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머 니 □ 장초봉

2022-07-07 15:03:09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난다.

리유라 할 것도 없고 영문조차 모르겠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난지 벌써 몇 해나 된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얼굴이 기억 속에 떠올라 잠을 설쳤다. 저녁에 글을 쓰다가 늦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마치 할머니가 문밖에서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불만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지만 여섯시도 안되여 깨여났다. 자꾸만 할머니가 내 기억의 녹쓴 문을 노크하거나 비스듬히 열린 틈으로 마음을 기웃거린다. 돌아가신 로인이 꿈도 아니고 기억 속에 나타났는데도 귀신일가봐 무섭지도 않다는 일이 이상하다. 거부감이 들기는커녕 반갑기만 하다. 어쩌면 아흔셋의 고령에 유명을 달리한 할머니의 하늘 혼령이 령험을 부려 손자가 쓰는 글에 당신도 한줄 껴달라고 부탁하시려고 찾아오셨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살았다. 교통이 불편한 옛 북간도 림구현의 한 산간 오지 마을이였다. 그래서 어린시절에는 할머니 댁에 간다면 마음이 설레기 전에 가옥이 20여호 밖에 안되는 깊은 산중의 적막함과 무료함이 먼저 공포와 두려움으로 분위기를 몰고 왔다. 하지만 그곳에는 할머니가 살고 있기에 단념할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손자가 온다면 며칠 전부터 나를 기다렸다. 도착하는 날이면 한두시간 전에 댁에서 멀리 국도에까지 나오셨다. 간이역이라 뻐스정류소도 정차시간도 없는 뻐스를 기다리느라 눈보라 속의 한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한번은 내가 날이 너무 추워 약속한 날자가 아닌 다른 날에 간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날도 저녁 해질 무렵까지 손자를 기다리다가 발에 동상까지 입었었다. 진물이 질질 흐르는 할머니의 언 발을 보며 약속을 어긴 자신이 미워졌다.

여름에도 그 땡볕을 무릅쓴 채 땀에 옷이 흠뻑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머니는 국도에서 반나절씩이나 기다리곤 했다. 그런 애잔한 모습을 볼 때면 마치 할머니의 인생은 번화한 도시에서 오는 손자를 기다리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전부이고 유일한 락인 것처럼 느껴져 차마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할머니가 사는 동네로 가려면 기차역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황량한 산길을 15리쯤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어린 나이에 인적이 없는 한적한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숲속에서 짐승이라도 불쑥 뛰쳐나올가봐 등골에 진땀이 흘러 내리곤했다. 그나마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목가선 장거리뻐스가 손님이 있으면 동네 어구의 아무 데나 내려주었다. 그렇다고 뻐스를 타면 차내에 풍기는 역한 휘발유 냄새와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체의 흔들림때문에 나는 항상 멀미의 고통에 빠져들어야만 했다. 심할 때는 미리 준비한 비닐봉투에  오바이트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려독도 동구 밖까지 나와 나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다 견뎌낼 수 있었다. 지병인 관절염때문에 걸음도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걷는 할머니의 로고에 비하면 내 불편은 아무것도 아니였다. 아픈 몸으로 그렇게 나를 고대하는데 가지 않으면 할머니의 실망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을 것이니까. 내가 가면 주름살투성이인 할머니의 검버섯이 돋은 얼굴에 오랜만에 할미꽃같은 웃음이 활짝 피여나며 젊어지는 것 같았으니까.

할머니의 댁을 방문한다고 해서 특별한 것도 없었다.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많이 먹어라.”이다. 그러나 정작 많이 먹자고 밥상을 보면 각별하게 먹고 싶은 반찬이 없었다. 도시의 인스턴트식품들인 라면, 햄버거 같은 현대음식에 길들여진 내 구미에 맞는 먹을거리는 별로 없었다. 쌀밥, 된장국, 김치, 닭백숙 따위의 전통음식이 위주였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할머니가 내 그릇에 이것저것 반찬을 계속 집어놓기 때문이다. 게다가 료리마다 할머니의 정성이 깃들어 있어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등어는 며칠전 멀리 향소재지에 몸소 걸어가서 사온 것이고 고사리와 버섯요리는 불편한 몸으로 몸소 산에 올라가 캐온 거라는 등 사연을 담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반찬이 아니라 할머니의 정성을 먹은 셈이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은 쇠솥의 밥을 푸고 마지막 바닥에서 긁어모은 누룽지였다. 나는 촉촉하면서도 바삭하고 탄내가 나는 것 같으면서도 고소한 그 누룽지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것을 눈치 챈 듯 할머니는 호위병처럼 나 외에는 누구도 누룽지에 손을 대지 못하게 지켜 주곤 했다. 나보다 어린 사촌동생이 한번 누룽지에 손을 댔다가 넌 집에서 밤낮 먹지 않냐며 할머니한테 에누리 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할머니는 내가 그곳에 갈 때마다 “공부는 잘하니?”하고 노래처럼 묻곤 했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하는 말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걱정이 되여서인지는 모르겠다. 왜냐면 할머니는 나의 대답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그냥 무심하게 “예.”하고 대답하거나 아니면 그것도 귀찮아서 질문을 무시했다. 솔직히 할머니는 내가 학급에서 공부가 꼴찌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나를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았을 것이며 변함없이 귀여운 손자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지긋이 나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가도 뜬금없이 그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고 뻣뻣한 손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그럴 때면 로인의 고목뿌리같은 얼굴에 한없는 자애로움과 대견함이 흘러 넘쳤다. 손자에 대한 무한한 믿음과 신뢰가 넘쳐났다. 그것때문에 평소 좌절감에 잘 빠지는 나는 할머니한테만 가면 자신감이 붙었다. 아마 그 자신감은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존재감에서 생기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 앞에서 나는 항상 1퍼센트는 부족한 아들이였다. 그러나 할머니 댁에만 가면 아버지, 어머니의 불만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항상 완벽하고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 되였다. 내가 어떤 잘못을 하든 할머니는 항상 내 편이였고 꾸지람을 하지 않았다. 부모에게 나는 못난 자식이였지만 할머니에게는 늘 귀엽고 자랑스러운 손자였다.

그런데 그 고장은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식수 해결부터 난제였다. 펌프물은 할머니 말로는 깨끗하고 좋다는데 왠지 모르게 나는 그 물만 마시면 속탈이 났다. 그렇다고 소매점에서 생수를 사서 마시자니 할머니 보기가 미안했다. 그래서 매번 집에서 출발할 때 음료수 한박스를 사가지고 갔다. 구실은 할머니한테 코카콜라라는 도시의 음료수를 선물로 사가는 것이였지만 실은 펌프 물 대신 내가 마시려는 목적이였다. 다행인 것은 식사하거나 일을 하실 때 할머니는 항상 콜라병을 들고 다니면서 마셨다. 나는 그래서 할머니가 콜라를 엄청 좋아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숭늉이나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할머니가 콜라를 진짜 좋아했는지 의문이 든다. 어린 손자의 꼼수를 할머니가 간파하지 못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손자가 마시기 미안해 할까봐 모르는 척 음료수를 마시면서 내가 사간 콜라를 좋아하는 흉내를 냈을 것이다. 불편하기는 화장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름철에는 변기 바닥에서 욱실거리는 구더기가 눈에 보여 기겁을 해야 했고 겨울철에는 산같이 우뚝 솟은 배설물 더미가 뾰족한 송곳처럼 엉덩이를 찔러 당혹스러웠다. 게다가 시골은 해만 지면 칠흑같이 캄캄해서 코앞도 보이지 않아 화장실 가기가 무서웠다.

잠자리도 편안하지 못했다. 어려서는 잠만 들면 하늘이 무너져도 모르는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할머니 댁에만 가면 새벽에 무조건 깨곤 했다. 방구들은 추운 산동네임에도 할머니가 새벽에 일어나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너무 뜨거웠다. 장판이 녹아내릴 것만 같이 물렁물렁해질 정도였다. 두꺼운 이불은 덮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담요를 덮어야 했는데 이게 작을 뿐만 아니라 엄청 얇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다리나 팔이 그 불덩이 같은 장판에 닿아 화상을 입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담요와 이불이 뒤바뀔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잠버릇이 나쁜 내가 밤중에 담요를 발로 차 던지면 감기 걸릴까봐 대신 이불을 덮어주는 통에 하마트면 찐빵이 될 뻔했다. 새벽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지 말라고 수차 부탁했으나 할머니는 “알았다”고 대답만 했다. 외풍이 심한 시골집은 바닥이 뜨겁지 않으면 추워서 감기에 걸리기 쉽다며 계속 새벽불을 지폈다. 무엇을 하든 동작이 느린 할머니가 새벽 불을 지핀다는 건 밤잠을 설쳤음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로인만의 사랑 표현이니 더는 말리지 않았다.

시골사람들은 대체로 목청이 높다. 동네가 작고 다들 지인이라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목청은 누구보다도 높았다.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한 리유로 매번 식사시간이 되여 뒤산 언덕에 올라가 놀러 나간 내 이름을 부를 때면 그 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산에 메아리치며 마을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동네이든, 산속이든, 다른 어디에서 놀든 죄다 들을 수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하고 잔약한 신체의 로인이 어디에서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아마 손자에 대한 사랑이 목소리에 실려서 그런 힘이 생긴 게 아닌가 싶다.

할머니는 운신이 어려운 몸임에도 나한테 찰떡까지 해주었다. 그런 날이면 “우리 귀염둥이한테 찰떡을 해주려고 떡메를 빌려왔다.”라고 말했다. 호기심에 부푼 나는 조용히 옆에서 찰떡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큰아버지가 무거운 떡메로 떡판에 놓인 찐 찹쌀을 내리칠 때마다 텅텅하는 소리에 좁은 산골짜기가 들썽거렸다. 할머니는 떡메에 맞은 밥을 손에 물을 묻혀 뒤집어놓는다. 그렇게 한참 반복하자 거짓말처럼 밥이 떡으로 변했다. 할머니는 잘 쳐진 찰떡을 칼로 일정하게 잘라 미리 만들어 놓은 팥고물 그릇에 담았다. 할머니가 처음에 자른 인절미를 팥고물을 묻혀 내 입에 넣어주었다. 천하별미였다. 쫀득쫀득하면서도 간간이 씹히는 쌀알 그리고 팥의 달콤함이 구강에서 잘 어울려진 후 깜쪽 같이 식도로 넘어가 사라지곤 했다. 그게 떡맛이기 전에 할머니의 손맛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썩 후날의 일이다. 제비새끼처럼 잘 받아먹는 나를 보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어려있었다. 잘 먹는 걸 보니 당신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며 미소를 지으며 나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끔씩 아궁이의 잉걸불에 감자를 구워줄 때에도 할머니의 만면엔 행복한 미소가 넘쳐났다. 뜨거우면서도 시꺼멓게 탄 감자의 껍질을 보고 이게 무슨 맛이 있겠냐고 의문스러웠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정성을 봐서 하나 정도는 먹어 주려 생각하고 한 입을 꾹 씹었다. 그러나 생각밖에도 맛을 보기도 전에 진득진득하고 뜨거운 감자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화상을 입고 말았다. 나는 입천장에 생긴 물집이 혀바닥에 스칠 때마다 통증이 심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할머니의 안쓰러운 표정은 내 울음을 그치게 했다. 난감하여 발만 동동 구르며 자책하는 할머니가 너무 불쌍했다. 나는 할머니의 촉촉한 눈가를 닦아 준 후 내버렸던 검정 감자를 다시 손에 잡았다. 먹지 말라고 말리던 할머니는 내 고집을 꺾지 못하자 결국 뜨거운 감자를 당신의 입으로 호~ 하고 불어서 식힌 다음 설탕에 찍어 주었다. 평소에는 퍽퍽하다고 먹지 않았던 감자가 할머니의 정성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고구마보다 더 맛있었다. 그래서 나는 밥도 안 먹고 손과 입 주변이 빈번하게 시커멓게 될 정도로 많이 먹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머니를 보러 간다곤 떠들어 댔지만 정작 그곳에 가서는 조용히 앉아 대화한 시간보다 밖에서 뛰노는 시간이 더 많았던것 같다. 그 가련할 정도로 적은 대화라고 해보았자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말하는 이야기만 들었고 좀 커서는 “할머니 잘 지냈어요?”, “건강은 괜찮으시죠?” 하는 단마디 인사 외에는 별다른 화제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은 할머니와 같이 화투를 칠 때도 있었다. 돈내기는 아니였지만 성냥개비를 다 잃었다고 눈물이 글썽한 어린 손자에게 슬그머니 당신의 것을 넘겨준다거나 일부러 내가 이기도록 필요한 패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도와줬다. 할머니는 늘 내가 좋아하면 같이 즐거워했고 내가 슬퍼하면 누구보다도 더 안타까워했다.

중학생인 당시 할머니 댁에 놀러갔을 때였다. 밥을 먹고 형과 사촌동생과 같이 밖에 나가서 노는데 갑자기 할머니가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펄럭이는 꽃무늬 고무줄바지를 뒤적이더니 허리춤에서 손수건에 돌돌 만 뭔가를 꺼냈다. 그리고 손수건을 펴고 그 안에서 또 하얀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 종이말이 안에는 뜻밖에도 돈이 들어있었다. 십원짜리, 오 원짜리, 일원짜리, 오십전짜리 등 잔돈들이 말려있었다. 아마도 동네 로인들과 화투놀이를 즐기는 할머니의 비상금인 모양이다. 할머니는 그 돈을 나한테 건네면서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 돈을 받고 “할머니, 요즘은 이 돈으로 아무것도 못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를 보고 나는 차마 말문이 열리지 않아 조용히 받아들고 형의 뒤를 따라갔다. 걸으면서 손에 든 잔돈들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결국에는 목이 메여왔다. 돈의 액수는 적지만 어쩌면 그 돈은 째지게 가난한 할머니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전부의 재산인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해외로 출국하고 형이 대학에 간 리유로 16살인 어린 나이에 혼자서 집을 지키고 공부하는 내가 불쌍해 다른 손자 몰래 나한테만 주었던 것 같다. 할머니의 체취가 배인 그 돈에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과 따뜻함을 느꼈다. 사실 자신의 건강 때문에 혼자인 나를 돌봐주지 못해 누구보다도 더 힘들어하던 할머니였다. 액수는 적지만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할머니의 마음을 더 리해할 수 있었고 정도 더 깊어졌다.

그러나 그후 고중에 올라간 나는 입시공부가 바쁘다는 리유로 할머니한테 자주 가보지 못했다. 그냥 전화로 잘 계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에 대한 문안만 여쭤보았을 뿐이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금에 와서야 한 번이라도 더 가보지 않은 자신이 미워졌고 그 사랑의 소중함을 너무 늦게 깨달아 후회막심이다. 지금 나에겐 “할머니”라고 부를 사람도 없고 응대해 줄 사람도 없다. 심지어 많은 시간에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그러나 매번 힘들거나 외로울 때, 할머니는 어김없이 기억 속에 나타나 나에게 에너지를 보충해주곤 한다. 더구나 부모님에게 부족하다고 핀잔을 들을 때나, 인생의 난관이 앞을 가로 막아 좌절할 때면 나를 무조건 믿어주고 신뢰하던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정신적 압력과 스트레스를 받아 편안한 잠을 이루지 못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지금,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따뜻한 손길, 자애로운 미소가 너무 그립다. 내가 잘 나가든 아니면 사회의 치렬한 경쟁에서 밀려나든 그런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주던 할머니가 계신다면 지금도 나에게 자존감과 자신감 그리고 인생에 대한 신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마음을 부리고 머리도 비울 수 있는 휴식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에겐 할머니의 집과 같은 그런 위안의 공간이 없다. 휴식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위한 에너지 충전 과정이고 잘못을 개정할 수 있는 성찰의 시간이다. 인생에서 더 큰 성공을 이룩하려면 휴식은 필수 조건이다. 그 공간의 부재가 느닷없이 기억 속에 할머니를 소환한 것이였다.

그렇다. 할머니는 분명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 기억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할머니는 지금도 기억 속에서 내 가슴에 용기와 신심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할머니, 보고 싶어요, 그때처럼 누룽지도 먹고 싶고 감자와 찰떡도 먹고 싶어요. 다시 한번쯤 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면 안될가요?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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