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체호 시절 2-현룡운

2020-05-30 08:44:37

(1)표가 귀하디 귀한 때.

오늘은 당시의 "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련다.

70년대초에도 계획경제체계에서 상품이 생산자에서 직접 소비자와 거래 안되였을 뿐만 아니라 먹고, 쓰고, 입고, 마이고하는 제품에서부터 사용하는 모든 제품은 《표 制度》 <凭票 供应> 제도였다.

중국이라는 큰 나라의 생산공급이 시장 수요를 절대 만족시키지 못하는 시기였고 생필품과 농업품,부산품,특산품의 가공수준이 현저히 떨어져있는 시대였다.<균형분배>라는 명목에서 나온것이 <표>에 따라 공급한다는 체계였다.

총적으로 중공업발전과 경공업, 농업발전이 균형이 안잡힌 시대였다.

식량은 량표제도, 옷을 해입는 천은 부표에 따라 공급하는 제도 (布票제도), 기름 표, 비누 표, 콩제품 표, 술 표, 사탕가루 표 등등 모든것이 표 제도 여서 정말로 상품들이 귀할 때였다. 돼지고기, 소고기, 수산물도 전부 <표>제 였다,

자전거, 재봉침, 손시계에서부터 성냥갑마저 표제를 할 때였으니. 그저 일상 경공업품들인 잉크,세수소래, 만년필, 공책,신발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표제로 구매가능하였다.

식당에 가도 돈만 있고 량표가 없으면 밥을 사먹을 수 없고,량표도 전국 량표와 지방 량표두가지가 있었다.길림성을 벗어나서 출장 가려면 전국 량표를 -–누가,무슨 일로 어디로 출장가야 합니다.-- 하는 소개신을 들이밀고 서야 량식공급소에서 전국류통가능 량권을 떼주는 시기였다.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 결혼 대상자가있으면 친척들은 일년어치의 천표 를 "기부"해야했다. 첫 날 이불은 갖추어야 하니깐.나라에서 배급주는 천표 로 이불을 갖출 수가 없었다.

시골마을에서 어르신들이 생일이나 회갑잔치 때면 동네잔치로 여러 손님들을 초청하는데 아침 전이면 여러지 꼬마 손주들이 할아버지 술병을 미리 잔치집에 전달하러 옹기종기 분주히 오간다.

손님으로 경조사에 가시는 분들은 자기가 마실 술을 두냥, 석냥 혹자는 한 병 정도까지 각자 지참 해야했다. 그렇게 송달된 술병들은 주인집 식장 앞에 일렬로 줄세워 놓고는 손님들이 오면 차례로 술군들한테 넘어 간다. 술병에 내용 물도 다소 차이가 났지만 그냥 거서 거기였다..

물론 술도 표제를 하다보니 주인집에서 연회참석차 온 동네 "주객"들의 주량을 전혀 만족 못시키는 세월이였다.

심지어 자기의 지참술이 없이 참석하게 되는 사정이 딱한 분은 가까운 친구한테서 눈금을 재여 먼저 빌기도 한다.

그래서 당시 병원에서 사용하고 내놓은 500미리 리터 눈금이 있는 술병 이 가장 인기였다. 마인 술도 눈금으로  가늠하여 마이던 세월.

혹간 천렵이나 야외식사때 돌개 술을 마이는데 도시락 뚜껑이 술잔 대용으로 씌여 거기에다 술을 따른 후 빙둘러 앉은 식사판에서 년장자 부터 돌아가면서 좀씩 입을 댔다 뗐다 하는데 도시락 뚜껑은 평면이고 마일때 기울리면 그 표시가 너무 뚜렸하기에 체면에 잘 축이 않나 지만 불투명한 도자기고뿌를 공동 돌림잔으로 사용하면 한 순배 돌기전에 굽이 나버린다.

간혹 생산대나 대대에 귀한 손님이 오셨을때면 접대할 술이 없어서 맴돌이치다가도 동네 과부 할머님 집에 가서 통사정하면 한,두병이 나온다.

할머니들이 겨울철 나무를 해주는 나무군이나 장작을 패주는 일군들을 접대할 술을 미리미리 표로 사두어 궤짝에 정히 보관해 놓을 것을 <다음에 공소사에 술이 오면 책임지고 돌려줍니다>하고는 후무리듯 빌려온다.

집체호는 녀자얘들이 돌아가면서 화식당번을 하였는데 채를 볶는 기름이 노상 모자라서 고민이였다. 먹어야 할 입들이 다 달라서 투정 부리는 것은 일상이였다.

그런 <투정쟁이>들의 입을 막으려고 륜번으로 화식담당을 하는 제도를 실시였는데 기름을 서로 많이 쓰다 보니 맨 나중에 화식당번차례 녀자애는 빈 기름병만 쳐다 보아야했다.

하는수 없이 기름병에 눈금을 그리고 당번마다의 사용적정량을 표시해 놓았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해마다 내려오는 후배 녀석들 중에는 꼭 한 두명 투정쟁이가 있는 법.기름을 더 달라고,

나중에는 아예 회의를 열고 "화식당번" 제도가 아닌 "화식모 종신제"를 도입하였다. 일년 내내 한 녀자애는 집체호의 화식만하는것이다 .

중장기 "화식모"가 되여 지위가 올라가니 해주는 대루 먹어야 할 판을 만든 것이다.

그"회식모"는 대가정의 가정주부인 셈였다. 우리는 이 제도를 민주적으로 만들었고 원활하게 실행하였기에 집체호 생활의 리듬을 화식하는 녀자애가 총괄하는 것이였다.

“오늘은 시래기국이다”하면 그대루 받아먹어야하고,”오늘은 떡이다”하면 그대루 넙적 받어 먹어야 했다. 투정버렸다가는 국 사발이나 밥 사발이 모양이 달라진다.

참으로 마음씨도 곱고 작식도 잘 하던 그 화식모 처녀가 시집가는 날 우리 모두 섭섭해하였다.

물론 그 시절 멋대루 축하는 잘해 주었지만 평시에 애두 먹이고 투정 질도 하던 어떤 후배 녀석들은 시집가는 누이를 보내듯이 눈물까지 보이 면서 바래였다.

한 룡마루 아래에서 몇 년을 한 솥밥을 먹으면서 서로 지내온 경력과 가정 교육배경, 출신 지역과 성격이 다른 청년남녀들이 생활을 하다보면 별라별일이 다 있었다.

한 두명씩 도시로, 공장으로, 군대로, 학교로 뽑히여 갈 때마다 우리는 꼭 환송회라는것을 조직하였는데 떠나가는 녀석들은 <출세>해서 가면서 기뻐 하면서도 서운해 하고 남은 녀석들은 나름대로 부러워 하면서 축하해주고, 태격태격하던 일,뿔나기 시작하는 송아지들처럼 서로 들이박고 내박고 하던 일들은 환송회 날 저녘이면 싹 사그러진다.반주도 없는 노래와 춤속 에서.

그러다가도 다시 시내에 와서 만나면 서로 와와하면서 식당 치기하고 술 한 잔 나눈다.

40년이 지나 거의 반세기가 되여도 그 때의 한 가정집처럼 지내온 집체호 형제자매들은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여러가지로 사정으로 서로가 사방에 흩어가고 직업들도 다양해 지기도 하고 모두 가정을 이룬후 지금이야 늙은이로 되였지만 룡연 골안의 물맛 탓인지 그때 그정은 잊지 못한다. 일부는 벌써 제 세상의 집체호 사람이 되였다.심히 가슴아픈 일이다.

전후(战后)1세대로 50년대에 태여나 60년대 3년 자연 재해에 바루 먹지도 못하고 자란 우리,6,70년대 10년 격동 시기에 청춘을 농촌 건설에 바치면 뼈를 굳혀왔고 계획경제시대에서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시장 경제 시대를 살아오면서 겪은 풍상고초야 이루 말할수 없다..

우리 이 년배 들은 유선방송 하나만 달랑 듣던 시대에서 5세대 통신시대 로 진입한 세대, 한창 공부할 기회에 땅을 뚜진 청춘들이요, 시대를 잘못 만난 청춘들이다. <표에 따라 공급>받던 시기의 어려운 생활환경에서 청춘 을 지내온 우리 세대는 진짜 시대의 불운아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늙은게 분하기도 하지만 다행이도 이런 글을 쓸수 있는 세월이 와서, 마음껏 세상놀이 할수있는 세상이 와서, 세계를 일주할 수 있는 세월 이 와서 위안을 느낀다.

 

(2)  잃어진 손목 시계

집체호는 사람이 많다 보니 사건 사고도 많았다.6년동안 집체호 생활의 일부 일상을 돌이켜 본다.

열 몇이나 되는 집체호는 아침 세수시간 때부터 법석인다. 우리 집체호 앞으로 논도랑이 흘렀는데 남자애들은 여름이면 거기에 나가서 아침 세수를 하군했다.

그런데 하루는 D라는 녀석이 벼 논밭 제초기 밀기 작업을 나갔다 불시에 허겁지겁 집체호로 달려온 걸 밥짓던 녀자애가 무슨일이냐 하고 물으니 말도 없이 논두렁에 가보던 녀석이 고양이 락태상이 돼서 돌아왔기에 다시 물으니 그 해 봄에 금방 사서 찬 손목 시계를 어디에 둔것 인지 없단다.

그때는 보통 수전 일을 할라 치면 시계를 벗어서 혁디에 차는게 습관이 였다. 혹시 혁대에 찬게 떨어진게 아니냐 하였는데 자기가 혁대를 찬 바지 를 입지 않고 벼 논밭일이여서 운동복 차림인지라 그건 아니였단다.

그때 시절에 손목시계는 귀한 재물인데. 논밭에는 떨군것이 아닌지…

그날, 저녘이 되니 집체호 내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없어진 손목 시계가 "잃어먹었다,도둑맞혔다,없어졌다"로 와전되였다.

그 녀석은 건망증이 있는지는 몰라도 가끔 논두렁에 빨래돌로 쓰이는 큰 돌우에 세수하고는 두고 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였다.

집체호내에 도둑이 있다면 이건 큰 "사건"이였다.도둑놈과 한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가.

그때 당시에 정말로 시계를 절도했다면 그건 큰 사건이였다. 집체호내의 절도행위와 청춘남녀간의 애정행각는 절대 금물인 시대였다.

몇 일 지나도 시계는 나타나지 않었다. 잃어버린 녀석은 거의 얼빠진 상태.

집체호내의 열 명도 넘는 활발한 청춘들의 밥먹는 시간 때에도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저녘이면 가끔 노래가락을 넘기던 녀자애들도 입을 꾹.

근데 난 C 녀석이 우울해하는게 이상해서 조용히 찾어 물었다."야 임마, 너 요즘 무슨일이 있잖는가”하고. 그러면서 마을 뒤산에 있는 렬사기념비쪽의 인가가 없는데 데리고 가서 조용히 따져 물었더니 이 자식 이 쿨쩍쿨쩍 거리면서 하는 말이다.

"D라는 녀석시계를 내가 치워 두웠어, 그 친구가 하두 자주 논두렁에 놓구 집에 들어오군해서 한 번 혼내주려구 말이야,그런데 시계를 도둑 맞혔다고 하니 내가 내 놓은면 도둑놈이 되잖소, 도둑놈이 되면 나는뭐요, 어찌 오....".

"그래 시계는 지금 어디에 치웠나?"

"내가 내 궤짝에 치웠다가 논두렁 빨래 돌 밑에...."

"알었다, 너와 내가 이 일은 무덤까지 가지구 가야해... 알았지...?"

이튿날 저녘 생산대 정치대장, 업무대장도 참가한 집체호 생활회의에서 시계 사건을 정치화하지 말자고 하면서 회의에서 우선 시계임자인<D>라는 녀석을 조져댔다.

"너 잘 생각해 봐, 우리 집체호에는 시계를 찬 사람이 많구, 도둑질 할 사람은 없는데 말이야","외부사람도 왔다 간게 없구 말이야".

그 녀석은 그대로 "세수할 때까지는 있었다고"역설하기에 "그럼 혹시 논두렁에 빠뜨린 것은 아니냐"하고 유도하면서 밤중까지의 회의에서 다시 “우리 그럼 래일아침 다시 논두렁에서 찾어 보자”하고서는 이른 아침 무릎 위까지 물이차서 흐르는 논두렁 빨래터 아래 위를 남자들이 대여섯이 일렬로 서서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결국 빨래 돌 밑의 반쭘 물에 잠긴 풀숲에서 "찾어"냈다.

"와"하고 함성이 터졌고 시계임자는 아침전에 탈탈거리며 공소합작사에 달려가 외상으로 비싼 돼지고기 통조림과 과자 사탕을 사오고 말었다. <수고사례비>명목으로 뒤풀이하고 집체호 내의 기분은 완전 평시의 상태 로 전환.

적어도 집체호내에는 도둑은 없다는 증거을 공동으로 립증한 것.

실은<C >녀석이 데면데면한 친구의 소행을 혼내 주려고 꼼치운게 "도둑"으로 몰릴 소행이 있어서 그 시계를 내가 받아서 <도로 논두렁>에 조치 하고 찾는 모양을 취한 해프닝(happening).

귀하디 귀한 시계에 한자(汉字)로 <전강방수全钢防水> 써있기에 <진짜 방수실험>을 하였는데 실은 시계 유리쪽에는 증기가 끼여 있었다만 다른 면에서는 무고한 친구의 루명을 미리 벗겨준 셈이다.

그때 해프닝은 지금까지도 시계 임자는 모르고있다, 후날에 내몽고 어디 로 갔다는데 또 시계나 핸드폰을 잃어버린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버릇 이 오래 간다고 하기에.

<꼼치웠다>와 <도둑맞혔다>,<잃어버렸다> 와 <없어졌다>가 다른 의미 를 가진다.

                   

(3)남포사건

농촌에 가서 처음 배운일은 토양 개량 작업, 산벼랑 돌캐기 작업, 비료 무지 끄기작업, 두만강 제방쌓기 작업들이였다.

겨울에 이러한 작업을 할라치면 부득히 폭약으로 폭파하는 남포작업을 해야한다. 폭파약도 자체로 제조하는 세월.

초산안모니움(硝酸铵Ammonium nitrate)이란 화학비료에 벼겨나 토밥을 섞어 고온에 닦고 랭각하면 폭발약이 된다. 그런 폭발약으로 동지섣달에도 석자이상 깊이로 얼어붙은 동토을 폭파하여 두만강 제방을 쌓고 20,30 메터 산 벼랑을 안전장치도 없이 맨 바줄 타고 매달려 남포를 재워 터지 우고는 돌을 까냈다.

어느해 초봄인데 두만강변의 채석장에서 생긴일이다.

채석장에서 돌까지 일을 하고 따스한 양지볕에서 점심 쉼을 하던 중 어느 당지 청년이하는 말에 귀가 솔깃한 우리 철모르기 집체호 지식청년 들이다.

“지금말이야 저 두만강에 야리(두만가에서 서식하는 물고기 일종)가 갈이한다(물고기가 강바닥에 몸을 비벼 대면서 알을 슬다.)"하기에" 갈이가 무슨말이요"

"곡우에 야리무리들이 이 채석장 여들에서 무리지어 갈이를 하는데 남포 한 방이면 숱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어"

두만강 지역 농촌에 금방 내려간 우리가 두만강 변경 지역정책과 법을 잘 모를 때였다.지방청년들은 알고 있었지만 우릴 꼬신 것이였다 변경 지역에서 두만 강수역에서 남포발포는 엄금인데.

하여간 점점 구미를 돋구고 나중에는 강역에 나가서 여기 어떻구 저기 어떻구 하면서 <두만강 야리고기>설을 설파하기에 담이 돋은 우리네들 햇내기들은 우리가 터치우겠다고 나섰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남포약에 뢰관을 재워 넣고 터지면 물기둥이 높이 올라 갈가봐 가마니 (초대)를 물에 적신후 남포심지에 불을 달고 련달아 4발 이나 두만강 여들목에 던졌다.

쿵~쿵하고 물기둥이 올리솟더니 불과 몇 초후에 팔뚝만큼 큰 야리 고기들이 힌 배살을 뒤집어 보이더니 몇 십마리가 둥둥 뜨는것이였다. 초봄에 차디찬 두만강물에 야기고기 주으러 뛰여 들어 몇 마리씩 줏고는 버들방천에 나와서는 사타구니 잡고 덜덜 떨었다.

변경의 법도 모르는 집체호 지식청년들의 무모한 물남포 신세에 숱한 물고기를 잡었다.야리고기들의 알 쓸러(산란) 올라 온 걸 돌을 캐라는 남포 약으로 무단폭파해서 몰살한 셈이다.

물고기를 나누어 가지고 집체호에 거들먹거리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온 우리는 그날 저녘 처음으로 <두만강 야생 야리고기 파티> 를 하였다.한술 더떠서 생산대장,정치대장 분들도 청해 모시고.

이틀후, 덕화공사 변방부대 왕련장과 공사파출소 리소장님이 권총차고 찾었왔다. 조선측에서 "항의"가 들어온 것이였다. 내려오면서 류신 대대에 알어보니 룡연대대 채석장 작업터가 의심된다고 (적발) 고자질 한 것이 였다. 원래 남포질로 물고기 잡이전투 현장을 목격한 류신친구들한테 고기 몇 마리쯤은 좀 나누어 주며 입을 막아야 하는데.....

조사 내용은< 두만강 남포발포 선두주자가 누구,남포심지에 불은 단 놈은 누구, 물에 던진 놈은 누구,물고기를 먹은 놈은 몇 놈.....>

방법이 없이 우리가 전부 했다고 하였다,기왕 농촌까지 지식청년으로 내려 왔는데 간대루사 감옥까지 보냈갰슈 하면서.

그래도 이틀 동안 꼼짝 못하고 우리 네 명의 철모르기 지식청년들은 권총을 차고 내려온 파출소장과 변방부대 왕련장한테서 단단히 훈계를 받고 <다시는, 다시사>하고 결심서, 회과서,사유서를 조선어, 한어로 쓴후 손도장을 박고서 바쳐서야 <기소처분>은 면제 받은 셈이였다.

당시에 그 어떠한 처분만 받으면 그건 일생이 전도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조사를 내려온 두 사람이 집체호에서 잠자 면서 밥을 먹다보니 친해져서 남평으로 갈때는 꼼치워둔 야리고기로 매운 탕을 끓여 드리면서 거듭 사과하였더니 하시는 말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야, 이 도깨비 새끼들아 고기잡이하려면 남포질은 하지말고 줄 낚시나 통발로 해라, 두만강에 무단 남포발포면 3,4년 판결이야...너들 오늘 이 물고기는 뭐로 잡은 고기냐."

"예에,줄 낚시로...."

"그래 앞으로 일 잘하고 절대 남포 질은 하지말라 자칫하면 사고친다, 알았제..."

먼 후날 내가 입당하고 민병련장으로 “승진”한후 남평에 회의를 가면 가끔 리소장님은 자기 집으로 나를 끌고 가군하였다. 알고보니 나의 아버지하고 아주 잘 아는 사이여서 행위를 정말로 조심하게 되였다.

이것도 45년전 일이다. 그때의 일들을 회억하노라면 그렇게도 간고하고 어려웠지만 고생중에 락도 있었고 세상 철모르기들이 철이 시간에 감에 따라 들고 성숙되였다는 생각이 든다.

철모르는 우리를 인간수업을 해준 농촌 생활이 그래서 나름대로 고급 지식분자로 된 지금에 와서도 가끔은 그리울 때도 있고 정도 많고 마음씨 도 고운 순진한 농촌 아주머니들, 생산대 로농들이 그립다. 쓸쓸해진 지금 농촌이 안쓰럽기만 하구.


(2020-05-30 연길에서)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互联网新闻信息服务许可证编号:22120180019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