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길□ 조홍매

2020-10-16 08:4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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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하얀 구름, 눈부신 해살, 여느 봄날씨를 방불케 하는 청명한 가을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마시며 처음으로 가족 9명이 모두 함께 추석 성묘길에 올랐다. 오랜 외국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돌아오신 부모님과의 오랜만의 추석 동행길이라 가는 내내 우리 모두는 한껏 부풀어있었다.

세 아이는 언녕 길옆의 코스모스며 이름 모를 들꽃을 꺾으면서 까르르 신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들선들한 가을바람에 황금색으로 누렇게 곡식이 영글어가는 소리, 바스락바스락 단풍잎의 속삭임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져있어 풍성하고 근사한 가을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엄마는 세 아이에게 조금만 더 지나면 찔광이나무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찔광이가 아이들이 겨울에 즐겨먹는 ‘탕후루’라는 추가 설명을 하는 사이에 빨간 찔광이가 가득 열린 찔광이나무에 다달았고 아이들에겐 흥분을, 엄마에게는 주린 배를 달랬던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선사했다.

배고픔을 잠시나마 잊게 했던 찔광이열매를 따먹던 이야기를 듣노라니 나 역시 이 찔광이나무를 리정표로 삼았던 아버지와의 추석 동행이 떠올랐다.

한손에는 간소한 짐꾸러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해빛에 반사되여 유난히 반짝이는 예리한 낫을 휙휙 허공중에 기운차게 소리를 그어가며 젊은 사나이가 성큼성큼 앞서면 그 뒤에는 여라문살 되는 어린 녀자아이가 숨가쁘게 뒤꽁무니를 쫓는 그 장면은 결코 풍경만이 아니였다.

희붐히 밝아오는 동녘하늘에 획기적인 한획을 그으려는 듯 수탉이 홰를 쳐오면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 둘씩 굴뚝에서 물물 피여오르는 연기가 시골의 하루를 연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아버지와 가마목에서 분주한 엄마의 도란도란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서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소박한 추석날의 아침상이 마련된다.

한치의 흠집도 없도록 조심스레 껍질을 벗겨서 담아놓은 세알의 삶은 닭알, 일매지게 썰어놓은 돼지고기와 실발이 선명한 큼직한 소고기, 노릇노릇 예쁘게 구워진 찹쌀지지미는 소박하면서도 정성이 가득한 제사음식이였다.

어느 결에 아버지는 뒤울안에서 해탕이며 양리며 복숭아를 따다 주머니에 넣었다. 신문지로 돌돌 말아놓은 수저와 술잔까지 합세하면 곧장 집문을 나선다. 아버지는 성미처럼 걸음걸이가 아주 급했다. 제일 첫 산소행이 몇살 때 였던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짧은 다리로 아버지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뒤꽁무니를 쫓았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빨간 고추잠자리가 내 주위를 뱅뱅 맴돌아도, 메뚜기가 여기저기서 나랑 숨박곡질을 쳐대도, 통통한 강아지풀이 내 손등을 간지럽히며 다정하게 스쳐도 나는 한눈 팔 겨를이 없이 오로지 아버지의 그 쩍 벌어진 어깨의 들썩임을 좌우하는 발걸음에만 고정되였다.

한참을 종주먹을 쥐고 부지런히 따르다 도무지 힘들어 발걸음이 더이상 움직여지지 않을 때면 애원하듯 “아브지(아버지), 좀 천천히 가기쇼.” 라고 볼멘 소리를 했다. 그제야 아버지는 뒤따르는 나를 의식하고는 금새 속도를 줄여주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다. 산을 오를 때엔 올리막이라 더더욱 힘들었다. 아버지는 량손에 짐까지 쥐고도 성큼성큼 앞으로 나가지만 나는 이미 기진맥진이였다.

산소에 도착하면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확 트인 산아래를 굽어보았다. 황금벼파도가 출렁이는 벌판을 따라 저 멀리 무덤무덤 초가삼간으로 아담한 우리 마을을 바라보노라면 산소행 대신 일밭으로 향하던 엄마가 생각났다.

일이 밀렸다는 건 핑게였고 무서워서 산소행을 거부했다는 것을 썩 나중에야 알게 되였다. 산아래로는 벌떼같이 많은 사람들이 조상을 찾아 산을 톺는 모습도 한눈에 안겨왔다. 서늘한 가을바람은 후끈후끈해진 내 몸의 열기와 땀방울을 시원하게 걷어가군 했다.

아버지는 담배쉼을 할 겨를도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곧바로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한 풀들로 가리워진 무덤 우의 벌초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몰려오는 사람들과의 주고받는 인사는 은근히 나의 시샘을 자아냈다. 항상 대가족으로 북적이는 다른 집들과 달리 우리 집은 달랑 아버지랑 나 뿐이였기 때문이다.

벌초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술을 따르면서 인사를 드리는 간단한 제사식을 끝내고 옆 산소에 오신 분들이 끝나기를 기다려 함께 자리하고 갖춰 온 음식을 나누면서 조상님들의 생전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군 하였다.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는 하면서 다들 아이같이 부모님들 얘기를 주거니받거니 여념이 없었지만 아버지만은 일언반구도 없이 덤덤히 계셨다.

누군가 사리밝고 똑똑하신 우리 할아버지는 손끝이 여물어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뜨개질을 잘하셨다고, 나이 40에 겨우 얻은 아들이라 금이야 옥이야 했지만 돌잔치도 함께 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하시는가 하면 일찍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자식 넷을 거느리고 고생하셔서인지 할머니는 늘 구박받아도 상관없으니 며느리 만큼은 똑부러진 녀자를 들이시고 싶다고 노래처럼 부르셨으나 애석하게도 구박은커녕 며느리 얼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말씀에도 아버지는 그냥 무덤덤했다.

사실 두 집에서 산소를 나란히 잡게 된 데도 사연이 있었다. 생전에 워낙에 각별한 정을 나누셨던 터라 나중에 당신들이 돌아가시면 산소도 이웃으로 정하련다며 입을 모았고 그 념원에 따라 가지런히 자리하게 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음식을 얻어먹는 것 뿐이였다. 옆집은 자식들이 여럿인 데다가 시내에 사는 분들이라 서로서로 챙기다 보니 음식은 늘 풍성했다. 특히 그 시절 보기 드문 바나나며 과일향으로 가득한 사탕이며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과자는 별미중의 별미였다.

빙 둘러앉아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는 작별을 고하며 산을 내려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에 비하면 수월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여전히 버거웠다. 아버지의 빈틈없는 전속력은 나에게 무언의 독촉이였으나 호주머니 한가득 받아넣은 한웅큼의 사탕이 있어 마음만은 아주 달콤했다. 아버지와의 최종 동행의 목적을 실현하는 대목이기도 했다. 입안 가득 달콤함으로 꽉 찼지만 사탕이 녹아 없어지는 것이 아쉬운 듯 입술을 감빨면서도 나는 한번도 총망한 아버지의 발걸음 따위에 마음을 써본 적이 없었다.

생활형편이 조금씩 펴이게 되면서 드디여 내 소원중의 하나가 이루어졌다. 바로 산소에 묘비를 세우는 일이였다. 아버지가 뜨락또르로 직접 필요한 모래, 자갈, 세멘트 그리고 물까지 실어나르던 어느 추석날의 흥분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오매에도 바라던,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도 비석이 세워지게 되였다. 기분이 둥둥 떠서는 토끼처럼 퐁퐁 뛰는 나를 향해 아버지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였다. 워낙에 말수가 적으시고 표현을 잘 안하는 분이라 그때 아버지의 웃음의 진정한 의미도 몰랐었다.

외국붐으로 한창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돌연 외국행을 결심했고 그렇게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바람에 나와 아버지의 추석동행길도 십여년 전에 멈춰버렸다. 하지만 결혼 전까지 나는 산소에 다니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심지어 대학을 다니면서도 청가를 내서라도 꼭꼭 산소에 다녀가는 것으로 아버지가 못한 효도를 대신했다. 어쩌면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나는 출가를 했고 아버지는 더이상 내 기억 속 쩍 벌어진 어깨를 들썩이는, 청춘의 패기로 가득찬 그제날의 젊은이가 아니였다. 세월은 어느새 아버지에게 왜소한 체구와 밭고랑 같은 주름과 구부정한 허리를 내여주었다.

평생 성실함을 삶의 신조로, 뼈빠지게 부지런히 일만 해오신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왜 할아버지 산소에 준비해가는 제사상 음식이 조촐하냐, 남들이 다 있는 비석도 없냐고 할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덤덤하게 오랜 산이라는 말로 일축했던 그 리유를 말이다.

걸음걸이가 하도 빨라 동네에서 ‘빼똘’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아버지는 성미가 급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하든 서두름이 남달랐다. 어쩌면 아버지의 인생사전에는 느긋함이란 단어가 없었던 것 같다. 식사 도중이라도, 잠결이라도 누가 부탁해오면 즉시 달려나가고 후닥닥 잽싸게 해내는 스타일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늘 그런 줄로만,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돌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읜 탓에 아버지와의 추억은 고사하고 평생 아버지의 얼굴 조차 모르고 살아온 아버지에게, 살면서 한번도 아버지라는 이름을 불러본 적이 없는 아버지에게 삶이란 어느 노래가사처럼 한평생 처자식 밥그릇에 청춘을 걸고 오로지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였으리라. 잠간의 방황도, 잠시의 여유도 곧 사치였을 것이다.

앞만 보며 이를 악문 채 두려움도 외로움도 스스로 떨쳐내야 했고 힘들어도 슬퍼도 눈물을 삼켜야 했을 아버지. 그 서러움을 누가 보듬어줄가? 그 애처로움을 누가 리해해줄가?

외국생활중에도 아버지는 해마다 추석 즈음이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산소에 다녀오라고 당부를 해왔다. 어쩌면 부모 마음이 다 그렇듯이 자식된 도리도 이런 것이 아닐가?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소중함을 조금씩 조금씩 터득해 가는 것. 날이 갈수록 부모님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들여다보며 리해하기 시작하는 것. 그렇게 내 부모의 삶의 방식이 삶의 자세로, 삶의 태도로 조용히 지혜롭게 현명한 가르침으로 내 마음에 다가올 때 나 또한 누군가에게 부모라는 이름으로 한걸음 두걸음씩 성장하여가는 것이리라.

산소에 이르니 여전히 무덤 우는 잡초 투성이였다. 아버지는 낫을 들고 팔을 걷었다. 아들과 사위까지 벌초에 합세해 눈 깜짝할 사이에 금방 벌초를 끝났다. 대가족답게 북적이며 제를 지내는데 옆집 아저씨가 롱담조로 한마디 하셨다.

“이 집은 오늘 추석이라고 산 사람, 죽은 사람 다 모였구만!”

내 기억으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이제 아버지는 늙으셨고 나는 성장하였다. 아버지는 더이상 내 어릴 적의 잽싼 걸음의 아버지가 아니다. 나 역시 더이상 줄달음 치기에 바빠 볼멘 소리로 앙탈을 부리던 어린 소녀가 아니다. 그러나 추석길에 함께 했던 추억 만큼은 여전하다.

먼 후날, 우리 아이들에게도 오늘 이 순간들이 추억이 되고 그 추억이 또다시 그리움으로 다가올 때 함께였던 이 추석길도 그냥 추석길만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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