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시대의 명멸과“고속”시대의 도래
[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칼럼시리즈-교통편 ]

2018-10-24 15:19:19

1978년 가을철의 어느날, 필자의 가정은 “새식구”를 맞았다. 필자와 동생이 월로임에서 얼마씩 떼내여 비축한 돈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새 자전거를 구입한 것이다. <백산표>28형 자전거였다. 18평방의 비좁은 방안에 들여다놓은 반짝반짝 윤택이 감도는 자전거를 둘러싸고 온 집안에는 웃음꽃이 만개했다. 일단 이튿날 시공안국 교통대에 달려가 자전거입적수속을 마치고 번호판을 받아왔다.

‘자전거왕국’ 중국에서 중요한 교통도구인 자전거가 집집마다의 ‘가보1호’로 추앙받던 세월이였다. 당연히 필자의 집에서도 매일 저녁이면 자전거가 숨막히는 방안에 비집고 들어와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하며 인간과 동등한 거주대우를 받았다. 그때 자전거 한대 가격이 100여원 정도였으니 40~50원 로임층에게는 자전거 한대를 갖춘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자전거상품권을 구하기 힘들어 자전거의 몸값은 인기절정이였다. 그만큼 자전거도난사건도 비일비재였다. 그 시절에 직장마다 사무실과 작업장 버금으로 자전거보관처가 우선시되는 건물로 자리매김하였고 거리의 상점과 공중기관 앞에는 무조건 자전거 보관대가 설치되여 전문관리인원이 유료봉사를 전담하였다. 자전거는 날따라 많아져 출퇴근시 공원다리와 하남다리는 수천대의 자전거로 복새통을 이뤘다. 자전거상품권이 해제되고 국민로임이 인상하면서 자전거구매력도 상승세를 탔다. 필자집에서도 자전거가 2대 더 늘어났다.

그 시절 자전거는 비단 출근족의 교통도구이면서 동시에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데려오는 유일한 “보모”였으며 사람이 들 수 없는 육중한 생활품들을 져나르는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는 “짐꾼”이였다. 그야말로 자전거를 떠나서는 촌보난행이였던 세월이였다. 자전거의 이같은 “력사적사명”은 국토 전반에서 꽤 오래 지속되였다. 오늘날 우리가 “자전거왕국”에서 “자가용차 왕국”으로 진입하면서 자전거가 더는 국민의 고된 삶의 포로가 아니라 한적하고 여유있는 삶의 동반자로 대접받는 모습에서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전거에서 자가용차 시대로의 전환은 20여년이란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다. 개혁개방의 마력 같은 힘이 20세기 국민의 “자전거 바퀴”를 21세기 국민의 “승용차바퀴”로 바꿔놓았다. 어림잡아도 오늘날 어지간한 젊은 부부들은 동승이 아닌 각자의 승용차를 몰고 지난날 자전거를 타듯 출퇴근 코스를 오가고 있다.

물론 자전거에서 승용차로의 과도기는 택시와 공공뻐스의 동참에 의한 대중교통수단의 눈부신 변화를 떠날수 없다. 80년대 초반 딱정벌레모양의 “비야터(比亚特)”로부터 아이들 부츠처럼 생긴 “쌰리(夏利)”를 거쳐 2000년대의 “제다(捷达)”,“현대(现代)” 차로의 교체와 갱신은 연변사람들의 소비수준 향상과 관념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풍향계라 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 100여명을 탑재하던 련결식 디젤유뻐스에서 80년대 후반에 깜쪽같이 등장한 900여대의 “쑈꿍궁(小公共)”,공공뻐스의 끊임없는 탈퇴환골을 거쳐 드디여 오늘날 200여대의 신에너지 공공뻐스가 시안의 곳곳을 누비면서 신에너지차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택시와 공공뻐스의 멋진 등장과 변신으로 자전거시대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자전거가 택시트렁크에 처박혀 승객과 함께 움직이는 희한한 광경이 자주 보인다 싶더니 아예 창고에 처박혀 “개밥의 도토리” 신세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연변사람들에게 기차는 페쇄된 고장에서 세상을 알게 한 유일한 안내자였다. 하지만 그 려정은 고달팠다. 북경을 가려해도 하루에 한번 뿐인 장도선(长图线) 만행 밤렬차를 타고 여덟시간 렬차 안에서 부대끼며 이튿날 새벽 장춘에 도착한 뒤 다시 북경행 렬차로 갈아타야 했다. 80년대 초반에 도문- 천진행 직통렬차가 생기면서 얼마 후 북경까지 직행할 수 있었으나 석탄을 때다 보니 수도의 환경오염문제에 걸려 북경시민들이 잠에 빠져있는 이른 새벽 녘에야 북경 남역으로 조심스레 “잠적”해 들어갈 수 있은 “천덕꾸러기”였다.

“하늘길”을 연다는 것은 연변사람들에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실현 불가능한 “꿈”이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에 힘입은 자치주 력대 지도자들의 정치혜안과 끈질긴 노력, 그리고 전 주 남녀 로소의 전대미문의 “사랑모금운동”으로 불가능하다 여겼던 “꿈” 이 서서히 현실로 다가왔다. 1985년 연길비행장의 건설과 더불 어 개통한 연길-장춘- 심양 항로와  1988년에 개통한 연길-북경항로는 연변사람들한테는 일대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안-24형 소형비행기만 착륙가능했던 공항시설은 허술하기 짝없었지만 길림성 두번째 민용비행장으로서 연변은 기막힌 력사의 장을 마련한 셈이였다. 이같은 시작이 있었기에 그 후의 멋진 변신이 이어질 수 있었다. 연길공항의 눈부신 변화는 연변 개혁개방의 산물이고 또한 두만강개발이라는 국가전략을 내적 동력으로 하고 있다. “연길공항의 확장개조가 없으면 연변의 개혁개방은 바랄 수 없다”는 명석한 사유에 힘입은 연변사람들의 이심전심의 노력이 있었기에 1993년부터 연길공항은 몇차례의 활주로와 려객터미널, 수화물처리시설 확장개조를 거쳐 한갈래 의 항로, 하나의 기종, 한번의 리착륙수가 오늘날 19갈래 국내외 항공선, 맥도, 보잉 등 10여개 기종, 일 평균 35개 항공선을 취급하는 국제항공으로 부상하였으며 지금은 “동북아 허브공항”으로의 발돋움을 위한 신공항이전건설을 서두르고 있다.

연길공항의 변신과 더불어 다가온 고속도로와 고속철의 “고속”시대 도래는 페쇄되였던 연변을 전방위적으로 세계와 접목시키면서 “연변을 세계로, 세계를 연변으로”라는 연변사람들의 거창한 꿈을 현실화 할 수 있게 한 가장 생동한 풍경이다.

땅길, 하늘길, 바다길이 다 열린 오늘, 우리는 참으로 꿈같은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자전거로 붐비던 하남다리, 공원다리는 각종 자가용 승용차와 택시, 신에너지뻐스들로 물결친다. 군용 전투기만 굉음을 토하며 날던 창공으로 대형려객기들이 거대한 동음을 뽑으며 간단없이 날아지난다. 석탄먼지를 흩날리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기관차 대신 고속렬차가 바람처럼 질주한다. 훈춘쪽에서는 출해를 앞둔 화물선의 고동소리가 우렁차다… 모든 변화는 이제 시작이고 진행중이다.

가끔 필자는 지난 세기 70년대 자전거 한대를 장만한 그 기쁨에 도취됐던 일을 떠올리며 이제는 자가용승용차도 그닥 시뜩해 않는 오늘의 연변사람들의 관념변화에 놀라울 뿐이다. 이제 무엇을 장만해야 직성이 풀릴가? 자가용 헬기? 아니면 저 동해바다에 나가 맘껏 즐길수 있는 자가용 호화보트? 누가 알랴, 그 꿈이 현실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지를.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