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원의 절개 □ 회 령

2022-05-23 09:25:12

단오가 다가오면 새삼스레 굴원을 생각하게 된다.

굴원은 기원전 초나라 사람으로 (기원전 340ㅡ278.5.5) 전국시대 중후기에 살았다. 굴원은 초나라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당시의 초나라 회왕과 한 가문이였다.

굴원은 어려서부터 매우 높은 정치적 재능을 보였는데 20여세에 벌써 좌도 벼슬에 올라 초회왕과 경상적으로 정사를 연구하고 법령을 제정했으며 각국의 사절을 접대하였다.

당시는 나라 사이에 서로 겸병하기 위한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으며 점점 더 치렬해져 갔다. 이런 상황에서 굴원은 초나라가 발전하려면 적극적으로 정치개혁을 진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부패하고또 완고한 귀족들의 강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들은 굴원의 재능을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그를 반대하였다.

한번은 초회왕이 굴원에게 중요한 법령을 기초하라고 하였다. 굴원이 초고를 금방 다 쓰자 상관대부 근상이 와서 초고를 보려고 하였다. 굴원은 재빨리 초고를 거두면서 보지 못하게 하였다.

근상은 창피하고 불쾌해서 곧바로 회왕에게로 가서 굴원을 무함하기 시작했다.

회왕은 근상 등의 무함을 그대로 믿고 분통이 상투밑까지 터져올랐다. 그후로부터 그는 굴원을 멀리하였다.

그후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련속 두번이나 얻어맞아 모욕을 당했다. 진소호왕이 즉위한 후 진나라는 초나라에 대하여 때리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어느날, 진소호왕은 매우 겸허한 태도로 초나라 회왕에게 서신을 보내여 진나라 무관에서 회담을 하자고 요청했다. 초회왕은 결정을 지을 수 없어서 대신들을 불러 의논을 하게 되였다.

토론에서 굴원은 “진나라는 호랑이와 같은 나라이고 침략이 성질로 된 신의가 없는 나라이다. 우리가 진나라의 모욕을 어디 한두번만 당했는가! 대왕께서는 절대로 가면 안된다. 가기만 하면 그들의 함정에 빠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초회왕의 아들인 자란은 “우리가 진나라와 맞서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땅을 잃었는가! 오늘 진나라가 우리와 화목하게 보내자고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는가!”하면서 꼭 가야 한다고 극력 주장했다.

초회왕은 아들 자란의 말을 믿고 진나라로 갔다.

초회왕이 진나라 무관에 도착하자 진나라에서는 즉시 군대로 그의 퇴로를 끊고 초회왕을 진나라 도성인 함양으로 압송해 갔다. 진나라는 초나라에 땅을 내놓으라고 핍박하였다. 초회왕이 응하지 않자 그를 연금해 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서야 초회왕은 굴원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으나 그것은 후회막급이였다. 1년 여의 시달림 끝에 초회왕은 진나라에서 객사를 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아비처럼 얼떨떨한 태자 횡을 왕으로 즉위시키고 국권은 공자 자란과 대부 근상이 틀어쥐고 마음대로 주물렀다. 나라가 점점 더 망태기로 되여가자 굴원은 우국 우민의 온갖 근심으로 속을 태웠다. 그는 여러번 왕에게 글을 올려 현인을 중용하고 내정을 혁신하며 군사를 훈련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의 글은 오히려 자란과 근상의 미움을 받아 굴원은 철직되고 초나라 남쪽 변강땅인 황량한 멱라강반에 추방되였다. 하지만 굴원은 왕이 다시 자기를 불러들여 나라를 구하게 하여줄 것을 애타게 고대하였다. 그러나 1년 또 1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류배지에서 굴원은 당지의 백성들과 친밀히 보내면서 그들의 비참한 처지를 몹시 동정하며 가슴 아파하였다. 어느날, 굴원이 멱라강변을 산보하면서 자기가 지은 비분강개한 시를 읊었는데 어떤 어부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워 하면서 물었다.

“어른께서는 3려대부 굴원이 아니신가요? 어찌하여 이런 처지가 되셨나요?”

“천하가 모두 혼탁하고 오직 나만 깨끗하니, 모두가 취해빠지고 오직 나만 말쑥하니….”

“왜서 그들과 섭쓸리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텐데!”

“깨끗한 옷을 누가 흙탕물에 더럽히려고 하리오. 강물에 뛰여들어 고기밥이 될지언정 간신들과 섭쓸려서 백성들과 초나라를 짓밟고는 싶지 않소!”

기원전 278년, 진나라대장 백기가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를 진공하였다. 초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하게 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굴원은 여러 날 대성통곡을 하다가 음력 5월 5일 큰돌을 안고 멱라강에 투신자살을 하였다. 그는 초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고 초나라 백성들이 무참히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은 당지의 백성들은 굴원의 시체를 건지려고 무진 노력을 다 했으나 끝내 그의 시체를 건지지 못했다. 사람들은 강에 쌀을 뿌려서 굴원의 제사를 지냈다.

이듬해 5월 5일, 굴원의 1주기 제사날이 되자 사람들은 또 강에 쌀을 뿌려 제사를 지내였다. 그것이 후에 단오절로 되고 종자(粽子)를 강에 뿌리는 풍속으로 되였다. 그리고 이날 룡주경기를 한다.

굴원은 우리 나라 전국시기 유명한 애국시인이였으며 정치가, 사상가였다.

굴원은 2300년 전의 사람이지만 그의 애국의 굳은 절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느낌을 주고 있다. 자고로 우리 나라에는 수많은 절세의 애국자들이 있었고 오늘도 수많은 애국자들이 용솟음쳐 나오고 있다.

  단오를 앞두고 굴원을 떠올리고 그의 굳은 절개를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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