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나무 부업□ 주덕진

2021-09-10 09:01:25

아침 일찍 일어나 소에게 짚과 여물을 푸짐히 준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부랴부랴 소에 수레를 지워 싸리나무 하러 산으로 떠났다.

하긴 노루꼬리만 한 겨울해는 서두르지 않으면 통 붙잡기 바쁘니 말이다.

기온이 령하 30도를 웃도는 아침 날씨는 꽤나 매짰다. 모자 가장자리엔 금방 새하얗게 서리가 끼고 사람이나 소의 코에선 흰 김이 코끼리 상아처럼 길게 뿜겨나온다.

오늘따라 투명한 유리처럼 유난히 맑은 하늘에선 성에꽃이 별처럼 반짝반짝 춤추는데 길가나 산야에 성에를 뒤집어쓴 나무들이 하얗게 소복단장하고 있어 마치 동화세계에 들어선 듯 무지 황홀한 기분이다. 이런 세계, 이런 기분 만끽할 수 있는 자체가 곧 행운이고 행복이다.

문득 “빠드득”, “빠드득” 하고 발로 눈을 밟던 소리가 멎었다. 소가 제자리걸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회초리를 들어 “쨩!” 하고 소궁둥이에 한매 안겼다. 그러자 충격을 받은 소가 다시 걸음에 박차를 가하고 수레도 덩달아 언땅에 바퀴를 부딪치며 덜커덕 타령에 신난다. 미련한 소 같지만 힘쓰기 싫어 쓰는 약은 수다.

나는 오늘 사흘째 싸리나무 부업하러 간다. 타작을 끝내자 일부 사람들은 마치 타작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끼리끼리 자리를 틀고 모여앉아 화토장, 마작패를 만지작거리는 데 열을 올리면서 싸리나무 부업 같은데는 아예 관심이 없다. 1년 농사를 마쳤으니 이젠 탕개를 풀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휴식의 한때를 즐겨보자는 심리도 있겠지만 묵정밭이 황페화되면서 싸리나무도 퇴화되여 적어지는 데다 싸리나무는 옷과 신을 턱없이 소모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거의 해마다 싸리나무 부업을 하고 있는데 싸리나무는 도끼, 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무난히 할 수 있는 불땜이 좋은 나무이기도 하거니와 나로써는 또 그럴만한 리유가 따로 있다.

1시간 남짓이 덜커덕 타령을 부르던 소수레는 마침내 마을에서 7, 8리 상거한 사흘갈이 늪(이 지방의 명소로 깊이는 명주 한 꾸레미 들어가고 둘레는 사흘갈이 밭 만큼 넓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동남쪽 묵정밭에 이르러 멈춰섰다. 이곳이 오늘 내가 찾는 목적지이다.

펑퍼짐한 곳에 수레를 벗겨서 세운 후 소는 근처 나무에 비끌어매두고 벼짚 몇단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싸리나무와 치를 전투무기-수레밑판에 꽂았던 날이 시퍼렇게 선 낫을 찾아들었다.

지금 내가 딛고 선 둬짐 푼히 될 이 땅은 70여년 전 그러니깐 우리네 조상—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이 쪽박 차고 두만강 건너 조선으로부터 이주해와 개간한, 개척의 첫 괭이를 박은 곳이다.

이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되여 싸리나무와 관목이 듬성듬성 자란 묵정밭을 둘러보노라니 눈앞엔 어느덧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괭이를 휘두르며 나무뿌리 뽑고 돌뿌리에 채이여 피 흘리며 한치한치 땅을 개간하던 정경이 저 세월 넘어 환영처럼 떠오른다.

그런데 그 후 피땀 흘려 일군 산비탈 개간지가 차츰 주인의 외면, 버림을 받으면서 력사의 뒤켠으로 밀려나 곡식 대신 관목이 들어서고 싸리나무가 자라 묵밭이 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싸리나무는 보통 한번 해내면 5, 6년 자라야 다시 낫을 댈 수 있다. 싸리나무는 기름을 친 것처럼 불이 잘 당겨 불쏘시개로 충당되고 음식을 급히 끓일 때 때기 좋다.

내가 살고 있는 촌은 향소재지 마을이다. 나는 해마다 겨울철이면 집집이 찾아다니며 싸리나무계약을 맺고 싸리나무를 해다 파는데 그 수입이 가관은 아니여도 손을 싸매고 놀기보다 낫다. 특히 내가 싸리나무 부업을 하는 것은 생활에 보탬하려는 것도 있지만 더우기는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글을 핑게로 게으르다고 하는 세속사람들의 부정관념에 던지는 도전장이기도 하다.

습관적으로 손바닥에 침을 탁 뱉고 낫자루를 단단히 잡은 나는 무더기로 선 나무에 낫을 걸었다.

“드드득…”

잘 드는 낫이다 보니 힘을 좀 주어 끄당기자 단번에 두, 세대가 베여진다. 그렇다고 다 잘 베지는 건 아니다. 어떤 때에는, 특히 늙고 깡마른 싸리나무를 만나면 낫으로 도끼질한다. 그럴 때면 빠직빠직 진땀이 돋는다.

부지런히 낫질하고 보니 여기저기, 무덕무덕 싸리나무가 놓여진다. 그만큼 기운도 쓴지라 등허리가 시큰해나고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돋는다.

땀도 들일겸, 낫도 갈겸 나는 눕혀놓은 싸리나무 우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배낭에서 숫돌을 꺼냈다. 숫돌로 낫을 가는 데는 5분여 정도 걸렸다. 나는 엄지손톱을 세워 낫날에 갔다 대봤다. 이것은 낫이 잘 갈아졌는지를 점검하는 절차다. 낫날에 손톱이 척척 붙는다. 날이 잘 섯음을 의미한다.

낫날을 시험해보다가 나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오래전 그러니까 학교에서 갓 돌아온 내가 햇내기 사원증을 따고 방금 일을 시작해서 낫을 갈던 때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한번은 처음으로 나무하러 가서 낫을 간다는 것이 그만 낫과 숫돌의 접촉도를 잘 장악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갈다 보니 낫날이 주정뱅이처럼 이리 눕고 저리 번져지고 하여 무지 애를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련된 지금은 아무리 무딘 낫도 5분이면 날을 선득선득하게 세울 수 있다.

땀이 들자 나는 다시 낫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자 조르기라도 하는 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허참, 그놈의 배가 시걱은 용케도 안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터벅터벅 걸어 수레께로 간 나는 벼단을 끌어당겨 깐 후 안해가 싸준 꾸레미를 헤치고 누룽지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게 눈 감추듯 잠간 사이에 주먹 만한 크기의 누룽지로 허기진 배를 달랜 나는 쉴 념 않고 이번엔 넓은잎딱총나무 줄기 베러 나섰다. 넓은잎딱총나무 줄기는 틀기 쉬운 데다 견딜성이 있어 맬감엔 제격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오전에 한쉼, 점심참에 한대 하며 담배쉼을 거르지 않지만 나는 그런 쉼이 없다.

넓은잎딱총나무 줄기를 베여온 나는 발로 벋디디고 끙끙거리며 탈기 시작했다. 나무를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단을 묶는 작업도 쉬운 일 아니다. 여기에도 요령이 있다. 나무들을 잘 다듬어 반듯이 놓고 묶어야 단이 단단하고 미끈하게 묶어진다.

한동안의 신고 끝에 널려있던 나무들이 한단, 두단 시장진출 허가받은 상품으로 탄생했다. 나무단들을 수레 근처에 메여다놓고 이마의 땀을 훔치며 헤여보는 나의 얼굴엔 어느덧 흐뭇한 미소가 피여올랐다.

‘한단에 2원씩 하는 나무 열다섯단이니 오늘 수입은 30원이군.’

나는 또 생각을 굴려본다.

‘첫날 수입이 28원, 이튿날 32원, 오늘 30원이니 도합 90원이다. 새해 신문 주문금을 차곡차곡 모아야지.’

새해 신문주문 기한이 당금이여서 무척 걱정이였는데 수입을 헤아려보니 내 마음이 금세 든든해지고 개운해진다.

신문이란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는 신문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여보, 떠놓은 밥이 다 식어요.”

“미안, 요것만 마저 보고…”

이것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나와 안해의 대화다.

나는 신문을 볼라치면 식사를 제쳐놓고 보는데 마치 ‘신문에서 밥이 나오는 듯’하다. 나와 신문의 교분을 말하자면 25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나는 초중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더는 나의 뒤바라지를 해줄 가정형편이 아닌지라 농촌에 돌아와 이루지 못한 진학꿈으로 매일을 실망, 고통에 모대겼다. 그때 신문과 책이 나의 아픈 가슴을 어루쓸어주고 따뜻이 손을 잡아주었다. 특히 어느 신문에서 본,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한 남성이 불행을 딛고 자전거수리를 하여 자신의 삶을 개척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준, 진한 감동을 주는 사적은 실로 나에게 충격이였다. 거기에 힘입어 한때 집구석에서 고민, 방황하던 나는 마침내 정신을 번쩍 차리고 현실을 정시하게 되여 들끓는 생산 제1선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신문은 이처럼 미로에 빠져 방황하거나 좌절한 삶의 용기를 잃은 사람들한테 삶의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주고 길을 가리켜주는 가이드가 되기에 손색이 없다.

이때로부터 나와 신문은 찰떡궁합처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관계의 친구로 되였고 경제적 여건으로 비록 신문을 주문해보진 못해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적극 열독하였다. 지금은 신문구독이 별 문제로 되지 않지만 그때는 작은 산촌마을에서 신문을 빌려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뜻밖의 한가지 일로 하여 나는 신문을 빌어보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주문해 보게 됐다.

그해 겨울, 어디서 신문을 얻어볼 수 있을가 생각을 굴리던 나는 향양로단에서 소조장직무를 맡고 있는 장동길네 집에 단위에서 주문해준 《연변일보》 등 신문들이 배달된다는 정보를 알고 찾아갔다.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는 《연변일보》, 《길림일보(한문)》 등 신문 몇부가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신문무지를 본 나의 눈은 희한한 것을 보았을 때처럼 반짝 빛났다.

그중 《연변일보》를 골라 빌려온 나는 단숨에 둬번 읽었다. 나는 이튿날에도 그렇게 빌려다 보았다.

그런데 그 후 내가 신문을 돌려주러 갔더니 장동길의 얼굴표정이 왠지 무엇을 잘못 먹었을 때처럼 잔뜩 찌프러져있었다.

“신문이 왜 이리 어지럽혀졌습니까?”

“신문이 어지럽혀졌다구? 내딴에는 조심해보느라구 했는데…”

신문을 들여다봐도 별로 어지럽혀진 흔적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송구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글 쓴다는 사람이 신문주문도 못하구 맨날 동네 돌아다니며 신문 비럭질이나 하면서…”

내가 신문을 빌려보는 것이 그렇게 눈에 거슬리고 아니꼬웠던지 이번에 장동길은 마음먹고 아픈 곳을 꼬집는다.

“장동무, 꼭 그렇게만 말해야 되겠소, 빌려서라도 학습하면 좋은 일 아니겠소?”

장동길한테서 까닭 없는 모욕과 멸시를 당하자 전에 없는 분노를 느꼈지만 리지를 되찾은 나는 매를 드는 것보다 관용이 더 바람직 하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말았다.

사실 전에 장동길은 내가 여러 신문에 경상적으로 소식 보도를 발표하는 것을 알고 상급에서 맡겨준 양로보수 임무를 완성 못하고서도 넘쳐 완성한 것으로 신문에 내여달라고 나보고 청을 든 적 있었다. 보도의 진실성을 무엇보다 중요시하고 있는 나는 양로단일군들과 정황을 료해하는 과정에 장동길이 제공한 정보가 실제사실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거절했던 일이 있다.

장동길한테서 무참을 당한 나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치유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신문을 자신의 힘으로 주문해서 떳떳이 보리라 작심했고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싸리나무 부업이다.

“훌륭한 신문은 항상 독자들 앞에 성숙되고 다듬어진 자태로 나선다.”

“한권의 책을 사귀는 것이 고상한 심령의 사람과 사귀는 것과 같다면 훌륭한 신문 역시 우리의 얼굴모습을 미용해주고 내심세계를 부각해주는 거울과 같다.”

이것은 일찍 선인들이 한, 신문과 책에 대한 고도로 되는 칭송이고 평가이다. 매체로서 신문, 특히 당의 기관지는 소식에 령통할 뿐만 아니라 다원문화도 품고 있어 품위 있고 박식한 선생이 되기도 한다.

신문과 함께 해온 20년 나는 신문을 요람으로 창작의 걸음마를 익혔고 창작기량을 련마하면서 충실히 성장해왔다.

1984년, 력사적인 전환점인 개혁개방의 물살을 타고 실시된 농촌 호도거리 정책의 우월성과 성과를 여실히 반영한 통신 <머루따기>는 《연변일보》에 발표되여 1등상을 수상하고 내가 쓴 가사 <공원놀이 챠챠챠>는 공연무대를 달구는 인기종목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조선족이 해내외 이르는 곳마다에서 울려퍼지는 애창가요로 거듭났다.

이 20년 사이 나는 한낱 신문원고 쓰기 열성자로부터 어엿한 특약통신원, 작가협회 일원으로 성장하면서 800여편의 통신보도를 신문, 방송에 내고 가사, 동화, 구연 등 150여편의 문예작품을 신문, 잡지에 발표하였다. 신문보도상 5차, ‘길림성과외문예창작적극분자’ 영예증서 등 주급, 성급 문예창작상 8차를 수상하면서 민족의 언어문자를 지키고 전승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었다.

“야호, 오늘 성수 난다!”

싸리나무단을 두둑하게 수레에 박아실은 나는 아이들처럼 흥분되여 웨쳤다.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앞뒤산이 쩌렁쩌렁 메아리 쳐 울려퍼졌다. 석양빛을 밟으며 귀로에 오른 나의 심정은 흐뭇했다. 집가기 성급한 소도 마치 주인의 심정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대가리를 내저으며 걸음에 박차를 가한다.

  나는 지금 비록 문학이라는 꽃을 피우기엔 어려운 농촌에서 매일 체력을 파는 힘들고 고된 삶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산과 새와 교감하면서 생동한 시골풍정을 색채 있고 실감 있게 담아내는 농촌 1선의 통신원, 작가로서 나름대로의 추구가 있고 보람이 있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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