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물□ 최진옥

2019-11-29 10:44:01

내 고향 평산대 북쪽 기슭에는 아담한 샘터가 자리잡고 있다. 누가 언제 어떻게 파놓은 샘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움푹 패인 샘터 주위는 봄이면 파릇파릇 새싹이 움터오르고 여름이면 무성한 들꽃과 들풀들이 샘터 주위를 수놓는다. 가을이면 열매 맺아 대롱대롱 매달린 씨앗들이 빙그레 미소를 짓고 겨울이면 골짜기에서 흘러오는 찬공기와 샘터에서 피여오르는 수증기의 조화로 풀가지마다에 대롱대롱 맺힌 무송(雾松)이 한낮의 해빛에 반사되여 눈부시게 빛나면서 감탄을 자아낸다. 그 샘터에서는 사시장철 마를 줄 모르는 샘물이 새노란 모래알을 굴리면서 퐁퐁 솟아오른다.

샘터 서쪽 언덕에는 우리 집 뙈기 밭이 한자리 있었다. 봄이면 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괭이를 들고 뙈기밭을 일구러 따라간다. 몇리길을 터벅터벅 걷고 보니 목이 마른다. 샘터를 지나면서 샘물 한웅큼 떠서 마신다. 그 샘물에 목을 추기면 온몸에 새 힘이 솟는 것만 같다. 뙈기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저녁녘이면 밭에서 내려오면서 샘터에서 휴식을 취한다. 샘물을 떠서 목을 추기느라면 하루 동안 뙈기밭을 일구면서 입안에 감돌던 겨불내가 확 날아나고 맥이 진했던 온몸의 피곤이 순식간에 확 날아가는 기분이다.

엄마 따라 애호박 따러 갈 때에도 샘터를 지나게 된다. 골짜기에서 솔솔 불어오는 청신한 바람이 페부를 어루쓸어주고 풀향기, 꽃향기, 나무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면서 쉬임 없이 퐁퐁 솟아오르는 맑고 시원한 샘물이 우리 모녀의 발목을 잡는다. 두 손을 모아 샘물 한웅큼 떠서 목을 추기면 겨불내가 확 날아나고 페부까지 시원해난다. 구슬땀이 송골송골 돋아난 조그마한 얼굴에 샘물 한웅큼 끼얹으면 머리속까지 차거워진다. 돌밭길에 지친 두 발을 물속에 잠그노라면 뼈속까지 찡찡 저려난다. 가을이면 잘 영근 호박 따러 뙈기밭으로 오른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산열매가 무르익는 향기가 실려온다. 코끝을 벌름거리며 산 열매 향기를 맡고 시원한 샘물 한모금 마시면 신선이 따로 어디에 있으랴.

겨울이면 땔나무 수레를 길옆에 세워놓고 샘물 한모금 마시는 기분은 어떨가? 오빠와 아버지한테 물어보아야 하나? 두말 할 것 없이 이발이 시리다고 할 것이다. 나무를 하면서 활짝 열렸던 땀구멍들이 일시에 꾹 닫혔다고 할 것이다. 온몸이 으스스해났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시원하고 달콤한 샘물맛이 최고였다고 할 것이다. 바쁜 걸음에 갈린 목을 추기고 더위를 쫓아내고 갈증을 풀어주는 그 샘물이 우리 식구들한테는 자연이 안겨주는 크나큰 선물이였다.

반갑게 맞아주고 아쉬운 리별을 고하던 샘물은 지금도 가끔가끔 내 꿈에 나타나 고향 떠나 타향살이에 찌든 나를 고향집에 불러들인다.

고향을 그리노라면 고향집이 떠오르고 고향집이 떠오르면 그 집에서 있었던 많고 많은 일들이 눈앞에 줄을 선다. 뙈기밭을 일구고 애호박을 따오고 산나물을 뜯어오고 농익은 호박을 따오고 땔나무를 해오고, 그런 일들을 생각하노라면 어느덧 샘물이 눈앞에서 알른거린다. 오고 가면서 한웅큼씩 떠 마시던 샘물이였다. 사계절 변함없이 정답게 맞아주던 샘물이였다. 시원함으로 갈증을 없애주던 샘물이였다. 달콤함으로 새 힘을 북돋아주던 샘물이였다. 그 샘물을 떠올리노라면 엄마가 어느덧 그 샘터에 서 있는 것만 같다. 샘터로 모이라고 우리들 이름을 하나하나 정답게 불러준다. 샘물을 마이고 가라고 손을 잡아이끈다. 샘물 한웅큼씩 떠서 우리들의 입에 가져다준다. 샘물 한모금씩 넘기고 빙그레 웃는 우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가난했던 세월, 먹을 것이 모자라던 세월에 남자식구들만 한구들 거느렸던 엄마한테는 일년간의 민식거리가 얼마나 큰 고민이였을가? 하루 세끼 밥상 차리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가? 한끼를 먹고 나면 다음 한끼가 걱정이 되였던 세월. 돌밭과 모래땅과 진흙땅이 위주였던 내 고향은 땅이 척박하여 비가 오면 진흙이 정갱이까지 올리붙어 땅에 들어설 수 없고 가물면 곡식들이 비쩍 말라 당금이라도 불이 붙을 것만 같아 담배연기조차도 뿜어내기 저어되고 돌밭에 할퀴운 호미날이 무디고 모지라져 한해 기음철을 넘기기도 어려운 고장이였다. 그 척박한 땅을 걸구려고 겨우내 모래밭에 진흙과 초탄을 이어나르고 돌밭의 돌을 주어내고 거름을 내느라 기나긴 겨울에도 한가할 틈이 없었다. 하늘을 믿고 짓는 농사였지만 부지런한 농군의 손끝에서 한해농사를 다 지은 끝자락에 그나마 쭉정이 농사는 면하여 그럭저럭 민식이나마 겨우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다..

심한 관절통으로 손가락 뼈마디마다 퉁퉁 부어 웬간한 물건조차 제대로 쥐기 힘들어했던 엄마 손에는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낮에는 생산대일에 눈코 뜰 사이 없고 밤이면 가물가물하는 등잔불 밑에서 구멍이 난 옷이나 양말이나 장갑 따위들을 기웠다. 기나긴 겨울밤, 몇시가 되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오줌이 마려워 깨여나보면 엄마는 그때까지도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 해인가 양복점에 다니는 사촌언니가 옷을 짓고 나머지 자투리천들을 한보따리 가져온 적이 있다. 엄마한테는 설중송탄이였다. 그 일이 고마웠던 엄마는 두고두고 외우군 했다. 한뜸 한뜸 바느질에 지겹고 가난한 생활과 서럽고 고통스러운 삶까지도 바느실에 꽁꽁 얽매여놓으려는듯 등잔심지를 바늘끝으로 돋구어 올리면서 바느질로 밤을 새웠다.

하루 세끼 밥상에 나물밥이라도 풍성하게 올리려고 봄부터 가을까지 틈만 나면 들나물, 산나물, 산버섯 따기에 나섰다. 해동이 되기 전에 새끼돼지 두마리 우리에 사다 넣고 여름 내내 풀을 뜯어 정성 다해 끓여먹이면 가을에 팔 수 있었다. 다 큰 돼지를 팔기 전이면 또 새끼돼지 두마리 사온다. 겨우내 키우면 이듬해 늦봄에 두마리를 팔 수 있다. 일년에 돼지 두마리씩 키워 팔면 생활에 큰 보탬이 되였다. 엄마 손은 나물물이 오르고 풀물이 들어 원 피부색이 도대체 어떤 색갈인지를 분간할 수조차 없었다.

손톱이 물러지고 손바닥과 손등이 갈라터지도록 일손을 다그치고 숫구멍이 닳고 등이 휘도록 이고 지고 누구한테 쫓기우듯 항상 바쁜걸음만 하셨던 엄마는 내가 세상물정을 알아서부터 손톱, 발톱을 깎는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봄이면 감자밭에 가 지난 가을에 파면서 손새가 났던 언 감자이삭을 주어와서 껍질을 바르고 물에 푹 불려 우렸다가 일부는 소금과 사카린을 적당히 버무려서는 가마에 쪄서 먹고 일부는 말리워 가루내여 조개떡이나 언감자밴새를 하여 입맛을 돋구었다. 눈이 녹아내리기 전에 무우밭을 찾아가서 지난해 버린 무우잎을 등이 휘도록 지어온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내리면서 눈길에 미끄러져 엎어지면서 엄마 몸에는 숱한 멍이 들었다. 살갗이 할키우면서 빨간 속살이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져온 무우잎을 데쳐서 쌀알이 보일가 말가한 시래기국죽을 끓여 밥상에 올리면 우리들은 엄마의 피와 땀과 멍을 눈물로 삼키였었다. 민들레, 달래, 세투리, 닥지싹, 삽주, 참나물, 기름고비, 고사리, 병풍꼭따리, 버들버섯, 참나무버섯, 개암버섯, 솔버섯, 이깔버섯, 도라지, 더덕, 삽주뿌리…들나물, 산나물, 버섯, 약재를 캐느라 이고 지고 들고 하면서 누비고 다닌 들과 산인들 얼마나 많았고 그 골짜기 그 산발의 자욱자욱마다에 흘린 땀인들 얼마나 많았으랴.

엄마의 피와 땀과 정성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물로 되여 온 집 식구의 목을 추겨주었고 배를 불려주었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뜨뜻하게 지내게 할 수 있었다. 그 샘물을 먹고 우리는 키도 자라고 몸도 자라고 마음도 자랐다.

엄마 사랑은 샘물이였다. 솟아도 솟아도 끝이 없는 샘물이였다. 주어도 주어도 줄지 않는 샘물이였다. 흐르고 흘러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샘물이였다. 봄이면 파릇파릇 움터오른 새싹을 키우는 샘물이였고 여름에는 찌는 듯한 무더위를 달래주는 시원하고 달콤한 샘물이였고 가을에는 풍년씨앗을 거두어들이는 기쁨의 샘물이였고 겨울에는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행복의 샘물이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맛이 변하지 않고 색갈도 변하지 않고 심한 가물에도 량이 줄지 않는 샘물이였다.

평산대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샘물, 맑고 시원한 샘물은 오늘도 쉬임없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다. 저 멀리 하늘나라 구름송이로 되신 엄마는 오늘도 나한테 맑고 시원하고 달콤한 샘물을 보내주고 있다. 퐁퐁 쉬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을 보내주고 있다. 맛도 색갈도 변함없고 량도 줄지 않는 영원히 마를 줄 모르는 샘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제 그 샘물은 내 딸애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내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로 한방울 한방울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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