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던 새들도 둥지에 들어가 새끼들과 함께 잠이 들고 반짝이던 별들도 구름 뒤에 숨어 한숨을 쉬고 있는 고요한 밤이 되면 나는 기어코 고향에서 혼자 생활을 하시겠다는 아버지는 지금쯤 머하고 계시는지 궁금해 진다.
60이 넘으신 아버지가 한국에서 막로동을 하시다가 몸이 편찮아서 중국에 들어오시자 나는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있으면 챙겨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나하고 언니가 밥벌이를 하고 있는 도시에 오라고 설득했지만 소고집인 아버지는 십여호밖에 남지 않은 고향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의 무뚝뚝한 성격을 그대로 닮았는지 나는 한달 혹은 두어달에 어쩌다 한번씩 혼자 살고 계시는 아버지한테 전화를 해서 문안을 드린다.
어쩌다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반가운지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그 감정을 읽어낼 수가 있다.
“련화야?”
“련실임다.”
“오, 너네 둘이 목소리 똑같아야.”
“뭔 소리임까., 내가 련화보다 훨씬 어린데… 밥은 잡쉈슴까?”
“응, 먹었지.”
“뭐 드셨씀까?”
“뭐 먹겠니, 밥에다 김치에다 그냥 먹었지.”
간만에 드린 전화지만 간단한 문안이 오간 후 아버지와 나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틀어놓으신 텔레비죤소리가 간간이 아버지의 숨소리에 섞여 귀에 들려왔다. 무엇이든 더 대화를 이끌어 내고 싶었지만 꿀먹은 벙어리처럼 전화기를 들고 멍하니 있다가 회의를 핑게로 급급히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통화시간을 들여다보니 20초였다. 최근 통화일자는 두달 전이였다. 몸은 괜찮으신지, 밥은 잘 드시고 다니시는지, 동네 사람들은 어떻는지 수많은 궁금증이 나의 뇌리를 돌고 돌았지만 정작 전화를 걸면 다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려 대화의 련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 버리기가 일쑤였다.
낮에 통화했던 기억을 다듬어 무뚝뚝한 나 자신을 자책하면서 핸드폰을 들어 사진첩을 들여다 보았다.
사진들을 번지다가 내가 결혼식을 올릴 때 아버지와 함께 찍은 한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백색의 튜브톱 웨딩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있는 나의 모습, 반듯한 회색톤의 정장을 받쳐입고 중절모자를 머리에 슬쩍 올려놓으신 아버지의 모습, 세월의 흔적이 아버지의 얼굴에 고스란히 남겨져있지만 이 순간 만큼은 제일 멋있고 빛이 나는 남자였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날 아버지한테 례식장을 함께 걸어야 된다고 전해 드렸더니 아버지는 호텔의 전등불이 반사되여 더욱더 반짝이는 이마를 슬쩍 만지시더니 멋적게 웃으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는 반짝이는 아버지의 이마를 보고 캐리어에서 모자를 꺼내 아버지의 손에 쥐여 드리면서 모자를 써도 되니깐 꼭 함께 례식장을 걸어가자고 말씀 드렸다.
결혼식을 올리는 날, 례식장에서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아버지는 나지막한 소리로 떨리신다고 하셨다. 언니가 결혼할 때도 못해봤다고 하시면서 나의 손을 꼭 잡으셨다. 아버지의 약간의 떨림이 나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였다.
길지 않은 거리였지만 아버지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의 시선 속에서 한걸음 한걸음 함께 앞으로 걸었다.
아버지는 브레이크 고장난 차처럼 방향없이 뛰놀던 내가 어느덧 의젓한 어른이 되여 이렇게 결혼을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그땐 째진 가난에 반항을 하다가 현실에 타협을 하면서 어머니께서 한국으로 돈벌이하러 떠난 후 집에는 나와 아버지만 남게 되였다. 어머니가 있을 때 손에 물 한방울을 묻혀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는 어머니 역할까지 하느라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지으셨다. 그래도 학교 다니는 딸을 굶겨서 학교 보낼 수는 없다며 서툰 솜씨로 설 익은 흰쌀밥과 시꺼멓게 타들어 무슨 반찬인지 알 수가 없는 음식을 차려놓고 나를 깨우셨다.
무뚝뚝하게 얼른 밥을 먹으라고 한마디 던지시며 뒤로 슬쩍 빼는 아버지의 손을 보니 한평생 집안일에 손도 못 대보셨던 아버지의 손에 기름이 튀여 여기저기 물집이 올라온 듯하였다. 그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올라와 나는 고개를 떨구고 꾸역꾸역 설익은 밥을 입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아버지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다행이라는 눈빛이였다.
그 눈빛 밑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아버지의 불살을 바라보니 아버지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음식을 하시는 아버지가 미울 때도 있었다. 일주일 내내 사골국물에다 밥을 말고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먹다 보니 내 자신도 퍼런 오이가 될 것 같았다. 더 이상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숟가락을 내팽겨쳤다가 다시 주어들어 밥을 먹던 내가 기억이 나셨는지 제대로 된 음식을 해주지 못해서 애가 누렇게 메주처럼 못생겨져 남자친구라도 찾을 수가 있을가 걱정이 됐다고 했다.
어른이 된 후 친구들이랑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온 동네를 다 휩쓸고 돌아다니면서 새벽까지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들어와 방귀 뀐 놈이 큰소리친다고 자기의 잘못을 덮고자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보살핌이 없이 커서 애가 혹시나 술주정뱅이가 되지 않을가, 나쁜 길로 들어서지 않을가 하고 걱정이 많았는데 내가 어느덧 이렇게 커서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도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주르륵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딸이 시집을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 눈물 속에는 이 딸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양복을 받쳐입은 아버지의 팔을 좀 더 힘을 주어 껴안자 앙상한 뼈만 남아서인지 나의 팔이 배겨왔다. 귀가에 반짝이는 은빛과 어느새 농촌의 밭고랑과도 같은 구불구불한 주름이 아버지의 얼굴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니 어릴 때 집안에 기둥과 같았고 동네 제일 높은 산과도 같았던 아버지는 어느새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된 예순을 훌쩍 넘긴 할아버지가 다 되였다.
가끔은 바지 지퍼를 올리는 것도 깜빡하고 저가락질을 하는 손도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처럼 파르르 떨기도 했다. 결혼식을 마치자 아버지는 바로 또 짐을 싸들고 고향에 내려갔다.
집에 혼자 계시면서 혹시나 아프기라도 하면 옆에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전화를 할 때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왔으면 한다고 계속 말하였지만 번번이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다.
우리가 직접 모시러 가겠다고 하면 크게 화를 내며 농촌 구석이 더럽고 힘든데 절대 오지 말라고 하신다. 타향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는 두 딸한테 기대도 되겠건만 아버지는 우리한테 조금이라도 페가 될가봐 아픈 몸을 끌고 혼자의 생활을 고집하고 있다. 행여나 딸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을가 언제 한번 홀로 사는 게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으신다. 그토록 좋아하시는 커피가 떨어져도 먼저 전화와서 요구한 적이 없다.
언니가 전화를 해서 커피가 떨어졌는지 물어보면 그제서야 다 드셨다고 실토하신다. 필요한 것도 하나하나 물어봐야 얘기해주시군 한다.
간간이 송금을 해드릴 때마다 농촌에서 돈 쓸 데가 없다고 하시면서 보내지 말라고 하신다. 딸들의 효도라고 생각하고 받으라고 하면 알았다고 하시더니 매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올 때면 우리가 송금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물들을 사들고 오셨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은 못해도 묵묵히 초불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한테 다 주신다.
어릴 때 일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아버지를 껴안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만약 한마리의 작은 새라고 하면 아버지는 푸르디 푸른 하늘인가 싶다. 높고 높은 하늘의 존재를 하늘을 날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하늘이 있어 자유로이 날 수가 있다.
내가 만약 한마리의 작은 물고기라면 아버지는 넓디 넓은 망망대해인가 싶다. 넓다 넓은 바다의 존재를 헤염을 치면서 잘 느끼지 못하지만 물이 있어 자유로이 헤염을 칠 수가 있다.
래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요즘 몸은 괜찮으신지, 동네 친구들은 어떠신지, 날씨는 좋은지 물어보면서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동안 못난 딸들을 키우느라 정말 수고하셨다고 전해드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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