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진, 류동 편 □ 현룡운

2020-04-07 11:47:05

신흥동림장을 지나서 동쪽으로 90도로 꺽어 가노라면 흥진이라는 남향받이하고 하얀 회칠들하고 정갈하고 오붓하게 자리잡은 동네가 나온다. 

신흥동을 지난후 검정골을 우쪽에 끼고 지나면 흥진촌 사이에 바로 유명한 선경 대(仙景台)자연 풍경구가 나오는데 내가 1978년 덕화공사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저 그런 돌산 이거니 하였고 별로 사방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런 선경대라고 일컷던 돌뭉터기같이 여기던 산이 어느 사이에 국가급 풍경 명승지의 아릿다운 품위를 지니고 2002 년 에는 중국 국무원에서 비준한 제4 차 국가급 풍경명승지로 승격하여 이름을 날릴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관광 부지는 총 면적이 43 평방킬로미터로 확장되였고 중국 지도책, 중국 명승고적 지도책, 중국 관광교통지도책에도 기재된 국가 관광국이 비준한 3A 급 관광지로 확정되여 몇 해전에 가보니 입장료도 만만치 않게 받고 있어 이거 세상이 변했구나 했다. 여기 까지의 발전에는 내가 잘아는 윤갑송이라는 분의 피타는 노력과 지방정부의 노력도 한몫했을것이다.

내가 흥진에 갔을때 들은 이야기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먼 옛날 덕화의 어느 학교에서 이 선경대에 학생들과 선생들이 원족(远足)을 왔었는데 흰구름이 산 중간을 띠감고 돌고 독수리 한 마리가 산중턱을 빙빙 에돌며 푸른하늘을 산책하는 걸 본 어느 선생이 막걸이와 소수배갈에 취흥을 못이겨 선경대의 절묘한 모습에 순간 취해서 <나두 한 번 하늘 날어보쟈>하고 선경대 꼭대기에서 날어 내렸다는 일화가 있다. 취중흥분과도 비락사였을것이다. 

 이야기 하나는 선경대의 산 통채로가 바위인데 일본이 조선강점시에 두만강 연안의 돌산이라는 돌산은 전부 탐사하였는데 선경대 바위중턱에 그때 바위절벽을 우벼 까낸 지질탐사 동굴이 있다는것이다. 덕화공사 경내에 그런 바위벼랑 동굴들이 많은 것은 일제시기에 아세아에서 가장 큰 로천 철광이 바로 덕화공사 호곡령을 마주하고 있는 조선의 무산 광산(茂山矿山)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변 40, 50키로 내의 크다는 돌산은 전부다 탐사하였 었는데 선경대 돌부처 같은 큰 산벼랑을 몇 달 동안 파내고 탐사해도 철광석 성분은 커녕 아무런 광물질 성분이 없어서 일본지질대장이 돌바위에다 <x 바위>라고 써놓 고는 씩씩 하면서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선경대에서 무산광산까지의 직선 거리는30키로도 안된다. 

해방전에는 덕화지역의 초중학도들은 거의가 두만강 건너 조선의 무산 중학교로 다니였는데 룡연 태생인 나의 아버지도 무산중학교 졸업생이다. 무산철광은 이 지역 두만강 량안의 최대 공업지였다. 일본사람들은 아마 이 지역 돌산을 모두 광석으로 발견하려고 욕심부려 탐사하였을것이다. 

  후날 사람들의 소개서로 보면 아름다운 선경대는 166 만년전 용암에서 분출 되어 형성된 화강암 봉암 바위지형으로 선경대는 아름다운 군봉이 푸르고 졸졸 흐르는 류동하를 코앞에 두고 두만강을 멀치에서 바라보면서 숲속에서 여러 기이한 봉우리 들이 울퉁불퉁 솟아있고 락타봉은 웅장하고 장관인데 하늘자락에 걸터앉은 락타같아 쳐다보는 멋도 있다. 마치 하늘아래서 두만강이나 남평으로 나가는 외길목을 지키는 초병같다. 

   후에 풍경구로 개발한 사람들이 지은 이름으로 10대 봉우리,선인암,선이암, 상비 암,신선궁 등 10 대 바위가 있고 그런 봉우리들과 절벽의 위용은 골연경치로서 는 아주 멋지다. 

 언젠가 우리 중국조선어정보학회 상무부회장인 연변대학 최영일 교수팀이 평소 내가 하도 남평이 어떻구 선경대 어떻구 하여서 연구생들을 데리구 연길에서 차를 대절해 그곳으로 갔다가 나한테 "항의전화"가 왔는데 선경대 풍경구에서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였다. 흥진에는 영업식당도 없고 하면서 투덜대는 걸 "여보게 , 남평으로 가소, 거기가면 식당은 있을것이요"하고 대충 몽니를 부려 버렸는데 후날 들어 보니 화룡시가지에 와서 밥 한끼를 해결했다는가. 

   결국 고향자랑만 실컷해 놓은게 잘못은 없었지만 지금 와서보면 우리 지역의 관광지는 정말 소프트웨어 한 환경이 조금은 문제가 있는것이 사실이 아닌가 생각 한다. 

  금산이요 은산이요 산 자랑만 할게 아니고 관광지라면 고객들이 지갑을 쭉쭉 열고 카드도 뻑뻑, 빨락빨락 현찰도 쫄쫄 나오게 되는 상품들이 개발돼야 한다고 본다.        볼거리,먹거리,즐길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기사 그 동네나 덕화공사의 조선족 마을분들은 장터나 시가지 슈퍼에 가서 현금 흥정해서 주고 팔고하는 선수는 몇이 없는것은 농경시대의 공동체 의식이 너무 짙은 면도 있을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연변에 이민와서 장터에서 특산품같은 물건을 팔고사고 하는 것을 일종의"간상배","장사군"으로 여기고 특히나 두만강 지역 사람들은 더욱히 그런 정서 가 많았다. 내가 화룡에서 소학교를 다닐때만 보아도 전주등 밑에서 해바라기씨를 볶아 파는 사람은 전부가 한족들이였고 조선족이 해바라기씨를 파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 당시는 정치가 제일이고 "자본주의"나 금전원리는 잘 모르는 판이여서 부업 수입이라야 특산품을 국정가격으로 공소사에 수매하는 일이 현금소득이였다. . 

 내가 짧은 소견인지도 몰라도 선경대 풍경구도 외국같으면 흥진촌 촌민들의 재산 이고 흥진촌 관리구역이 되고 그 곳 촌장이 바로 이 민속촌 촌장을 겸하여야 하는 데. . . . . 소유주가 지금은 아마도 바뀐것이 아닌가 싶다. 

평생 그 산을 믿고 살어온 지역 주민들인데. 아니그런지. 

나의50년 절친인 김재현 (화룡 3중에서 은퇴)의 마음씨 좋고 아주 조용한 성격인 매형인 민태원님이 그때 흥진에서 오랜 생산대장으로 일하고 있어 흥진에 가면 재현 이의 누님과 매형은 친 처남이 온 것처럼 화끈하게 대해주어서 그 집은 나의 자연 스런 투숙지로 되였다. 

해마다 공사운동대회때면 이 자그만한 시골 마을에서도 배구팀과 축구팀이 나왔 는데 흥진출신인 최진태씨 형제를 비롯한 배구팀은 정말 탄탄한 팀이였다. 최진태 씨는 군복무후에 덕화에서 공천단사업을 하다가 화룡 어느은행에 전근되였었고 그때 그는 흥진 배구팀 주장이였다. 

그들 형제분들이 네 분이나 군 부대에 복무하고 렬사도 두 분이나 있어 렬군속 가정으로 유명한 집안이였다, 중국땅에 이민와서 중국의 해방사업에 이 시골의 젊은 이들의 피도 중화의 대지에 뿌려진것이다. 

스포츠,즉 체육운동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덕화동네 서너집 아들들로 구성 되여도 현급 운동장에서는 웬간한 배구팀을 이길수 있는 팀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민족은 체육운동은 참 잘한다. 조상들이 조선땅에서 두만강을 건너 올 때 아마 신체소질이 좋은 분들의 자식들을 데리고 왔고 산골연의 산 좋고 물 좋은 탓인지 덕화 사람들은 운동과 문화에 대단한 소질이 있었다. 

30여호 동네라도 축구팀 하나는 멋지게 조직할 수 있는게 덕화의 동네방네였다. 문화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풀고. . . . 

 그곳 흥진대대에서 나하고 남평 고중1기생으로 함께 다닌 친구들이 있는데 최청송 (군부대 복무후 군관으로 전업)이와 지금 일본에서 체류하면서 할머니 노릇 한다는 글도 재미있게 쓰던 최성화씨, 그 외에도 몇이 더 있으련만 기억이 아리숭하다. 류동, 흥진출신들이 삭갈린다. 청송이 형인 최남송이는 나하고 같은 계급장인 민병련장 으로 아주 친하게 보냈고 말이 난바에 당시 덕화공사 무장민변련장들 화명책 (花名 册)찾어 적어 본다. 

 상급 기관은 연변 군분구/현무장부/공사무장부(부장 최중묵, 김승석) 이였고, 공사 소재지인 남평대대 윤태범, (후임 김정종), 길지대대는 김수봉이, 류신대대 주석명, 룡연대대 현룡운, 류동대대 한희권, 흥진대대는 최남송, 차창자는 류아무개(한족)였다. 

 

 나와는 화룡신동소학교 동창이자 남평고중 동창인 윤태범이는 일본에 갔다는 말을 들었고 뽈을 잘 차던 수봉이는 길지대대에서 참군한 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재정 학교를 나온 후 연길시 공상은행에서 과장을 하다가 후에 은퇴한 지금 연길탁구학교 교장 주석명씨와 같은 류신 집체호출신인 윤진 가수(연변 가무단단장 역임)등은 종종 만나기도 한다만 그 외의 덕화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은 본지도 오랜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우리같은 시가지에서 갓 초중을 졸업하고 농촌으로 내려 가서 집체로 살림 을 꾸린것을 집체호(集体户)라고 하였고 신분은 <하향지식청년>이라고 하였지만 태반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랑속에서 문화공부는 별반 못한 <무식청년>들이였지만 싸움질 하나는 곧장 잘하고 말썽도 많이들 일으켰다. 

 그래서 그때 우리같은 하향지식 청년을 가르켜 농촌에가서 빈하중농 재교육을 받는 다고 말하였다. 로동단련, 혹여는 로동개조랄가. 

 본 지방 청년들은 회향청년 (回乡青年)들이라고 불렀다. 하향청년이라면 그래도 미래나 전도로 학교 혹은 부모들을 대신하여 공인으로 갈 길(接班顶替--라고 했 음)이 있었지만 본 지방 회향청년들은 그런 기회가 아주 적었다. 자칫하면 한뉘 농민으로 땅과 씨름해야하는 판. 지금의 유행어로 쇠수저,흙수저인 격.

  지금이야 3농정책이 좋아 농민으로 취직하기 더 힘들지만. . . . 

 1967~1977년전의 중국의 대학입시는 추천제였다. 출신이 좋고 정치활동에 적극 적이고, 더 보태여 말하면 관계망(사회관계)이 좋아야 추천을 받어 대학이나 군대, 공장에 추천 받어간다. 

 뿔난 송아지처럼 생산대,대대나 공사간부들과 티격태격하거나 일단 어떤 <사고>를 치른자는 영낙없이 추천은 포기를 해야했다. 

 고등학교 고시(高考)제도는 1977년부터 등소평 어른이 나섰을 때에야 회복되였다. 그러니까1967년~1976년 사이의 대학생들은 공농병 학원이라고 불렀다.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에서 나온 산물이다. 

 말이 좀 빗나갔다만 민병련장은 한개 대대의 청년군사조직의 총괄 책임자이고 그 아래로는 생산소대마다 민병패가 있었다. 민병조직은 련, 패, 반이 있고 호칭은 련장, 패장, 반장으로 화명책에 올리는데 그 명부가 현, 시 무장부를 통하여 연변군분구 까지 올라간다. 또 무장기간민병, 보통민병으로 나뉘여 있기도 했지만 실은 한 그릇 의 그 나물에 그 나물이였다. 

민병패장급이상이라야 공사무장부의 집중군사훈련에 일년에 한 두번씩 참가하여 강훈련을 받는다. 

언제 한번 그 때,그 시절의 민병패장들과 공청단지부서기급 이상 청년간부들 모임 을 조직해 보았으면 재미있을 것이다. 지금쯤 모두가 60대중반, 70대 중반 일 텐데. . . . . . 

 그때 수많은 공정들은 다 이런 민병련대들을 동원하였기에 전쟁 때 사용하던 <병퇀 작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였다. 

 차창자 병퇀작전이 마무리되고 다시 류동하 작전에 돌입하였는데 실은 류동하 제방 에 돌담쌓는 고된 토석방 작업이였다. 피끓는 청춘으로 밤자고 나면 힘이 솟구치는 청년들이 위대한 정치적구호와 팽창된 계급투쟁의 긴장속에 개개인들의 거창한 미래 정치적 출세전도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몸을 던지는 것이였다. 

 일을 잘해야 선진이 되고, 선진분자로서 되여서 지역 빈하중농들과 생산대대 간부 들이 적어도 공사간부님들 귀등에 누구 누구하고 이름석자를 쟁쟁하게 울려야 가물에 씨나듯, 아니 덕화의 하늘에 일년에 한 두번 간혹 떨어지는 한 줄기 별찌를 손바닥에 받을 듯한 농촌 졸업기회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눈보라치는 동지달 맹추위속에 눈 밭에서 지독한 교관들의 훈련을 받아 내면서 뒹굴 고, 쨍쨍 내리쬐이는 삼복더위에도 "차렷. 쉬엿"하면 쇠소리나게 훈련 받던것도 어제 같은데. 

 류동촌은 덕화공사에서 남평다음으로 큰 동네라고 하였다. 우리 같은 집체호와 하방 간부가족 식량배급은 남평과 길지촌 외의 지역은 류동에 가서 배급타야 했고 공량미 도 류동 량곡창고에 징구량으로 받쳐야 했다. 

 류동과 류신촌을 통털어 버들골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흥진부터 류신까지의 골안에 버들이 하도 많았던 모양이다. 

  류동촌 뒤쪽 동평골안에 청림부업을 하러 갔을 때 우리가 들었던 주인집 할아버지 네 집에 가정기물 전부가 버들로 만든 함지,사발,밥상이였다. 버들목기 식기시대에서 오염없이 뼁끼 칠 하나없이 순수자연과 접촉인 셈. 심지어 울바자마저 실버들 가지를 멋지게 겯어서 쳐 놓은게 참으로 인상적이였다. 


 흥진촌에서 선경대를 뒤로하고 곧추 동쪽으로 나가는데는 길도 한 가닥이요, 강물 한곬인데 동평골의 골물이 류동에서 합류하여 다시 함께 류신2대까지 졸랑졸랑 흐르 는데 이 류동하가 평소에는 점잖게 버들골 자갈밭을 유유히, 고즈넉히 흐르는 청정수 같은데 산홍수나 큰 비가 내리면 일단 20리 버들골을 남, 북으로 마음대로 유린하 면서 이리 훑어내고 저리 사품쳐 내고 하면서 닥쳐들어 원래 비좁은 골연에 토층이 별로 두껍지도 않아 농토류실이 심하였고 <류동물이 불었다>하면 류신2대에서 룡연 촌으로 가는 다리가 뭉텅 잘려 나가거나 침교된다. 

 하여 이 류동하 범람을 잡는다고1975년인가 류동하 제방돌담 쌓기 대병퇀 작전공 정에 우리 덕화공사의 몇 백명 의 민병들이 류동촌을 휩쓸어 들어 갔었는데 나는 또 우리 룡연대대 청년남녀 민병 120여 명을 데리고 류동과 류신 4대인 추전평(秋田 坪)이란 마을에 진을 치고 (역시 남의 동네인데)전 공사의 몇 백명 민병 들과 협동 작전에 돌입하게 되였다. 

 그 때의 전국적인 슬로건은 <농업에서는 대채를 따라배우자, 农业学大寨>(대채란 산서성의 석양현 한 뻑박골이였다)였다. 그곳의 제전(梯田 다락밭)을 만들어 농경지를 확보한 경험을 그대루 다 전국에 보급하니 내가 하향해 있던 덕화 촌골안에도 대채전 바람이 불어와 아주 교조적인 제전과 조전(条田)바람이 불어와서 수 십년간 다져진 펀펀한 옥토를 갈아 퍼내 흙담쌓고 상처투성이 연변 제전을 만들기 농토개량전투에 또 우리같은 물불 모르고 명령만 듣는 청년들을 땅뚜지는 일에 동원하는 것이였다. 

 하기사 그 시골 대채농촌대대 당지부서기가 나라의 국무원 농업 부총리자리까지 올라가서 대채촌의 사고를 가지고 10억도 넘는 중국농업의 장기판을 쥐락펴락 하였 으니 정치라는게 무섭긴 무서웠다. 

 그 바람에 우리 또래들은 곡괭이나 혹은 곽지질이나 삽질, 돌쌓기, 가래삽질, 목도를 메는 일, 남포질, 돌까기(채석), 도로공사, 수로공사 같은 일은 몇 해 동안이나 하였 기에 지금 말하면 단단한 만능계절 력공이였다. 

 우사간의 소 똥무지나 돼지굴분변치기 같은 일, 언동삼에 동네 변소의 인분을 끄는 일도, 산골짜기에 가서 부식토를 끌어 오는 일도 지금 같은 시절의 젊은이들을 한 번 씩은 체험삼어 시켜 보면 어떨가하고 생각하여본다. 

 그때 류동촌의 민병련장인 한희권씨네 집에 신세를 단단히 졌다. 희권씨의 어머님 은 우리같은 한창 팔팔 날아 다니고 주는대로 다 먹는 아들친구들을 정말로 잘 대해 주어 잊지 못할 추억들도 많다. 땔나무도 해오기 힘든 세월이였는데 웃방에서 잠자는 우리가 추워할세라 장밤을 장작군불을 때주고 가끔씩 바람 문단속을 해주시는 어머님 이시였다. 시골에는 손님들이 투숙하면 장작가리가 팍팍 축나기 마련이다. 손님을 집안 친척처럼 대하는 인품에서 보이는 장작가리 축나는 풍경이였다. 

 그때 그 시절에는 시골민간집에 투숙하는 것도 아주 자연스레 의무적으로 척척 시달되였고 인품들이 특별한 시기였다. 지금처럼 집세니, 물값이니 밥값이니 하는 따위 술어가 없었다. 

 교통이 끊겨 먼길 가다다도 길손들이 아무집이나 "계십둥"하고 하루이틀 투숙하고 밥 몇끼 얻어 먹구다니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였다. 멀리 타지역에 가서도 아무개네 동네, 아무개 친구라고 하면 모두 서로 반기면서 최대한 편의를 제공해주는 것이 아마도 딱 그때 그 시절까지만 존재한 미풍량속이 아니였는가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하숙하는 집을 주인집이라고 하였는데 남평에서 고중을 다닐때2년과 그외 덕화공사내 몇 해 출장은 거의 민박이였는데 땡전 한푼 없이 민병련장이라고 동계와 하계마다 탄알도 장탄하지 않은 권총도 아닌 자동보총을 늘 무겁게 메구서 전 공사와 화룡현내를 무장민병훈련 호출을 받어 억지로, 거의 강제적인 훈련을 받으러 다녔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때의 덕화나 남평 사람들에게 정말로 고맙다. 그런 민페를 끼친 주인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일히 헤아릴 수없다. 지금은 아파트에 이웃 사촌 이나 동네 친구들이 우루루 쳐들어와 민박 하자구 하면 어떤 촌극이 생길가?길 손들이 마이는 우물의 물마저 돈 받구 생수랍시고 팔수있는 세월에.

지금 만약 20대 젊은 청년남녀들을 시골의 집체하숙하는 집에 3, 4년씩 단련하라 고 내 보낸다면 결과가 어떨가?

덕화류동과 류신의 고중 동창들 집 신세도 당연히 많이들 진게 사실이다. 촌 동네 마다 려관이나 려인숙이라는게 없으니 부득히 지역 연고자를 찾아 신세를 지는 세월 이였는데 그 중에는 동창이라는 신분이 가장 허물없이 부대끼는 사이였다.

버들골 출신들로는 류동의 류학남(연길시신흥소학교 총무주임으로 은퇴),김성 (화룡 시위조직부 간부처처장으로 은퇴),김창석,최충국,엄옥선,리련춘씨등이 기억나는데 일부 친구동창들은 서로 만나 본지도 오라다.펄펄 날뛰던 동창들이요,꾀꼴새 같고 버들 개지같이 순수했던 친구들인데 세월의 세파 속에서 주름살을 끼고 손주녀석들의 시발 을 하느라 국내외 각지에서 열심히 노력들 할 것이다. 원래 생활력들이 강한 두만 강과 버들골의 사나이요, 녀자들이니까.

<학창에서 공부하고 농촌에 돌아와 부지런이 일하여 첫 수확을 거두었네>노래를 늘 부르면서 우리 친구들은 류동골안에서, 나는 룡연골안에서 하늘같이 높아 보이던  남평의 정부 단층사무실에 같이 나들이하고 회의나 운동회,문예경연대회 같은 행사때 무리지어 들락날락하면서 함께 민병, 공청 단사업을 할 때가 20대 피끓는 청춘이 였는데 벌써 선경대 꼭대 기에서 바라보는 서산의 석양신세가 되였다.

 붉으므레 무르익은 실버(흰머리)들의 참된 인생의 궤적은 버들골이 기억은 해줄 것인지 모르겠다. 버들골이 몰라주면 선경대 락타바위라도 기억해서 버들골의 출세한 아들딸들이라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또 언제 한 번 그곳에 모이면 좋겟다.하늘을 누구처럼 날아 볼 생각은 말고 두만강을 에돌아 추억의 발자욱을 한 번 찍어 보는 것도 좋고.그때 가서 <버들골아 청춘을 돌려다오,남평아 내 청춘을 돌려주라>하고 웨쳐볼가.  



2020/04/07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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