 최은택,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우리 연변축구, 안타깝고 통탄스럽다.
결국 늙는게 두려운게 아니라, 잊혀지는게 두렵다.

돌잔치에 담긴 추억
(리해봉, 33세, 하문)
내 돌잔치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어머니는 감개에 젖어서 옛 추억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운 조선족 녀인이셨다. 아버지가 약간은 허황된 꿈에 들떠있을 때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콩나물, 숙주나물을 키워서 팔면서 꾸준히 조금씩 돈을 벌었다.
그때 우리 집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못사는 집이였다.
내 돌이 다가올 무렵, 어머니는 몸도 춰서지 못했을 법한데도 가녀린 녀성의 몸으로 콩나물, 숙주나물을 부지런히 키워 팔았다. 그때 우리 집은 마을의 둔덕에 있었는데 400근이 넘는 콩나물, 숙주나물을 밀차에 싣고 올리막을 올라갈 때면 숨이 턱까지 닿았지만 딸내미 돌잔치만은 남부럽지 않게 해주고 싶은 욕심에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내 돌잔치 한복을 샀고 생일상도 그럴듯하게 차려줬다. 사진은 바로 그때 그 시절 어머니의 행복, 어머니의 보람을 담았다.
두 딸을 키우면서 어머니는 한시도 쉰 적이 없었다. 겨울에 장갑을 끼고 팔면 고객들이 께름직해 한다고 맨 손으로 팔다보니 늘 동상에 걸리군 했다. 지금도 동상의 흔적이 력력한 어머니의 손과 얼굴을 만질 때면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렇게 고생한 어머니인줄 알기에 나는 효도를 첫자리에 놓는다. 10년전 쯤 청도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청도에 집을 살 수 도 있었지만, 그러면 청도집값이 올라서 더 큰 돈을 벌수 있다는 것도 알았지만, 부모님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더 누리라고 룡정에 집을 사드렸다. 지금은 마을에서 가장 좋은 집에서 사시는 우리 부모님이다.
지금도 돈만 생기면 부모님한테 챙겨드리기에 바쁘다. 결혼하기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해드리고 싶다.

7세 어린이 북경 류랑기
(리정하, 38세, 연길)
1987년 여름, 8월의 어느날, 당시 7세였던 나는 아버지의 직장에서 직원복리로 가족들과 함께 하는 북경 려행을 떠났다.
태여나서 처음으로 먼길을 떠난다는 그 설레임에 잠을 못잤던 7세의 여름밤은 아직도 내 머리속 메모리카드에 고스란히 저장돼있다.
32년전 그때는 록색기차를 타고 40여시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그때만 해도 관광객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 차량도 적었다.
우리는 관광객 신분에 엄청 충실했다. 매일 아침 7시에 호텔을 나서서 명소를 찾아다니고 저녁 9시 넘어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처음으로 전기선 궤도를 리용하는 긴 뻐스를 타봤고 처음으로 쌍둥이아이스크림을 먹어봤다. 당시 연변에는 그런 아이스크림이 없었다. 그 아이스크림(双棒雪糕)에 담긴 추억은 아마 죽을때 까지도 못 잊을 것 같다.
그날은 점심에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남자들의 술상이 길어지자 어머니들은 애들을 데리고 먼저 가까운 쇼핑몰에 가서 돌아보기로 약속하고 식당을 나섰다. 몇발자국 걷다가 어머니한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했더니 아버지한테서 돈을 받아오라고 하기에 난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서 용돈을 받고 곧장 아이스크림 사러 갔다. 하나에 20전이였으니 받은 1원으로 5개를 샀다. 또래 애들도 있고 해서 나눠 먹으려고.
손에 들고 다시 식당으로 갔는데 웬걸…아무도 없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그 주변을 다 기웃거리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30분가량 헤맸을가… 길 건너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서야 안도의 울음을 터뜨리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고 손바닥을 내려다 보니 8월의 여름 온도에 아이스크림은 사라지고 꼬챙이 10개만이 남겨져 있었다. 자칫 고아가 되였거나 불량집단에 잡혀 길거리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이 될번 했다. 물론 좋은 분을 만났었더라면 한족애로 성장했을지도…
모주석기념당 방문도 인상깊다.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일렬로 서서 관리원의 감독하에 우리는 말한마디도 못하고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내면서 모주석의 유체를 바라보며 서서히 움직였다.
어린 나이였던지라 하루종일 다른 관광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고 유리관 속 모주석의 모습만 머리속에서 자꾸 떠올라 저녁에 잠도 설쳤다.
고궁을 번화한 시장통으로 알고 구경하기도 했고 천단에 있는 메아리가 들리는 벽도 너무 너무 신기했다. 이화원에서 본 엄청나게 큰꽃이 련꽃인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으며 산 우에 길고도 긴 성이 만리장성인걸 처음 알게 되였다. 그때 만리장성에는 케이블카도 없어서 처음부터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7살 어린이한테 북경관광은 그 무엇 하나 신기한 것 투성이였고, 궁금한 것들로 꽉 차있었다. 심지어 넓은 장안거리를 보면서 학교운동장처럼 넓다고 했다.
다시 북경땅을 밟을 때는 15년이 흐른 2002년도였는데 7살 때봤었던 북경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천안문, 넓은 장안거리, 모주석기념당, 혁명렬사기념비, 인민대회당 등등은 하나도 변한게 없이 그대로였다.


리련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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