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태령감’ 장성에 오르다□ 류정남

2022-12-16 09:36:29

고태수(高太寿) 령감은 어릴 때부터 별명이 ‘고태’였다.  하긴 옷차림이나 말 한마디나 행동 하나라도 동네사람들의 눈에는 ‘고태’로 보일 만큼 특별하고 고집스러운 데가 있었다. 워낙 큰 동네였는데 지금은 단 열몇호밖에 안되는 늙은이와 몇몇 조무래기 애들만 남은 작은 동네에서 완전 ‘고태령감’으로만 불리우게 되여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오래전부터 ‘고태령감’의 아집스러운 소개에 따르면 자기네 제주고씨(济州高氏)는 고조선시대에 시조(始祖)왕의 력사까지 있는 자랑스러운 왕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고씨네 조상들중에는 뛰여난 문인도 있고 임진왜란 때에 국병들을 거느리고 왜구를 물리친 장군도 있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고태령감’은 아들 둘 딸 하나, 자식을 모두 셋을 두었다. 지금도 한동네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 곁을 지키고 있는 맏아들은 요즘 자식들중에서 보기 드문 효자인 셈이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장가간 지 10여년 되였지만 ‘고태령감’한테 손주를 낳아주지 못하였다. 속이 탈 대로 탄 ‘고태령감’네 량주는 좋다는 방법은 다 써보게 하였고 입양문제도 여러번 입에 올리면서 큰아들네 부부와 다투기도 하였다.  그리고 딸 하나는 학교 때 공부는 비록 잘 못하였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 덕에 지금은 외국류학을 마치고 미국 ‘록색카드’까지 얻었다는 고중동창 신랑하고 귀여운 딸애까지 낳고 미국 로스안젤레스인가 하는 동네에서 잘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다 늙은 부모한테 ‘딸라’라는 미국돈을 부쳐온다고 몇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 자랑이 태산같았다. 하지만 ‘출가외인’이라고 딸이 낳은 외손녀는 여전히 성이 고씨가 아닌 외성이였다. 요즘처럼 의식주 근심 없이 살아갈 만한 세월에 ‘고태령감’ 량주한테는 딸라뭉치보다도 방치돌 같은 고씨네 대를 이을 손자가 더욱 갈망되였던 것이다.  아직도 한달에 한번씩 깊은 밤중에 국제전화로 여러가지 귀여움과 아양을 떨어대는 딸이였지만 ‘고태령감’은 차츰 딸에 대한 자랑이 사라져버렸다. 더구나 미국에서 돈 잘 벌면서 잘산다던 딸은 요즘 악물 같은 코로나 때문에 매일매일 속에 재가 들어앉을 지경으로 살아가는 셈이며 그렇게 오고 싶은 고향에도 도저히 올 수가 없다고 하면서 눈물까지 찔찔 짜대였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온 식구들을 데리고 중국에 와서 맘편히 살고 싶다고 하였다.

진짜로 크게 자랑을 할 만한 자식은 막내인 둘째아들이였다. 소학교 때부터 공부를 특별하게 잘해서 끝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장원’으로 중국 제일의 명문대에 입학하였으며 연구생공부까지 마친 후 수도 북경시에서도 알아준다는 가정의 외동딸 장단단이란 한족애와 결혼을 하였다. 비록 며느리가 타민족이였지만 ‘고태령감’ 량주는 그런 대로 수락해주었고 수도 북경  5성급 호텔의 으리으리한 결혼식장에도 함께 참석을 하였더랬다. 그런데 이듬해 작은 아들이 첫딸을 낳았는데 그때부터 ‘고태령감’은 속이 께름해지기 시작하였다. 바라던 손자가 아니라 손녀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손녀의 호적을 제 엄마인 며느리의 호구에다 올리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니까 외가집의 성을 따라 장계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며느리는 당당한 북경시의 토배기 호적인데 아들은 아직까지는 집체호구라고 그 원인을 설명하였지만 ‘고태령감’은 작은아들을 ‘등신’, ‘멍청이’라고 죽어라고 욕을 하였다. 그러는 아버지의 욕을 들으면서 전화통 저쪽에서 작은아들의 리해할 수가 없다는 듯한 한숨소리가 들려왔고 곁에서 천진스럽기까지 한 며느리의 깔깔깔 거리는 웃음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 후부터 ‘고태령감’은 둘째아들네의 자랑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격 좋은 며느리가 여러번 시부모들을 북경에 놀러오라고 간청을 하였지만 한번도 들어주지를 않았다. ‘멍청이’ 아들에 대한 무언의 징벌이라고 혼자 끙끙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고태령감’네는 이번에 큰 마음 먹고 북경행차를 하게 되였다. 석달 전에 기쁘게도 작은며느리가 방치돌 같은 손자를 낳았던 것이다. 고씨가문의 장손인 셈인 귀한 손자의 백날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촌사람들이라고 깔보는 눈치 하나도 없이 수도 북경의 사돈들은 ‘고태령감’네 량주를 깍듯이 존경하고 잘 대해주었다. 놀랍게도 성격 좋은 며느리는 제법 조선말로 “아버님, 어머님”하면서 살갑게 불러주었다. ‘고태령감’한테 제일 마음 뿌듯한 일은 방치돌 같은 손자가 제 애비를 너무도 많이 닮았다는 그 사실이였다. 애비를 많이 닮았다는 것은 할애비를 닮았다는 말과 같다. 제주고씨의 피줄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는 엄연한 증거인 셈이다. ‘고태령감’한테는 이것이 바로 로년의 천륜지락이였고 누군가가 ‘금산’을 안겨주는 것보다도 더욱 기쁜 일이였던 것이다.

멋들어지게 손자의 백일잔치를 치른 며칠 후 ‘고태령감’네 량주는 아들며느리의 덕분에 난생 처음으로 팔달령장성을 구경하게 되였다. 세상의 기적이라고도 할 만큼 웅위롭고 장엄하게 높은 산발을 타고 구불구불 뻗어올라간 만리장성을 두세시간도 넘게 톺아오르면서 ‘고태령감’은 힘드는 줄도 모르고 연신 감탄을 내질렀다. 그러면서 ‘고태령감’은 그날따라 많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였다.

드디여 팔달령장성의 제일 정상에 올랐을 때 문득 ‘고태령감’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로친한테 무엇인가를 불쑥 내밀어보이는 것이였다.  그것은 당당한 호주자리에 떳떳이 아들의 이름으로 올려진 짙은 갈색의 북경시 호구부였다.  호구부에는 갓 태여난 고씨네 장손의 이름도 똑똑히 ‘고장근(高长根)’이라 박혀있었다.

“어제 며느리가 나한테 가만히 보여줬어. 이제 집에 갈 때 갖고 가서 온 동네에 자랑을 해야겠다고 했어!”

‘고태령감’은 오랜만에 로친의 강마른 손을 꼭 잡아주었다. 주름투성이 눈확을 넘어서 두줄기의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시각, 웅위로운 만리장성의 정상 우에서 허리를 꿋꿋이 펴고 온 천하를 굽어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고태령감’은 여러해 동안 구겨져있던 마음이 활짝 열려진 듯싶었고 당장 훨훨 푸른 상공을 날아예는 심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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