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아’와 ‘메타포’□ 신연희
책지기를 만나다

2020-06-03 09:14:58

‘어떻게 해야 마음을 한곳에 잡아둘 수 있단 말인가? 애당초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가? 나는 몸속을 순서 대로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내 마음은 대체 어디에 있지? 마음은 기억 속에 있어. 이미지를 먹으며 살아가는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의 한 구절이다.

‘이데아’와 ‘메타포’, 하루키는 이데아와 메타포에 대해 종종 이야기한다. 이 소설 전반에 걸쳐 이데아는 어떤 힌트를 던져준다. 그리고 주인공은 메타포의 통로를 거치면서 힘든 시간들을 견뎌낸다. 집중해서 자신에게 결부된 일련의 사건들을 살펴보고 결단을 내리는 과정을 갖게 된다. 이데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은유의 세상이 어떤 역할인지 알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7년 만에 선보인 본격 장편소설이다. ‘이것이 하루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요소가 전부 담겨있다는 평을 들으며 일본 출간 당시 130만부 제작 발행으로 화제가 되였던 작품이다. 저자가 지금까지 구축해온 작품세계를 다양하게 변주하며 현세대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내면 깊은 곳까지 내려가 농축한 결과물이다.

마지막에 한번은 정리해주겠지라는 기대를 품으며 줄기차게 읽어갔지만 남은 책의 두께가 점차 얇아질수록 이 작가는 그러지 않을 거란 불안이 커져갔다. 결국 작가의 말조차도 없이 소설이 끝나버리며 ‘이 정리되지 않는 찜찜함이 하루키의 의도일가? 작가의 힌트를, 이데아와 메타포라는 인물까지 등장시키면서 독자에게 준 힌트를 내가 잡지 못한 걸가?’라는 생각에 다른 이들의 리뷰를 수십개 찾아보기도 했다.

그래도 혼란스러움을 정리는 해야겠다. 나 대로의 해석을 말이다.

1부는 ‘현현하는 이데아’이다. 나에게는 높은 허들이였다. 소설에선 기사단장의 모습을 드러냈고 그래서 현현하는 이데이다. 이 단어의 뜻을 리해하지 않으면 이 소설을 진행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이데아를 정의하는 바가 다를 것이고, 일련의 현상들을 해석하는 것도 달라진다. 명백한 작가의 의도다. 도깨비와 같은 환상의 존재로 설정하면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분명해져버린다. 《1Q84》에서는 그 경계를 알 수 있었다. 들어가고 빠져나가고,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 존재를 이데아로 설정함으로써 독자들은 그 경계가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 없게 되고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였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고 말이다.

수많은 떡밥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이 많은 떡밥들은 결국 수면 우로 올라오지 않아 기대를 품고 소설을 읽어갔던 사람들의 속을 답답하게 만든다. 많은 독자들이 이에 대해 성토하면서 저마다의 개연성을 찾는 데 열을 올리는 걸 보았다. 하지만 어쩔 텐가, 그게 하루키 스타일인데 말이다. 여타 소설과는 달리 인과관계나 개연성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과 더 닮아있기도 하다.

“우리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되는 일도 많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더욱 말이다.”

하루키가 소설을 빌어 했던 말처럼 말이다.

소설 속 ‘멘시키’는 내가 이 소설에 더욱 몰입하게 했던 캐릭터이다. 부와 명예와 기품마저 다 가진 50대 남자, 개츠비의 유명한 팬이였던 하루키는 실제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멘시키라는 인물은 개츠비의 오마주’라고 밝히기도 했다. 내 머리속에 그린 멘시키는 좀 더 강인한 인상과 검게 그을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다. 완벽한 성격을 가지고 완벽한 삶처럼 보이는 그지만 스스로의 궤변을 정당화하며 베일에 가린 진실을 맹신하기로 결심한다. 주인공과 성격과 외모, 행동까지 대척점에 있다.

이 책만의 특색이라면 어쩐지 하루키가 겸손해지고 완숙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랄가? 이건 론리로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나만의 느낌이다. 어쩌면 소설 속의 ‘나’가 이전의 인물들보다 겸손해지고 완숙해진 것 같아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것도 론리로 설명이 안된다. 그냥 느낌이다.

메타포의 출현은 거의 필연이였다. 그림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메타포 뿐만 아니라 숨겨진 메타포도 존재한다. 창작자의 몫인 메타포의 은닉은 텍스트의 예술성과 련관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이중 메타포’이자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이다. 하루키는 이 존재를 ‘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인간 내면에 도사린 부정적인 힘으로 그려낸다. 죽음, 파괴, 어두움, 사악함을 련상시키는 이 힘은 갑작스럽게 불쑥 나타나기에 더욱 위험하다. 이 힘은 때론 거대한 조직으로 존재해 아다마 도모히코를 침묵 속에 빠뜨린 빈의 나치로, 도모히코의 동생을 자살에 이르게 한 남경대학살의 형태로 비극을 만들어낸다.

‘나’는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충격으로 도피했던 문제와 직면한다. 안해를 통해 녀동생의 죽음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던 ‘나’는 기사단장을 찔러 죽이듯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이제 새롭게 태여난다. 페소공포증을 극복하며 동시에 죽은 녀동생으로부터 해방된다. 안해 유즈는 나가 이제 자신을 녀동생 고미가 아닌 유즈로 바라보는 것을 알아채고 그와 다시 결합했음을 확신한다.

이 책은 일련의 단어들을 강조하듯 단어 우에 방점을 찍어 놓았다. ‘무언가’라는 단어는 매번 강조점을 찍으며 라렬된다. 삶이 순환되며 영속하듯 ‘무언가’는 마치 다 정해져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말하는 창작품에 매료되고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무언가를 기를 쓰고 만들어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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