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체호 시절-현룡운

2020-05-24 09:28:51

(1)송강과 공자를 타도하자고 하던 때 일

70년대는 정치운동도 많았다. 림표, 공자비판운동, 수호전 평가 운동, 소근장 따라 배우기운동, 등소평 비판하고 우경 번안풍을 배격 한다는 운동 등등 해마다 무슨 정치 운동이 많기도 하였다.

나하고 한 학교에서 근무하던 유명한 아동문학작가이며 시인이였던 허봉남선생*이 일화가 있다. 길지의 허씨 3형제라고 하면 연변의 문단에 드믄 문학인 형제 분들이였다. 전에 소개한바가 있어 허씨 3형제분에 대한 소상한 소개는 생략한다.

(제 4기 연변작가협회상 최우수상 수상작, 허봉남: 1945년 3월 13일 조선함경북도 무산군 출생. 연변대학 졸업, 교원, 기자, 편집 력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우화시집 《불에 타죽은 여우(1982년)》, 아동장편소설 《엄마찾는 아이(1996년)》 등 발표. 연변작가협회 1등상, 리영식아동문학상, 등 다수 수상)

허봉남 선생은 길지에서 룡연학교로 전근하여 오셨는데 허봉남선생의 집과 우리 집체호는 앞뒤집으로 있으면서 같은 학교에서 근무한지라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되였다.

허봉남선생이 어문교원이자 작가여서 대대당지부에서 학교측과 상의하고 <수호전> 을 평론하는 운동때문에 저녘이면 6개 생산소대를 륜번으로 돌아가면서 수호전의 이야기를 해야 했다.

850여년전의 량산박의 농민기의군 두령을 현대 정치판에 세워놓은 셈.

허봉남 선생은 사람이 푸접이 좋고 항상 아동 우화작품 구상에 잠겼다가도 불쑥 불쑥 교무실내에서 던지는 화두는 우릴 포복절도하게 하였다.

하루는 전날 저녘 밤에 웃동네 어느 생산대에 <수호전 력사 풀이>를 하고 온 허선생이 우릴 보구 하는 말이다.

"어제 저녘에 저 웃동네 갔었는데 내가 수호전 옛말을 어디 까지 하고 나니 회의에서 어떤 할머니가 송강(1073년 —112 4년)녀석을 타도하자고 난리법석이였소".

어문선생이자 작가님이 <수호전 평론해설>차 동네 생산대 회의실에서 송강이 어쩌구, 저저꾸 하였는데 력사이야기를 현대 판 문화혁명 타도대상으로 어느 성급한 할멈이 착각하고 "분노"에 차서 웨친 발언이 "그 놈의 송강이란 자 때문에 낮에 힘든 모내기를 하고 허리 펼새두 없이 저녘마다 수호전, 송강 비판을 하니 자연히 괘씸 하여 넉두리한 것이다. “송강놈을, 송강이란 반동파를”… 하면서 씩씩.

 

그때 세월에 심지어 죽은지 2400여년이나 되는 거룩한 공자님(기원 전551― 479년)마저 현대판 림표장군과 함께 묶이여 전국적인 비판 대상이였는데 그 운동을 “批林批孔” 운동이라고 하여 력사연구나 사회륜리 도덕분야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했다.

공자님이 "자기를 억제하고 례에 맞게 행동하라(克己复礼)" 자기 자신을 이기고 례에 따르는 삶이 곧 인" 이라는 한것이 문제다.

克己复礼 kè jǐ fù lǐ를 한자의 발음으로 “커지뿌리”라고 읽는데 저녘마다 꼭 참가해야 하는 성토대회나 비판 대회에 참가하기 딱 질색이 우리 집체호의 어느 녀석이 "또 커지뿌리, <거짓 부리>회의에 가야 하지"라고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빌미로 되여 엄청난 곤혹까지 겪었다. 엄숙한 정치활동을 <거짓부리>라고 했으니 말이다.

송강놈을 타도하자, 거짓부리 회의가 지루하기도 했던 시기였다.

남자들이 피워대는 담배연기가 자욱한 생산대 우사칸의 회의 실에서는 정치대장이나 청년단 서기들이 일장 설화를 기나긴 실타래처럼 늘여가면서 촌민들을 설득하고 동원하고 혼기(婚期)가 다가오는 젊은 처녀들의 손에서는 코바느질 뜨깨감이 야간 회의시의 작업감이다. 그때 그런 손뜨개를 결혼, 약혼 설계도라고도 했다.

2천년전 력사의 거룩한 공자님이나 몽고사막에 추락된 현대판 림표장군이나 수호전의 <송강동지>에 대한 비판의 목소 리에 동네 로인네들은 그저 무감각한 표정으로 덤덤히 듣기도하고 어떤분들은 잠에 골아떨어져 코골이도 하고 젊은 녀석들은 담배 쌈지나 라이타를 돌려가면서 돌개 담배를 피워대군 하고 간혹가다 무대랑이나 반금련, 무송이 호랑이를 때려 잡는 옛말 대목은 흥미를 가지고 듣군 하던 세월이였다. 좀 유식하다는 로인들은 "공자님이 좋은 량반이라던데...... "중얼 중얼 하던 때가 45년전이다.

 

(2)시골 간부들

70년대에는 현급 4급간부, 3급 간부제도가 있었다. 현급간부, 공사급 간부, 대대간부, 생산소대 간부를 통털어 4개급 간부라고 하였고 그 중에 소대간부들이 참 복잡하였다.

생산대에는 정치대장(당소조장 겸하기도 함), 업무대장, 부녀 대장, 돼지를 키우는 양돈장을 관리하는 양돈(豚)대장, 부대장(副队长),소조장 혹은 분대장, 청년들을 책임진 민병패장, 공청단서기, 회계, 기공원, 빈하중농 협회장, 치보주임, 거기에 집체호 호장도 간부 줄에 들었다.

공사(지금의 향진)간부를 가르켜 우리는 걸어 다니는 간부라 하였는데 실은 향, 진급 간부라야 자전거 한 대없이 도보 행차 하는 걸어 다니는 간부였지만 그 뒤짐을 지고 다니는게 그렇게 도 부러웠다. 적어도 허리는 굽이지 않지 않는가.

대대간부나 생산소대 간부는 말이 간부였지 역시 전간에서 신발에 흙을 붙이고 호미자루는 쥐고 다녀야 했다.

탈리 간부라는게 있었는데 혹시 계절 따라서 밭일에 안나가고 관리만 하는 간부을 탈리간부라고 불렀고 그들에게 주는 공수를 탈리 공수라고 하였다. (工資인 셈).

농촌 간부는 종신제가 아니여서 해마다 선출직이였다. 한번 대장직을 하고 나면 노상 대장, 대장이라고 불러서 농촌에는 대장도 많았다. 마치 지금의 한국에 사장님이 많은 것처럼.

대무위원회라는 간부조직을 기층간부 조직인데 어떤 때는 간부도 아닌 엉뚱한 소 사양원도 그런 회의에 참가해서 웃지도 울지도 못할때가 있었다. 소사양원이 몇 십마 리 소들의 일 안배와 이튿날 소 사료 분배때문에 부득히 참가해서 대무위원회 회의 를 들어야 하니깐.

생산력으로 평가한다면 몇 십 마리 황소를 총괄하는 소 사양 원이 당연히 간부가 아니겠나 지금도 생각한다.

집체호 호장도 십여명의 끌끌 하고 츨츨한 청춘남녀들의 지휘자 이니 당연 직 간부 였다. 단,이런직의 사람들은 언감 자기의 리력서에 소사양원, 간부라고 밝힐수는 못하였다.

대대간부라 치면 우리같은 지식청년들은 정말 잘 뵈여야할 간부였다. 그런 분들의 말 한마디가 내 청춘의 리상정도를 결정하였으니 말이다.

해마다 내려오는 공인모집, 군입대, 대학, 전문학교추천, 같은 하늘에 별따기 같은 출로는 거의가 대대간부들이 공사 간부들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1977년도 전의 중국농촌에서 대학과 중둥 전문학교 추천된 촌민학생들의 운명도 거의가 공사나, 대대간부들의 추천에서 결정되던 시대, 그게 10년동안이나 지속되였다.

대대간부들이 "그늠아, 아는 틀렸소" 하면 그건 끝이였다. 농촌에서 일을 잘하고 말을 잘들어야 했다. "일이 쌍놈"이라고.

그런 대대 간부나 소대간부들이 호도거리를 하면서 말짱 일반 농군으로 "하향"된게 벌써 거의 40년이다.

그래도 그때 간부들이 소박했고 진심이였다. 나는 지금도 그때 생산대장들이 존경 스럽다. 맨발로 수전, 한전이고 산골이 고 어디고 나들이하면서 동네 사원들을 데리고 잘 살아봅시다고 하면서 밤낮없이 땅과 싸우던 그때의 농촌간부들이 그립다.

 

(3)이게 룡연 겨울 수박이요

“된다”는 말은 우리지역에서는 친척간이 된다는 말이다. 두만강 류역은 교통이 불편하다보니 거의 집성촌 수준인 집거 생활이 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동네가 거의가 다 “된다”. 두 사람이나 두 집만 건너도 사돈에 팔촌 사이이다.

말이난 김에 언어에 대하여 잠간 언급한다면 함경북도6진 방언에 대하여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론문들도 많이 발표하였는데 유감스러게도 6진에 속하지 않는 두만강 상류의 방언 어원에 대한 조사연구 론문은 몇 편이 없다.

6진방언이란 조선의 회령(會寧)·종성(鐘城)· 온성(穩城)·경원 (慶源)·경흥(慶興)에서 쓰이는 방언인데 함북인들이 이 지역을 가리켜 ‘륙읍(六邑)’ 또는 ‘륙진(또는 륙진)’이라 하기 때문에 ‘륙진방언(六鎭方言)’ 또는 ‘륙읍 방언’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륙진’이라는 말은 조선조 세종이 이 곳을 개척하고 여섯 진(鎭)을 설치한 데서 유래한다. 이 륙진 지역 중에서 경흥의 남쪽에 위치한 부령(富寧)은 륙진 방언권에서 제외된다.

그런 연고로 두만강 상류지역의 방언은 6진방언과도 조금 차이가 있다.

예전에 우리의 조상 님들의 화룡쪽 진출이민은 조선의 무산을 이주중심으로 청진과 길주, 명천일대 이주민이 많은데 그 지역 방언이 두만강 상류에는 많다. 6진이외의 방언들이 많이들 중국 에 류입 되였었는데 지금은 소실 되여 가고 있다.

언어의 사용환경과 방언에 대한 음조연구나 서술어에 대한 연구는 좀 있기는 하지만 이민시기의 형태소의 분석이나 언어 사용 실태에 대한 연구분석이 아쉽게도 몇 편이 없다.

화룡의 남평진 지역의 청년남녀들 사이의 사랑 속삭임을 "좋아한다"고 하고 부부 사이에 "사랑해요"하는 말을 대단히 하기 어려워하고 만일 70년대 누가 그런 말투로 "사랑 해요" 하고 하트모양을 표시한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나도 지금까지 결혼 생활 40년이 되도록 "여보, 사랑해요"하는 마누라의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다. 물론 나두 그런 표현은 어쩧지 못한다.요즘 많이 쓰는 “님”자도 그때 시기에는 형~. 선생~.할아버~. 아버~. 어머~이외에는 그 어떠한 직급간부 어른이라도 “님”자는 부치지 않었었다.

요즘처럼 시집을 온 새 색시가 남편을 보구 “오빠”라고 불렀 다가는 본가집에 쫓겨 가야 하는 판일 것이고 남편이 새 색시 보구 “야,자치기”—<존대말이 아닌 동료 사이에 격을 낮추어 하는 말>를 했다간 할범들의 곰방대에 뒤통수 얻어 맞을 일이 였다.

엄격한 존대, 평대, 하대 표준이 있던 두만강만 알아들을 수 있는 화법이 였다. 지금도 그 지역을 가기 전에는 온밤 혀바닥 을 돌려가면서 그젠날 그 지역 사투리를 입안에 몇 번 휘휘 돌려봐야 한다.

결혼식도 <잔치, 혹은 큰잔치>라고했다. 잔치를 했다는 결혼을 했다는 말이고.

농경시대여서 사람의 류동이 지극히 불편한지라 골안이나 골연 에서 처녀총각들의 혼사는 아주 재미있다. 동네의 반경이 30리 내지 50리정도면 장거리 혼사였다. 연고자들이 덕화 골안에서 거의 대상을 골라 결혼까지 골인하기에 덕화공사 두만강일대는 친인척 관계가 100리를 넘은 집이 아주 적다.

혹여 타지방에서 이주하여온 가정 집은 물론 다른 상황이지만.

우리 동네 누구네가 결혼잔치나 로인들의 회갑 잔치, 애들 돐잔치라면 온 동네가 자동 휴일이다. 거의가 친인척이기에.

우리 집체호의 남자들은 동네 경조사때 묘지파기나 떡치기에 동원하기 가장 좋은 집단일군들이여서 시골 경조사때 떡치기가 힘들어서 그렇게 싫었다.

그런 연고로 남자들은 힘들게 떡을 치고서는 반갑게 먹지도 못한다. 두부앗이에는 녀자분들의 로력이 많이 소모되는 탓에 녀자분들은 두부추렴을 할라 치면 그렇게 질색해 하였다.

결혼 잔치전에는 <혼사 말떼기>란 절차에 따라 누구와 누구사이에 말이 있다, 말을 뗐다고 하고, 사돈인사 후에는 우리지역 말로서는 <작은 잔치>라는 대외홍보 및 초청 연회를 차려야 했었다. 그<작은 잔치>날에는 또 동네 청년남녀들이 모여서 가정오락 같은 모임을 꼭 해야 하고 야밤에 닭둬마리 튀해 술안주로 먹고서야 약혼자들을 “해방”시켜주었다.

잔치 날이면 최고의 교통 공구가 소 수레 혹은 경운기였는데 (손잡이 뜨락또르라고 했음)색시는 거기에 혼수를 싣고 꽃 너울 쓰고 파마를 하고 오는데.

새 색시를 모시고 오는 신부 측에서는 신랑 측에 뭔가 단단히 벼르고 오기가 일수 였다. 신랑 측에서는 그런 신부 측 상빈 혹은 상객(우리 지역 방언에서는 생빈이라 했음)접대 전략을 잘 짜야 시골잔치가 무난하게 마무리 된다.

잔치손님들은 새 색시 측 생빈(상객)들을 부추 켜서 신랑집에 이것 저것 요구하고 감내 놔, 배내 놔 하면서 별라 별 지청구를 다하는게 그때 세시풍속이였다.

그런 사돈과 상빈 지청구 방어전이 아주 주요한데 때론 무리한 요구을 감당못해 실랑이도 벌어지고 취한 취객과 혼사집 측사이에서 접대문제로 가끔 분쟁까지 있었 지만 하루이틀 지난뒤엔 옛말 거리로 밭고랑이나 논밭에서 웃음보를 터지게 하는 세월이였다.

어느 한 번는 내 친구의 결혼잔치에 온 신부측 대표—생빈 (상객)들이 신부의 어린 막내 남동생이라고 데리고 왔는데 누군 가 꼬드겨서 한 겨울에 우리 룡연 촌에서 보지도 못한 수박을 내노라고 <생떼>를 쓰는게 참 난감했는데 우리 집체호의 이미 신랑한테서 잔치전에 벌써 <상객생떼 전담팀>요원으로 선정 되여 미리 몇 번이나 코밑 치성(致誠)으로 얻어먹은 녀석이 “알았다, 기다려 보슈”하고 가더니 신랑집의 식장 (食欌)에서 수박 도안 이 그려 있는 미닫이 문짝을 덜렁 들고 와서 거룩하신 새색시 오라버니들 접대용 술상에 올려놓으면서“이게 룡연 수박입니더,여름에 옵소.”해서 숱한 웃음거리를 낳았다.

먹을 수박을 내라고 생떼를 썼었는데 식장 유리판 그림 수박 을 대접한 그 녀석이 후 날 시정부 모 기관 국장까지 했다.

그때 시골집들 식장(食欌)이라야 대충 수박이나 구경조차 못한 바나나 같은 그림 들을 그려서 인테리어(interior)하였었다.

잔치날 저녘이면 신랑과 신부는 거의 파김치되여야 했다. 오락회를 신랑집에서 조직하는데 지금 말로 하면MC, 우리 그때는 “주석”이라고 불렀다. 주석을 잘 모셔야 저녘 놀이가 잘 조직되엿다.

잔치날 오락 모임을 “논다, 오늘 저녘 잘 놀아 야지” 하고 표현 하였는데 지금TV의 오락 프로그램은 울고 갈 지경이였다. 남녀로소들을 잘 아우르면서 누구나 다 기쁘게 노래하고 춤추고 장끼를 피우는 잔치였다.

자정이 되면 무조건 신랑집의 불쌍한 닭 두어 마리 정도는 부엌에서 튀 당해서 가마솥에 들어가야 했다.

이게 시골 잔치의 대략적인 풍경이였다. 시집 온 새색시는 생산대의 새로운 녀자로동력이였다. 어떤 집은 앞집, 뒤집이 사돈일 때도 있었다.

 

(4)비우제 (祈雨祭) 풍파

룡연이라는 마을은 3개의 자연툰으로 형성되였는데 두만강 웃동네를 상연(上), 중간동네를 아래동네(下), 맨 아래동네를 남전동(楠田洞)이라고 불렀다. 남전동에서 뒤골이라고 바라고 작박령(作板岭) 방향으로 두만강을 조금만 따라 내려가다보면 조선의 지초리(地草里)라는 마을이 나온다.

두만강이 산비탈의 치고 굽이도는 지초리 마을 맞은편에 비우제 산이 있다. 두만강이 S자형으로 흐르면서 중국측의 룡연과 조선측의 지초리에 농경지를 형성해 준 것인데 비우제 산이 바로 두만강이S자로 에도는 중간에 있는 가파로운 절벽 산봉우리에 있다.

비우제혹은 기우제라고 하는데 나라마다 해석이 약간은 달라서 일부에서는, <미신적관념에서, 심한 가물 때문에 농사에 크게 해가 미치게 될 때 비가 오게 하여 달라고 비는 제사>라고 해석 하였고 일부에서는<가뭄이 계속되어 농작물의 파종이나 성장에 해가 있을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의(祭儀)이며, 가뭄이 계속되면 농작물의 파종이나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므로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는데, 이를 ‘물제’라고도 하고 기우제에 돼지, 소, 양 따위를 희생하여 신에게 바치는 의례가 전승된다.>고 해석하였다.

어느 해인가 벼 모내기를 끝냈을 초여름 정도인데 저녘에 생산대대 회의에 참석차 대대사무실에 나갔는데 회의 끝에 우리 같은 젊은 하향지식청년 간부들은 먼저 집으로 가라고 하면서 몇몇 로농어른들과 대대간부들만 남아서 무슨 토론을 한다고 한다.

의아해서 로농들의 무슨 비상 대책회의를 하는 모양인 것 같은 데 그래도 당연히 우리 젊은이들도 알고 지내야 "혁명을 틀어 쥐고 생산을 촉진하지 않겠는가"하면서 그날은 그저 그러고 지났다.

몇 십년만의 왕가뭄이 온 것이였다. 벼농사의 생명수로 류신 촌에서 십 여리나 인수로 공정을 하여 끌어오던 류신골 안의 골물이 말라서 바닥을 들어내고 두만강도 엄청 줄어 들었다.

담배 밭,조이 밭 같은 한전은 갈라 터지기 직전이였다. 대대 간부들과 생산소대 간부 들의 얼굴에는 근심기가 어려있고 매일 아침 일과로 뒤골안과 작박령쪽을 쳐다보며 비소식을 기다리는 것이였다. 룡연촌은 뒤골과 작박령쪽에서 검은구름(비구름)이 흘러 오면 무조건 비온는 날이다.

이튿날 아침에 대대사무실에 무기(총) 관리체계 검사로 내려 오는 공사무장부 간부의 시찰 마중 나갔는데 대대의 주임이 이상하게 안절부절 못하는게 이상하였다.

농촌농사의 흉풍(凶--흉년과 풍작이라는 말)을 가리는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다. 농군의 작용도 중요는 하지만 하늘의 천도(天道, 天理)를 인간이 좌우지 하기는 아직도 한창 멀었다.

농군한테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벼농사를 하면서 배웠다. 한 해농사를 좌지 우지(左之右之)하는 것도 물이였다.

땅이 말라가니 농군들의 가슴도 타고있고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3부락의 동네 어르신들이 슬슬 생산대대 간부들을 찾어서 대책을 제기하였는데 그 중에 비우제 산에 가서 물제(水祭)를 지내야 한다는 것이였다.

룡연의 개척전설에 의하면 어느 옛날에 역시 심한 가뭄으로 인해 애간장을 태우던 두만강 량안의 촌민들이 합의해서 비우제 산에가서 기우제를 재냈는데 지초리의 어느 술주정뱅이가 제물을 얻어먹고 내려오다가 신성시(神)하는 비우제 산 제단에 대고 오줌을 쌌는데 그날 오후부터 억수로 내린 징벌 적인 폭우가 련속 3, 4일간이나 내려 지초리 동네의 한전을 싹 밀어 자갈밭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전설이 있었다.

룡왕님께서 비를 안주니 제사을 엄숙히 지내야 된다는 민속적 전통이 남아있는 지역이다.

농사지 대본(農者之大本)이라 소가 제일 생산력이였던 때에 힘은 소와 같은 역축에 의거하는게 근간이 되는 것이고 눈물겨 운 두만강을 건너 벼농사를 하느라 십리물길을 개척하였지만 왕가물 징조가 오면 속만 타는 시대, 전기 양수기(물뻠쁘)도 변변치 않은 세월이였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두만강 류역은 모내기를 하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많이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일수록 기우제는 많을 수 밖에 없었 고, 그것은 조선반도 에서 이전 되여 온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 되어 왔다.

그러한 비에 대한 관심은 단군신화의 환웅이 풍백(風伯)· 우사 (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 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각각 시조묘· 명산 대천 등에 기우제를 올렸던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이민하여 두만강을 박차고 벼종자를 가지고 온 농군들에게는 비가 곧 물이고 돈이 였다, 비가 쌀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눈, 비, 구름, 바람도 다 농사와 관계 있아오니 비료와 같이 돈 주고 사서 마음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자연의 혜택이 였다.

미신이 아닌 농경시대 전통 민속, 민풍를 전승해서 가지고 온게 분명하였지만 정작 시행하자니 우리같은 토박이 아닌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였다.

엄혹한 정치태풍속에서 미신적인 관념으로 대대간부나 특히 당, 단간부들이 이런 행위를 하였다고 하면 가차없이 <미신활동 참여죄>로 문책 또는 심지어 처벌까지 가능한 세월. 또 알고 서도 말리지 않았거나 동조했다 해도 문제였다. 맨 날 <투쟁 이요>, <혁명 이요>, <정치돌출>, <계급 립장이요>할 때니까.

문제는 그날 예정된 공사간부의 현지지도 시찰 행차를 내가 안내하고 접대해야 하는 데는 그 분한테 만약 이 일이 알려지면 <룡영 대대서 간부들이 미신 활동이> 어쩌구 저쩌구다. 이런 행사는 시골동네라 역시 특급 뉴스로 와전될 가능성이 충분한데, 이 고장에 태줄을 묻고 자라온 답답한 대대주임과 서기는 안절부절 못한다.

하여간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나대로 이 거룩한 행사-- 하늘이여, 비를 주십사 하고 룡왕님께 제사를 지내는 활동을 보지도, 참여도 안할 수 있고 측면에서 협조할수 있는 대안을 찾게 되였다.

2일 후에 전체 마을 대대 무장민병들의 일년에 한 번씩 있는 실탄사격 집중훈련 조직하는 안이 있었다.

전 련대(连队)의 6개 패(排)의 청년들은 모두가 기간 민병이거나 무장 민병 이였다. 거기다가 실컷 사격훈련을 하고 서는 일년에 한 번씩 실탄을 한 사람이 5발을 쏠수 있는 기회 이다.그때 내가 련장이 였으니 시골 “국방 장관”인 격.

맨 날 일제 3. 8식 보총이나 나무목총을 메구서 미제와 싸울 준비를 한다고 아침 마다 훈련하고는 일년에 한 번씩은 하루 생산을 중지하고 실탄사격훈련을 한다면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다. 우수 사격수를 뽑기도 하는 날.

마을 전체 청춘남녀가 모두 모이는 희희락락하면서 수다를 떨고"전투놀이"하는 날이기도 하구 산보놀이 같은 날이자 실탄 사격 소리를 듣는 날이기도 하다..

당연히 지식청년들과 당지청년 250여명을 전부 몰아 뒤산인 평산대 산꼭대 사격장에 집중시키고  공사에서 시찰 내려온 간부 도 동참시켜 온 하루 사격훈련을 한답시고 모시고 가기로 하였다.

결국 청춘들은 실탄사격장에 아침부터 렬을 지어 오르고 룡왕님께 제를 지내려는 근면하면서도 가물에 가슴이 타던 로농--두만강의 강변 벼농사 개척자--어르신들은 반대방향이 비우제 산으로 소수레에 제물을 감추어 싣고 앞뒤 눈치를 보아가면서 행차.

이상하리만큼 정말 이틀만에 작박령으로부터 검은 구름이 뭉쳐오더니 3,4일간 장대 비가 억수로 내려 벽돌장처럼 땡 땡 마른 밭을 푸욱 적셔주어 어르신들은 그렇게도 좋아하지 않겠 는가. 왕가물에 단비라 할가.

비가 억수로 내리는 3, 4일간은 우리는 집체호에서 <입쌀 밴새>놀이하고 윷놀이하면서 실컷 놀았다. 단비가 무료로 내린 동네에서 지루한 생산대의 정치회의도 없었다.

부녀회, 청년회, 로년층별로 <되놀이>하면서 왕가물에 단비 기쁨을 만끽하면서 어쩌다 모두 허리를 3, 4일간 펴게 되였고 부역에 지친 소들도 며칠은 한가롭게 되였다.

정치가 잘돼서 비가 온 것도 아니요, 제사를 잘 지낸 덕인지도 지금까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그 년대에 룡왕님께 제물 바치는 행사는 끝까지 비밀로 지켜졌다. 누구하나 미신놀이 말썽을 들은 사람 없이.

그후 날 가끔 3부락 농민대장급 간부층을 만나면 말은 없이 엄지손을 쳐들고 나를 치하해주는데 어깨가 으쓱했다.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빌 때면 아마 자연도 그 경우를 알어서 처신하는지.

이것도 지금은 없어진 행사일것이다. 인공강우도 하는 때이니깐.

 

 

                   2020/05/22

 


                        연길에서 초고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