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외 6수)□ 백진숙

2021-02-19 08:58:08

세월이 눈가에 그려준 내 천(川)자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세월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삽 휘둘러 한번도 판 적 없는데

어느덧 얼굴엔 이렇듯 깊고도 긴

물줄기가 생겨난 거냐


세월의 하얀 내물 따라

내 청춘 내 녀자가

빠져나가는 소리 듣지 못했는데

이젠 내 가을이

휘청거리는 내 세월이 꼬리 드리우고

빠져나가는 소리가 똑똑히 보인다

이젠 계곡이 되여 달려가는 너


밉상이 내천자가

어서 오라 손짓하는 설날 아침

거울 속 나를 들여다 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태양과 손잡고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세월을 문득 보아버렸다.


일기


번지 없는 주막

기쁨도 날개 퍼득이며 날아들고

아픔도 피 터진 가슴 드러낸 채

기꺼이 발 들여놓는다


혼자서 펼쳐보는 삶의 파노라마

고뇌와 고행의 25시

가식이 옷 찢어 던진다

흰빛 언어들 빛과 포옹하고

치부도 뛰쳐나와 좌선한다


혼자만이 문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아늑한 집.


수평선


해돋이를 보려고 찾아간

제주도 동쪽 바다가

밤잠 설친 수평선이

달려와 려관방을 노크했다


눈곱 뜯을 새도 없이

급급히 옷 주어입고 따라나서니

수평선은 등에 날 태우고 훨훨 날아

성산 일출봉에 내려놓았다


‘바다노래’ 부르며

급급히 되돌아가는 멋진 자태

때마침 진붉은 옷 차려입고

먼길 나선 해님과 마주쳤다


수평선은 뚝뚝 구슬땀 흘리며

젖 먹던 힘 다해 해님을 안아올렸다

찰나 낮 두껑이 힘차게 열렸다

해돋이에 미쳐 날뛰는 나에게

윙크하고 웃으면서

악수 보내는 푸른 지평선.


여름벌레


길 가다가 문득 오른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바로 발 밑에 들어온 풀벌레 한마리


커다란 올가미에 맞다든 줄도,

아차 순간이면 날아날 목숨인 줄도 모르고

꼼지락 꼼지락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온몸이 눈금되고 자대되여

땅 재고 꿈 재고 세월을 재는

여름 문지기여


전생에 넌 꽃이였는지도 모른다

달이나 별 그리고

나의 친구나 형제나 이웃이였는지도 모른다

또 가족들 모두가 널 눈 빠지게 기다릴 테니


내 어찌 널 털끝 하나 다칠 수 있으랴

온몸 움츠려뜨리며

내려놓으려던 발을 얼른 들어 뒤걸음치며

널 피해 길 에돌아가는 나는

여름이면 이렇게 어김없이 동곽 선생이 된다.


울타리


구름은 작별 입에 물고 지나가고

새들은 간밤 인사

나락 한알 쪼아먹 듯 리탈한다


굴레 리탈한 바람 몰려와

뺨 때려대고

걸어오던 나무들

흔들흔들 춤사위만 뿜어댄다


달 별들의 울타리로 분주하던

태양만이 달려와 악수하며

줄 선 직립에 충전해준다.


징검돌


징검다리 건너가다가 흠칫 멈춰 서 버렸다

물속에 엎드린 채 등만 내민 징검돌이

엄마 얼굴로 바뀌는 바람에

얼른 두 눈 감아버렸다


피와 뼈와 살과 펄펄 뛰는 심장과

하얀 령혼까지 만들어주시느라

검은머리 백발이 되신 엄마


불볕 쏟는 여름이나 눈보라치는 겨울이나

다 말라버린 젖가슴과 여윈 몸

세월의 물속에 잠그고 자식들 젖을세라

작은 등 내밀어 징검돌로만 살아오신 엄마


지팡이 짚고 세월의 강 앞에 선 구순 엄마께

흔쾌히 징검돌로 엎드렸다

휘청이는 기억 말아쥐고 건너가는

엄마가 너무 가벼워

물속에 엎드린 채 숨죽여 흐느낀다

아프게 아프게 따라오는 징검돌의 미소.


채송화


웃음 한바구니 등에 업고

집 앞마당에 오구구

여름이 내려와 앉았다


예쁜 겹치마보다

단벌 속치마에 만족하며

늘 작은 웃음 작은 삶 가르친다


한나절만 피고

오후면 아미 숙이는 다소곳

짧은 삶이지만 기꺼이 백년웃음 선사한다

작아서 더 커보이는 너


오 채송화

네 눈빛은 자신을 한껏 낮추고

기꺼이 작은 삶 살았던

엄마의 착한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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