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체인지□ 주련실

2019-12-06 09:28:35

1

“니가 뭔데 내 핸드폰을 건드려!”

“왜 ? 머 못 볼 거라도 있어? ”

“적어도 사생활 침해는 하지 말자  좀, 응? ”

“부부끼리 뭐 숨길 것이 있는데? 니가 속이 구리니깐 비번을 계속 바꾸는 거지 뭐 잘했다고 큰소리야? ”

“어휴~ 지긋지긋하다, 지긋지긋해. 이 놈의 집구석. ”

쾅.

복도에 메아리를 치며 닫긴 문은 우리 둘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하였다.

지난번에 회사 녀동료가 밤 늦게 위챗 메시지 하나 보낸 것을 얼핏 보고였나? 아니면 그전에 아는 동생한테 생일축하한다고 붉은 봉투 보낸 것을 본 후부터였나?

아~ 머리가 지끈지끈 저려온다.

나는 담배 한대를 꼬나물고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나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준다. 그림자가 쓸쓸해보이는 것은 아마 착각일 것이다.

얼마 걸었는지 가던 발길을 멈추고 머리를 들어보니 아는 형님이 차린 호프집 앞이였다.

가게에 들어서서는 자연스럽게 자주 앉던 창가 옆 테블에 자리잡고 앉아 창 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길 건너편에서 커플 둘이 실랑이를 벌리고 있다. 아마 녀자가 삐져서 남자가 달래고 있는 모양이다.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녀자애는 손에 들었던 물건을 확 내팽개치고는 돌아서서 택시를 잡았고 남자는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되였는지 시동을 거는 택시를 세우고 녀자를 와락 그러안았다. 조금 실랑이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둘은 손을 잡고 갈 길을 갔다.

풋!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며 고개를 돌려보니 일을 마친 형님이 맥주를 들고 옆에 와 앉았다.

맥주를 건네주는 형님을 마다하고 소주를 달라고 하였다. 형님은 소주를 즐겨 마시지 않는 나의 뜬금없는 요구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냥 집안 일이라고 에둘러 얘기했다. 형님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더니 말없이 소주를 가져다주며 녀자의 마음도 좀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혼자서 집에서 애를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결혼도 안한 로총각이 련애박사인양 장문의 연설을 풀어놓기 시작하였다.

열을 띠고 연설을 하고 있는 형님의 입을 틀어막아버리고 등을 떠밀면서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였다.

소주를 한잔 쭈욱 마시니 잠시마나 기분이 좋아진다.

하. 수현이.

이것 의심하고 저것 의심하며 날마다 닭알이 비싸졌네, 마늘값이 올랐네 이런 데만 정신 파는 수현이, 화장은커녕 세수도 제대로 잘하지 않아 가끔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수현이, 그래도 한때는 학교 퀸카였는데…

여느때와 다름없이 수업을 빼먹고  단짝인 철이와 둘이서 바지자락으로  학교 운동장의 먼지를 쓸고 있는데 대학 1학년 햇병아리들이 등록하러 온다는 소리에 재빨리 숙소로 돌아가 샤와하고 향수 반통을 들이붓다 싶이하고는 학교 정문으로 뛰여갔다.

아니나 다를가 수많은 상큼한 신입생들이 저 멀리서 까르르 대며 캐리어를 끌고 삼삼오오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 이쁜 녀자애 없나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두리번 두리번 살펴보고 있는데 하얀 원피스에 까만 단발머리를 하고 가느다란 팔로 힘겹게 캐리어 두개를  끌고 오는 한 녀자애가 수많은 신입생들중에서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위는 먹물 칠한 듯 온통 암흑으로 변하였고 그녀만이 가운데서 다이아몬드처럼 빛이 났다.

나는 철이가 고개를 돌려 눈곱을 뜯는 사이 번개같은 스피드로 단발머리 녀자애 앞에 다가가  캐리어를 대신 끌어주면서 인사를 건넸다.

활짝 웃으며 손을 내미는 그녀를 보니 이 세상에 정녕 요정이 있다고 하면 바로 앞에 있는 이 녀자가 아닐가 싶었다. 나의 선수에 한발 늦은 걸 알아채고는 뒤에서 펄쩍펄쩍 뛰며 온갖 육두문자를 퍼붓는 철이를 향해 나는 승리 V자를 그려보여주고는 그녀를 보도실까지 데려가 입학수속을 챙겨준 후 기숙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였다. 여느 커플들과 다름없이 만남과 헤여짐을 반복하였지만 다들 대학 졸업하고 각자 갈 길을 선택하였을 때도 우린 서로의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단골 쥬스가게 아줌마는 우리가 오누이인가 하고 오해를 한 적도 있었다. 대학을 먼저 졸업한 나는 출근을 하면서 수현이가 졸업하기를 기다렸고  자연스럽게 결혼에까지 골인하였다.

먹고 사는 게 힘들었지만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꿋꿋이 현실과 맞싸웠다.

그렇게 1선 도시에 집도 사놓았고 작년에는 하늘이 내려준 선물 아들 내미도 태여났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이는 점점 대화가 어려워졌다.

수현이는 점점 자신이 싫어하던 동네 아줌마들처럼 파자마 바람에 시장에 가서 채소를 사면서 가게주인들이랑 싸우기도 하고 누렇게 뜬 메주색의 민낯으로 온 동네를 휘집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는 그녀가 한심해 몇마디 하면 내가 변했다는 둥 하면서 점점 의심이 심해졌고 수시로 내 핸드폰을 뚜져보고 가끔은 벗어놓은 옷의 냄새도 맡아보군 하였다.


2

“여보, 여보, 빨리 아침 안 차리고 뭐해? 나 늦는다! ”

시끄러운 소리에 소주 4병에 푹 절은 무거운 머리를 두 손으로 받들고 일어나 보니 거실에서 내가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옷을 찾고 있었다.

(풋~ 어제 술이 과했군. 막 환각이 생기고…)

고작 소주 몇병에  환각까지 생기는 나 자신이 웃겨 다시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일어났다. 하지만 거실에는 여전히 내가, 아니 나를 닮은 사람이 왔다갔다 하면서 물건을 챙기고 있었다.

(흠~ 어제 술이 가짜 술인가? 아님 술중독인가?)

숙취에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고 앉아있는데 나를 닮은 그 사람이

“뭐해? 얼른 밥 차려. 출근 늦었다! ”라고 소리쳤다.

“뭐야! ”

(헉! 내 목소리!)

입을 벌리자 생소한 녀자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익숙하던 담배남새가 나지 않는다.

얼굴을 감쌌던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고개를 숙여보니 비오는 여름날에 뛰여다니는 두꺼비등마냥 울퉁불퉁 주부습진이 여기저기 나있는 두손, 그리고 전에 없던 봉긋함이 내 시선을 가로막았다.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목이 늘어난 파자마차림에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 콜라겐이 다 빠진 누런 빛갈을 가진 얼굴, 허걱, 수… 수현이다.

혹시 가면이 아닌가 싶어 두 손으로 얼굴을 쓱싹쓱싹 비벼 봤지만 여전히 수현의 모습이다. 충격에 빠져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되여있는데 날 닮은 그 사람은 나의 쪽을 보며 소리쳤다.

“여보! 야, 수현아 뭐해? 밥 안해? ”

어? 분명히 나를 부르는 소리이다.

믿기 싫지만 본능적으로 파자마 바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에 나는 다시한번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는 내가 못마땅한지 레이저를 쏘는 날 닮은 그 사람의 눈빛에 몸이 움직이는 대로 쌀을 씻어 밥가마에 넣고 한쪽으로는 찌개를 끓이고 한쪽으로는 리유식을 만들었다. 국자에 어렴풋이 비춰진 내 모습을 아니, 더운 여름에 분주하게 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옷은 흥건히 젖어 쏘세지 껍질처럼 몸 딱 붙었고 머리도 땀에 푹 젖어 미역처럼 찰싹 이마며 목이며 여기저기 붙어버려 물에 빠진 생쥐 같은 수현이의 모습을 보면서 참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쨍그랑~

“밥하기 싫으면 싫다고 얘기를 하지, 왜 아침부터 애매한 접시랑 행패질이니? ”

“어… 아니, 잠간 생각을 하다가, 근데 자기야, 뭔가 이상한 거…”

“필요없는 얘기 그만하고 빨리 식사 준비나 해.”

후르륵 쩝쩝 식탁에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보며 허벅지를 꼬집았다. 아프다.

국물이 짜다고 잔소리를 하다가 점심쯤에 어머님이 온다는 소리와 함께 날 닮은 그 사람은  떠났다.

떠나가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허벅지를 꼬집었다. 여전히 아프다. 허벅지에는 내가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 차 꼬집은 자국들만이 력사를 기록한 것처럼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수현이의 모습이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가?

어제 부부싸움 끝에  나는 집을 나와 거리를 빈둥빈둥 돌다가 호프집에 들려서 소주를 4병 마시고… 아! 맞다. 호프집! 그래.

나는 아들내미를 안고 바로 그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형님, 내가 어제…”

“어, 수현아.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그게 아니고. 아, 아니 오빠. 그러니깐 어디서부터 말해야 되지? 지금의 내가 내가 아니요. 그러니깐…”

“수현아?  혹시 더위 먹었니? 뭔 소리야?”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수현이 아니고 최도균이요. 형님, 어제 여기서 술 먹고 아침에 일어났더니 내가 수현이 됐소.”

“수현아? 어디 아프니? 아프면 병원 가. 아침부터 헛소리 치지 말고. 나 물건 사러 가야 한다. 그럼 이만.”

“아. 형님, 아, 아니요… 오빠…”

형님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지 신경도 안 쓰고 가게를 나갔다.

밥 달라고 보채는 아들내미를 안고 나는 가게문을 나섰다. 어느새 또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아들내미의 성화에 못이겨 가까운 화장실에 들어가 작은 칸에서 옷을 들고 혹시나 해서 젖을 물려주었다.

아들내미는 옷을 들기 바쁘게 입을 갖다대고 쪽 쪽 빨았다. 나를 꼭 빼닮은 아이를 보면서 이 상황이 어이없기만 하다.

뭐가 무엇인지… 내가 수현이 된 거라면 그럼 날 닮은 그 사람은 누구일가? 수현이인가?


3

“여보~ 닭알이 또 비싸졌지 뭐야. 먹고 살기 힘드네.”

“생활비 더 줄게.”

“아니 그게 아니고, 오늘 행운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너무 귀여운거 있지.”

“어…”

“그리고 말이야, 옆집에 아줌마 있지, 쓰레기를 슬쩍 울 집 앞에  놓자고 한 거 내가…”

“어…”

“여보, 왜  듣기 싫어?”

“어… 아, 아니.”

“누구랑 위챗하는데?”

“아니야. 그냥 보는 거야.”

“그럼 줘봐.”

“니가 뭔데?”

쾅!

가벼운 대화는 또 말싸움으로 번졌고 남편은 또 집을 나갔다.

언제부터인지 가정적이였던 남편은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왔고 가끔은 아침에 새로 입고 나간 셔츠에 내가 모르는 낯선 녀자의 향기를 묻혀서 돌아왔다.

똑딱똑딱.

넓은 집안에는 한살배기 아들애의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바쁘게 움직이는 시계바늘 소리만이 고요한 이 밤을 수를 놓고 있었다.

언제 들어올지… 맥주 한캔을 따서 한모금 마셨다.

씁쓸한 맛이 목을 타고 내 메마른 마음속을 적셔준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가족사진 속에 활짝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은 지금 처량하게 혼자 앉아 깡맥주를 마시는 나를 비웃는 듯 하였다.


4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보고서를 10분 안으로 사무실에 가져와”

“네???”

“회장님께 보고할 보고서를 가져오라고!”

“네.”

전화기를 놓고 고개를 들자 주위에는 분주하게 타자하는 소리와 사람 숨소리만 들렸다.

여긴 어디지?

자연스럽게 넥타이를 슬쩍 풀어주는 나의 손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 내가 목젖이 있지 않았나? 그우로 까칠까칠한 수염자국… 금방이라도 A4용지를 베여버릴 것 같은 턱선…

부랴부랴 서랍에서 자그마한 거울 찾아 들여다 보니 이건 이건 최, 최도균?

“최경리, 자료 안 가져오고 뭐해?”

“네.”

어찌된 일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허둥지둥 pc안에서 자료를 찾아내 프린터해서 회의실로 들어갔다.

우리 팀 팀장이 발표를 끝내자 회의실에는 프로젝터의 드라이버 소리만 윙~ 윙~ 들렸다.

10분… 20분.

다들 숨죽이고 회장님의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데 탁 하는 볼펜이 테이블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회장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A팀이 더 좋은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회장이 자리를 뜨자 얼굴이 브로콜리보다 더 파랗게 된 팀장은 나를 향해 사무실에 따라오라고 한마디 하고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웃음거리를 기대하고 있는 주변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 팀장 사무실로 향했다.

팀장 사무실에 들어서기 바쁘게  김팀장이 뿌리는 A4용지 덩어리에 정통으로 맞았다.

몇십장이나 되는 자료들은 나의 얼굴에 부딛쳐 눈꽃처럼 하늘거리며 한장 한장 천천히 내 눈앞에서 흩어졌다. 그 떨어진 자료들을 김 팀장이 한장한장 짓밟으면서 내 앞으로 한발작씩 걸을 때마다 내 심장을 짓밟고 있는 것처럼 찌릿찌릿 아파왔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도균이가 며칠동안 밤새면서 만들었을 자료들을 한장 한장 주었다. 팀장은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나를 피해 의자에 앉더니 나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발자국이 여기저기 남은 자료들을 꽈악 손으로 쥐여 팀장의 피둥피둥한 얼굴에다 확 던지면서 니가 한번 해봐라 얼마나 잘하나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그 말을 꾸역꾸역 다시 삼키고 팀장 사무실을 나섰다.

팀장사무실쪽을 쳐다 보던 동료들은 내가 나오자 급 조용해졌다. 불과 내 자리까지 거리가 50보 정도였지만 아무리 걷고 걸어도 너무 멀었다. 사무실의 록색식물마저도 나를 비웃는 듯하였다. A팀에 속해있는 후배가 “선배님, 저 늙다리가 좀 변태잖아요. 선배님 화이팅이요! 호호호.”라고 하면서 옆에 동료와 키득키득거렸다. 심장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그 무엇이 천천히 나의 얼굴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치심이였다. 부끄러웠다.


5

동네 열두바퀴를 돌면서 어떻게 된건지 생각해봤지만 실마리가 안 잡혀 고이 잠든 아이를 안고 집에 들어섰더니 어머니 아니, 시어머니가 벌써 와 앉아있었다.

“오, 오셨어요?”

“더운 날에 애를 안고 어디 다니니?”

“저기 잠간…”

“아침 설겆이는 왜 안하고 다니니? 파리를 키우니? 에휴, 말도 말아야지. 우리 아들은 뭘보고 너랑 결혼했는지…”

“바로 할게요.”

“행운아, 어구어구 우리 손자. 우쭈쭈~ 아빠를 닮아 잘생긴 행운이, 아이구 이뻐라.”

“엄마!”

“어?”

“아, 어머님, 어찌된 일로 오셨어요?”

“네가 우리 집 최씨들을 굶길가봐 보러 왔다. 며칠 전에 도균이 전화할 때 목소리 들어보니깐 밥을 제대로 못 얻어 먹었는지 다 죽어가는 목소리더라.”

“도, 도균이가 좀 몸살이 있어서…”

“에미야, 너는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도균이 뼈빠지게 일해서 버는  돈으로 먹고 사는 애가 남편 몸 하나도 제대로 못 챙기니? 에휴, 말을 말아야지.”

“그건, 요즘에 류행성 감기여서…”

“말끝마다 따박따박 받아치니? 됐고. 지난번에 내가 김장김치하라고 한 건 해놨니? 도연이 혼자 사는데 좀 가져다 줘야겠다.”

“예.”

“어디 보자.”

어머니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김치랭장고를 열어서 김치통을 꺼내들고 맛을 봤다.

난 그제서야 전번날에 수현이가 퇴근길에 잠간 마트에 들려서 배추를 좀 옮겨달라고 하는 것을 배추 하나 저절로 못 옮기니 하면서 저녁 회식이 있다고 둘러 댄 기억이 났다.

“어우 짜! 소금장사가 소금을 그냥 주던? 소금에 김치를 절인 게 아니라 김치에 소금을 절였니?”

“어, 어머니 아직 간이 속까지 안배여서 그래요.”

“됐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너는 그러니깐 도균이가 밖에서 돌지. 김치를 포장해라.”

‘낯설다. 이분이 정녕 평소 자상하고 온화하던 나의 어머니인가? 며느리를 이쁘다고 하더니 내가 없을 때 수현이를 이렇게 대하였구나…’

나는 어머니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 쳐다 보았다. 나는 어머니 요구대로 와이프가 새벽 12시까지 만들었을 김치를 플라스틱 김치통에 넣었다.

큼지막한 김치통 두개를 신발장 옆에 놓고 계속 눈치를 주는 어머니를 따라 아이를 등에다 업고 두개의 김치통을 들고 버스 정거장까지 모셔다 드렸다.

무더운 여름이라 사우나에 들어간 것처럼 땀에 푹 젖은 채 집에 들어서니 점심 때가 다 되였다.

밥 달라고 보채는 아이의 울음에 랭장고에 붙여놓은 리유식 레시피대로 브로콜리를 삶고 닭알을 삶아서 까고 당근도 삶아서 썰어 믹서기로 갈아 아이에게 먹이고 나니 2시가 다 되였다.

배에서 꼬르륵 꼬르륵 항의 신호가 나서야 아침부터 먹지 못하고 돌아쳤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남은 브로콜리를 좀 주어먹으면서 빨래를 하고 집청소를 하고 잠간 쉬려고 허리를 펴고 시계를 보니 딱히 한 일은 없지만 벌써 저녁이 다되였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늘에 걸린 저 해를 보며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보니 산지 오래 되였는지 내용물이 밑굽에 깡깡 말라 버린 크림통이 달랑 하나 들어있었다.

전에는 일주일에 립스틱만 두세개씩 사던 수현이였는데… 옷장을 열어보니 온통 내옷과 아이 옷만 걸려 있었다.

수현이의 옷은 옷장 한켠에 달랑 몇개였다.

결혼하기 전에 산 원피스, 몇년 전 생일 때 선물해준 청재킷, 목이 늘어난 티셔츠 몇개…

그 옆에 자그마한 다이어리가 있었다 펼쳐보니 가계부였다. 첫장에 대문짝만 하게 ‘집 대출 20년 남았다’라는 글자가 씌여져있었다.

나는 수현이의 다이어리를 들고 침대머리에 앉았다.

1월: 집 대출 4천. 행운이 분유 천원. 기저귀 800원. 1월 잔여 20원.

2월: 시어머니 생활비 2천… 2월 잔여 50원.

3월… 4월…


6

자료를 다 만들고 잠간 앉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리를 집어뜯고 있는데 팀장이 찾아와 오늘 바이어랑 회식이 있다고 하였다.

술고래라고 회사에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바이어인지라 선뜻 참석하겠다고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저 혹시 안가도 될가요?”

“최경리, 오늘 자료 똥 같게 만든 것을 만회해야지 않겠어? 이번 오더를 따면 실수를 고과에 반영 안할게. 알겠지?”

그놈의 고과, 고과!

급여와 맞먹는 고과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도균이의 약점을 잡고 이러는 김팀장이 미워 알고 있는 모든 육두문자를 속으로 선물해줬다.

평소 얼마나 괴롭혔을가.

불빛마저 야릇한 술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술을 들이부었다.

간단하게 맥주로 목을 적셔주고 양주로 분위기를 끌어올려봤지만 오더의 오자도 입밖에 뻥긋 안하는 바이어의 태도에 팀장은 나를 팔굽으로 툭툭 치면서 계속 눈치를 줬다.

나는 그제야 누구 말처럼 온갖 손자질을 해가며 바이어를 하늘처럼 모셨다.

술이 몇잔 들어가자 앞에 있는 팀장이 둘로 보였다. 셋으로 보이면서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나가는 것을 가까스로 붙잡아 허리춤에 동여매놓았다.

술인지 물인지 그냥 보이는 족족 목을 제끼고 넘기다가 보니 어느새 손에는 계약서가 쥐여 있었다.

집문서라도 받은 듯 계약서를 꼭 쥐고 휘청휘청 거리며 술집을 나오니 밤 12시가 넘었다.

계속 오라고 손짓하는 쓰레기통의 손짓에 가서 껴안고 속심말을 하다가 정이 들어 위장 속 것까지 다 주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쓰윽~ 옷으로 입가를 닦고 고개를 들어보니 드넓은 길바닥에는 가끔 쌩~ 지나가는 차들과 불어대는 바람에 춤을 추는 가로수 뿐이였다.

나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때때로 12시 넘어 집에 들어오고 낯선 녀자의 향기가 나던 도균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헉, 사람살려! 숨이… 숨이 막혀…”

점점 조여 오는 목줄에 허둥지둥하다가 눈을 떠보니 아들내미가 내 목을 가로 타고 앉아 뱀 모형의 젤리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그러는 아들내미를 껴안아  침대에 눕혀놓고 옆에 곤히 잠든 수현이를 껴안았다.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흠칫하더니 수현이도 자연스럽게 품에 안겼다.

“여보, 내가 미안해.”

“아니야, 여보 내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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