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 단상 □ 김성철

2022-11-24 18:33:33

가을바람이 엷게 설렁이는 구월의 초입, 도심공원의 구석진 곳에 고요히 자리잡고 있는 작은 련못 생각이 홀연 떠올랐다. 땅에 있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의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처서를 보낸 지도 며칠 잘된다. 하루가 다르게 썰렁해지는 가을철이라 언제 시들지 모를 련꽃이 이울기 전에 한번쯤은 봐두어야지 하는 속셈으로 련못을 찾고 싶었다.

좁다란 포장길 따라 도심공원의 동쪽 끝자락을 차지한 아카시아숲을 꿰지르자 리모델링 작업이 한창인 옥불사(玉佛寺)의 황금빛 지붕이 한눈에 뛰여들었다. 전나무에 둘러싸인 적갈색 담장을 스치며 사찰 북쪽에 숨은 작은 련못으로 향했다.

길섶의 우거긴 숲속에는 사연 많은 가을이야기를 풀어놓은 듯 뭇새들의 지저귐도 다양했다. 수풀 사이로 거침없이 내리쏟는 해빛을 받아 무더기로 철 늦은 개화를 시작한 익모초에 여러 색갈의 나비가 나풀나풀 자리를 옮겨가며 꽃가루 나르느라 분주하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뛴다고 했던가, 금방 생겨난 꼬마잠자리조차 덩달아 설쳐댄다.

싱싱함이 많이 누그러진 나무잎에는 매미가 벗은 허물만 후줄근히 남아있다. 충란으로 일년, 유충으로 5년이란 시간을 인내하다가 잠간의 우화기를 거쳐 성충이 된 매미는 한달 뿐인 생을 요란스런 구애의 절규와 더불어 쓰나미 같은 에너지를 쏟아내더니 이렇게 허물만 남기고 사라졌나보다.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진 공원은 한결 헛헛하고 적료했다.

팬데믹 비상시기인 데다가 평일인 탓인지 련못에 나온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호수 언저리 따라 둘러싼 수양버들과 느릅나무가, 우거지면 우거진 대로 약소하면 약소한 대로, 지어는 심한 일교차로 클로로필이 빠지면서 누렇게 사위여가는 모습 그대로, 코발트빛으로 물든 잔잔한 수면 우에 살폿이 내려앉는다. 한치의 숨김도 없이,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투영되여 아른거린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가식이나 위장 따위는 훌렁 벗어버리고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아 솔직해지고 홀가분해지는 맑은 투영이였으면 좋겠다.

새끼피라미같이 잘디잔 물고기와 작은 새우들이 무리지어 노닐고 있는 옅은 못가에 대여섯살쯤 돼 보이는 녀자애가 장난감 뜰채로 물고기와 새우를 건지며 재밌게 놀고 있었다. 미니양동이를 손에 든 스커트차림의 젊은 엄마가 애 곁을 맴돌며 지키고 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폴짝대며 좋아하는 녀자애와 그를 지켜보는 엄마의 표정은 꽃처럼 찬란하다. 그들 모녀는 풍성한 가을날의 따뜻한 추억을 열심히 직조해가고 있었다.

수십년 동안 자라서 무성해진 나무는 넉넉한 그늘을 만든다. 그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정년퇴직한 사람들로 짐작이 되는 서너명의 로인들이 낚시대를 늘여놓은 채로 한담객설도 늘여놓는다. 파랗게 젊었던 지식청년 시절의 련애사와 그 후기, 타향에 살고 있는 자식들에 대한 자랑과 걱정거리 같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즐기는 가을 하오에 여유로움이 풍겨나온다. 모두 강태공들인지 던져놓은 낚시에 고기가 낚기든 말든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물밑의 입질로 깜박대는 낚시찌 움직임도 마냥 느긋하게 방치한다.

수심이 깊어 서식할 법도 한 민물자라는 그림자조차 얼씬거리지 않고 지천으로 자라풀만 무성하다. 수별이라고도 불리우는 자라풀은 기다란 꽃자루로 하얀 꽃부리를 떠이고 있다. 수면을 뒤덮으며 빼곡히 겹쳐진 이파리는 푸르다 못해 거뭇하다. 그 무성한 잎 사이로 드문드문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하얗고 자잘한 꽃들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 만큼 눈부시다.

두꺼비 한마리가 내 발걸음에 놀라 퐁당 하고 련못에 뛰여들며 둥근 파문만 남기고 호심으로 자취를 감춘다. 점점 멀어지는 파문을 따라 눈길이 닿은 가장자리에 련꽃무더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해마다 본거지를 차츰차츰 확장해가고 있는 자라풀에 조금씩 자리를 내여주다가 지금은 한쪽 구석까지 나앉게 된 련꽃은 많이 꺾인 초세임에도 불구하고 큼직한 핑크빛꽃을 활짝 떠올리고 있다. 한여름 한창이였던 꽃철을 보내고 나니 련실을 품은 련방의 수효가 꽃송이보다 훨씬 많아졌다. 몇 안되는 련꽃이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도도하고 청아하다. 그리고 늘 고요하고 차분하다. 일편단심 꽃잎을 받쳐주고 있는 련잎, 랍질로 기름진 련잎에는 비스듬히 기울어진 늦은 오후의 해빛을 받아 도렷하고 산뜻한 잎맥을 펼쳐내며 누렇게 퇴색해가는 가을빛을 흔들고 있었다.

봉긋한 꽂봉오리와 만개한 련꽃, 게다가 씨앗을 채운 련방까지 맞춤하게 어우러져 부용의 일생을 한 앵글에 담아 생생하게 스케치해주고 있다. 유유한 향의 련꽃이 환하게 피였다가 일개 남가일몽으로 허허히 사라짐이 아니라 꽃이 져버린 그 자리에 금방 련실로 가득 채워진다고 생각하니 별로 허전하고 쓸쓸해보이지 않았다.

호수가 둔치에 퍼질러 앉아 꽃멍, 물멍을 하다 보면 쇠잔해지는 생명이 새롭게 씨앗으로 재탄생하며 또 다른 꿈을 남기는 모습에서 지금 한창 깊어가는 가을이 결코 덧없이 무너지는 가을이 아님을 이곳 련못에서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련꽃을 보면서 왕창령(王昌龄)의 <채련곡(采莲曲)>이나 주자청의 <련못의 달빛>을 상기할 법도 한데 왠지 <부생륙기(浮生六记)>의 둘째 편 <한정기취(闲情记趣)>에 나오는 한 대목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여름날 련꽃이 갓 필 무렵, 저녁에 오므렸던 봉오리가 아침이면 꽃으로 활짝 피여난다. 운(芸)은 천에 차잎 한줌 고이 싸서 꽃 속에 넣어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꺼내여 끓인 비물에 차를 우려낸다. 그 향기가 유난히 은은하고 절묘했다.”

청나라 때 선비 심복(沈复)의 처 진운(陈芸)이 궁핍한 살림 형편 때문에 남편에게 값비싼 고급차를 달여 대접할 여력이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련꽃향차였다. 안해의 정성으로 만든 련꽃향차는 사랑이 듬뿍 스민 차요, 그 어느 고급차에도 뒤지지 않는 금슬지화의 차가 아니겠는가. <부생륙기>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외사촌 사이로 어려서부터 마음을 나누어 혼인을 하게 된 심복 부부는 취미도 잘 맞아 함께 시를 읊고 글을 론하고 그림도 평하면서 화초와 산수를 즐기며 가난한 일상의 멋을 즐겼다. 부부이면서 벗이였던 그들의 사랑은 지극한 배려와 리해를 바탕으로 나날이 깊어갔다.

궁색할 정도로 부족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풍류를 즐기며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운치있는 일상을 즐긴 그들의 삶은 현대인들도 쉽게 공감하며 거기에서 여건은 단출하지만 마음만은 풍요롭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과 생활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인들은 항상 단순한 삶을 살라고 권장한다. 그것은 텅 비고 메마른 단순함이 아니라 알차고 풍성한 단순함을 말한다. 마음의 경지를 시종일관하게 단순한 상태로 유지하지만, 그러나 풍부한 정감과 경험,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그런 순수한 마음가짐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각이한 마음가짐과 추구하는 바가 다름이니 각기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정열에 넘치고 천진란만한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삶을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시인 도연명을 본받아 조용한 전원의 은둔생활을 즐길 수도 있다. 다만 하잘 것 없는 공리에 집념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정직함과 존엄을 지키면서 자신한테 좀 더 진솔한 삶, 참된 삶을 사는 게 바른 삶의 자세인 것 같다.

나도 살아가면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상상해본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같은 전자매체를 통하여 기하급수로 쏟아지는 온라인 정보를 수시로 접할 수 있고, 수만권의 책을 담을 수 있다는 리더기로 전자책을 보는 요즘, 아날로그에 익숙한 나는 종이책을 고집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좋아하는 책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어디든 다리를 쭈욱 뻗을 수 있은 곳에 느긋이 기대여 반쯤 발효시킨 우롱차 한잔 우려놓고 책갈피 뒤적이면서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촉감과 종이책의 묵향을 느끼며 나만의 마음속 산책로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싶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뿌듯하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가 죽을 때까지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고 또 그런 것들을 찾아 머리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힘닿고 마음 닿는 데까지 차근차근 채워가보는 건 어떨가. 이곳 련못의 련꽃이 피고 지면서 련방에 씨앗을 차곡차곡 채워가듯이.

자동차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수선스런 소음도 멀리하고 철광석 채굴공사장의 먼지도 닿지 않는 고즈넉한 이곳 련못에서 은근하게 락조에 물든 련꽃은 수줍은 소녀의 홍조를 띄워 유난히 아름답다.

어언간 요란스럽던 뭇새의 지저귐도 내려앉은 어스름에 묻혀버리고 작은 내가에는 방망이모양의 이삭들을 추켜든 부들숲이 노을빛에 젖어든다. 또 하루의 사연을 품은 아카시아숲은 바람 잃어 점잖아지고 그 숲 사이로 살짝 언덕진 길이 공원 밖까지 이어졌다. 조촐한 귀가길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해마다 자라풀에 조금씩 밀려나 후미진 구석에 숨겨진 련밭이긴 하지만 엄동설한 이겨내고 래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은은한 련꽃향을 피우고 련실을 꼭꼭 채워가리라.

가을 어느 귀가길에 미당 서정주의 시 <련꽃 날리고 가는 바람같이>를 가벼운 소리로 얹어본다.

섭섭하게/그러나/아주 섭섭치는 말고/좀 섭섭한 듯만 하게

리별이게/그러나/아주 영 리별은 말고/어디 래세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 리별이기에

련꽃/만나러 가는/바람 아니라/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한두 철 전/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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