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눈가에 그려준 내 천(川)자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돌돌돌 물 흐르는 소리가
세월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세월의 삽 휘둘러 한번도 판 적 없는데
어느덧 얼굴엔 이렇듯 깊고도 긴
물줄기가 생겨난 거냐
세월의 하얀 내물 따라
내 청춘 내 녀자가
빠져나가는 소리 듣지 못했는데
이젠 내 가을이
휘청거리는 내 세월이 꼬리 드리우고
빠져나가는 소리가 똑똑히 보인다
이젠 계곡이 되여 달려가는 너
밉상이 내천자가
어서 오라 손짓하는 설날 아침
거울 속 나를 들여다 보다가
그만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태양과 손잡고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세월을 문득 보아버렸다.
일기
번지 없는 주막
기쁨도 날개 퍼득이며 날아들고
아픔도 피 터진 가슴 드러낸 채
기꺼이 발 들여놓는다
혼자서 펼쳐보는 삶의 파노라마
고뇌와 고행의 25시
가식이 옷 찢어 던진다
흰빛 언어들 빛과 포옹하고
치부도 뛰쳐나와 좌선한다
혼자만이 문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아늑한 집.
수평선
해돋이를 보려고 찾아간
제주도 동쪽 바다가
밤잠 설친 수평선이
달려와 려관방을 노크했다
눈곱 뜯을 새도 없이
급급히 옷 주어입고 따라나서니
수평선은 등에 날 태우고 훨훨 날아
성산 일출봉에 내려놓았다
‘바다노래’ 부르며
급급히 되돌아가는 멋진 자태
때마침 진붉은 옷 차려입고
먼길 나선 해님과 마주쳤다
수평선은 뚝뚝 구슬땀 흘리며
젖 먹던 힘 다해 해님을 안아올렸다
찰나 낮 두껑이 힘차게 열렸다
해돋이에 미쳐 날뛰는 나에게
윙크하고 웃으면서
악수 보내는 푸른 지평선.
여름벌레
길 가다가 문득 오른발을
내디디려는 찰나
바로 발 밑에 들어온 풀벌레 한마리
커다란 올가미에 맞다든 줄도,
아차 순간이면 날아날 목숨인 줄도 모르고
꼼지락 꼼지락 오므렸다 폈다를 반복하며
온몸이 눈금되고 자대되여
땅 재고 꿈 재고 세월을 재는
여름 문지기여
전생에 넌 꽃이였는지도 모른다
달이나 별 그리고
나의 친구나 형제나 이웃이였는지도 모른다
또 가족들 모두가 널 눈 빠지게 기다릴 테니
내 어찌 널 털끝 하나 다칠 수 있으랴
온몸 움츠려뜨리며
내려놓으려던 발을 얼른 들어 뒤걸음치며
널 피해 길 에돌아가는 나는
여름이면 이렇게 어김없이 동곽 선생이 된다.
울타리
구름은 작별 입에 물고 지나가고
새들은 간밤 인사
나락 한알 쪼아먹 듯 리탈한다
굴레 리탈한 바람 몰려와
뺨 때려대고
걸어오던 나무들
흔들흔들 춤사위만 뿜어댄다
달 별들의 울타리로 분주하던
태양만이 달려와 악수하며
줄 선 직립에 충전해준다.
징검돌
징검다리 건너가다가 흠칫 멈춰 서 버렸다
물속에 엎드린 채 등만 내민 징검돌이
엄마 얼굴로 바뀌는 바람에
얼른 두 눈 감아버렸다
피와 뼈와 살과 펄펄 뛰는 심장과
하얀 령혼까지 만들어주시느라
검은머리 백발이 되신 엄마
불볕 쏟는 여름이나 눈보라치는 겨울이나
다 말라버린 젖가슴과 여윈 몸
세월의 물속에 잠그고 자식들 젖을세라
작은 등 내밀어 징검돌로만 살아오신 엄마
지팡이 짚고 세월의 강 앞에 선 구순 엄마께
흔쾌히 징검돌로 엎드렸다
휘청이는 기억 말아쥐고 건너가는
엄마가 너무 가벼워
물속에 엎드린 채 숨죽여 흐느낀다
아프게 아프게 따라오는 징검돌의 미소.
채송화
웃음 한바구니 등에 업고
집 앞마당에 오구구
여름이 내려와 앉았다
예쁜 겹치마보다
단벌 속치마에 만족하며
늘 작은 웃음 작은 삶 가르친다
한나절만 피고
오후면 아미 숙이는 다소곳
짧은 삶이지만 기꺼이 백년웃음 선사한다
작아서 더 커보이는 너
오 채송화
네 눈빛은 자신을 한껏 낮추고
기꺼이 작은 삶 살았던
엄마의 착한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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