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동료가 탁상용 새해 달력 하나 들고 들어왔다.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것이라며 열심히 달력 빈칸을 채워가기 시작한다.
1월 29일 동생 생일, 2월 24일 아버지 생신, 3월 24일 이모 생일... 달력 칸칸마다 기념일을 적어가는 동료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어디서 본 듯 한 장면이다.
한해가 막가는 12월의 어느날, 시골 녀인이 장을 보고 집에 들어선다. 아들애로 보이는 꼬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쪼르르 달려가더니 녀인의 손에 들린 꾸러미를 받고 허둥지둥 풀어헤친다. 평소에 자주 먹지 못했던 사탕 과자와 며칠 후 새해 첫날 입을 설빔을 본 꼬마는 한없이 기쁘다.
꼬마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녀인은 꾸러미에서 력서 하나를 꺼낸다. 이제 며칠 뒤면 집안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릴 새해 력서이다. 손바닥만한 흰 종이 한장한장에 굵고 검은 글씨로 하루씩 표시한 365일 일력이다.
력서를 펼치던 녀인은 어느 한장을 오른쪽으로 접어놓고 뭔가 적는다. 그리고는 또 일력을 번지다 이번에는 왼쪽으로 접어놓고 또 뭔가 적는다. 얼마동안 접었을가? 두부모처럼 반듯하던 력서가 금방이라도 날아갈듯이 량쪽에 천사날개가 달렸다.
녀인의 그런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던 꼬마가 궁금해 물어본다. 왜서 새 력서를 접는가고…
녀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새해 우리 집안의 경조사 날을 기억하기 위해 접는것이라고. 그 말을 들은 꼬마는 력서를 집어들고 접힌 종이를 하나씩 펴본다. 시아버지 제사날, 시어머니 생신, 6촌 동생 결혼일... 꼬마가 분명 뭔가를 찾는 듯 한데 접힌 종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7월 28일 우리 아들 생일’
드디여 찾았다. 꼬마는 날듯이 기뻤다. 꼬마 생일날에 종이가 접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접어놓은 력서 속에 단 한사람의 생일이 없었다. 녀인의 생일이다…
그렇게 한해가 가고 두해가 가고 천사의 날개가 달린 새 력서는 해마다 계속 집안에 걸렸다. 그러나 바뀌는 력서에는 녀인의 생일이 해마다 계속 없었다. 아니 접혀지지 않았다.
사랑하는 가족의 궂은 일 마른 일 모두 기억해서 축복해주고 슬퍼해주면서도 정작 녀인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며느리로, 안해로, 엄마로 살아오면서 녀인은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면서 가족의 행복과 안녕을 지켰다. 해마다 새해 력서를 접으며, 해마다 세월을 접으며...
문득, 나도 력서를 접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력서를 찾아들었다. 새해 력서에 사랑하는 내 어머니 생일을 접어놓으리라…
그런데 달력에 어머니 생일이 없었다. 아니 찾았지만 접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아들 생일을 해마다 접어주던 시골 녀인, 어머니의 잊혀진 생일을 어른이 된 꼬마가, 내가 가슴으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기일(忌日)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해에는 력서에 접으리라. 내가 꼬마였을 적 시골 녀인이 해마다 일력에 우리 아들 생일을 접었던 것처럼,
종이장이 아닌 가슴에…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