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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병태에서의 하루밤 이야기

□ 장정일

  • 2012-12-11 13:52:33

우리 언론사에 큰획을 남긴 문필가 오태호선생이 애석하게도 향년 84세로 이달 6일 타계했다.

선생의 회고록 “불사른 청춘 후회없어라”의 한 단락이 생각난다. “량병태에서의 하루밤”이라는 그 한대목을 간추리면 이렇다……

1953년 12월 31일, 안도현 회재촌에서 사흘동안 취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량병태에서 하루밤 묵게 되였다.

촌간부들이 마련해준 집은 국수집 뒤방. 장판구들이 살아나 마치 부풀어오른 얼음강판같았다. 사람이 방 가운데 앉으면 불과 몇분사이에 방구석으로 미끄려져내렸다. 집 뒤문이 제대로 닫기지 않았다. 방구석 네모난 상을 방문에 세워놓았으나 바람받이로는 역부족.

뒤방에 손님이 든걸 잊은듯 주인은 이부자리를 주지 않았고 그믐날이라 손님이 뜸했던지 방은 랭돌. 나는 가방을 베개로 삼고 털모자를 눌러쓰고 솜저고리를 덮고 잠을 청했지만 온밤 두가지 역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나는 구들복판에서 미끄려져내려가면 다시 기여올라가는것, 다른 한가지는 털모자를 꽁꽁 눌러쓰고 솜저고리를 여미며 추위를 막는것. 잠못이루는 밤 하는수 없이 일어나 앉아서 날을 밝혔다. 1954년 원단의 새아침 기차를 타고 신문사에 무사귀환.

지금보면 자칫 바보스러운 얘기로 들릴 법도 하지만 회고록에서 선생은 그번 체험을 한낱 유쾌한 추억으로, 일종 자랑으로 썼다. 그만큼 그 시절 오선생과 허다한 기자들은 단순하고 순진했고 성실한 자세, 자기희생적인 정신으로 직책에 림했다는 얘기로 되겠다.

지금보면 이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같은 기상천외함으로 비쳐질수도 있지만 이 시각 나의 생각은 그게 아니다. 나는 그속에 숨어있는 상징적인 의미에 생각이 미치면서 감개가 무량하다.

우리는 항상 해빛찬연한 쾌청한 날이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실지는 찌뿌둥하게 흐린 날도 있고 사나운 광풍이 일거나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도 만난다. 우리는 보통 아늑한 방에서 진수성찬을 즐기기를 원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량병태 국수집 랭돌방처럼 적막한 외딴 방에서 뜬눈으로 지새기가 일쑤이다. 이어지는 정치운동의 먹구름이 드리웠던 시절은 더구나 그랬다. 《인생에 부치는 편지》 서문에서 선생은 이렇게 자탄한다.

“내가 만난 하나하나의 인생은 왜 그다지도 여유란것이 없이 딱하기만 했던지? 나는 자기의 삶에서 여유를 가져보려고 평생 몸부림쳐왔지만 여유란것이 무엇이길래 나의 삶에서는 종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냥 떠나버리기만 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밤을 지내고나면 해님이 웃어주는 새 아침을 만나게 마련이다.

“거친 인생살이에서 비록 좌절과 패배가 있다 하더라도 티끌 하나 부끄럼없이 고스란히 지조를 지켜나가는 맑고 깨끗한 량심이 더 고귀한 삶에 속하리라.” 이런 신조를 지키면서 선생은 장구한 세월 김시룡, 최죽송같은 농민으로부터 거물급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쟝르 기사를 폭넓게 다뤘으며 선각자의 예리한 식견으로 론설의 홰불을 지피면서 민족언론의 선두를 숨가쁘게 달려왔다.

리직후에도 “과거에 채 못뜬 인생의 눈을 더 크게 뜨고싶어” 병환의 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만나면서” 지칠줄 모르며 펴낸 신문학, 산문 관련 저서가 저그만치 10부, 년하 후배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드였다.

공담이나 팔고문의 구습은 정체를 불러오고 생기넘치는 해방된 문체는 사고와 창조를 낳는다. 요즘 당중앙정치국의 사업작풍개진 관련 규정을 접하면서도 나는 량병태 하루밤 이야기를 떠올린다. 시종 열린 사유로 보도가치, 진실성, 언어의 심층발굴을 력설하면서 고령에도 기층취재와 독자제일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하던 오태호선생의 로심초사하던 옛모습이 눈에 선해서 나는 이 시각도 절제를 모르고 텅빈 장황설을 늘어놓지 않는지 저어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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