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물-닐스 헨리크 아벨
가난한 천재의 수학에 대한 열정

2019-07-17 08:50:28

닐스 헨리크 아벨.


19세기 후반 프랑스 수학계를 이끌었던 에르미트는 '아벨이 남긴 업적으로 이제부터 수학자들은 500년 동안 바쁘게 지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닐스 헨리크 아벨은 1802년에 노르웨이에서 태여났다. 어머니는 상인 집안 출신으로 탁월한 미모를 가졌는데, 사교생활을 즐겼고 자식의 양육에는 무관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린 자식들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을 담당한 사람도 아버지였다.

아벨은 1815년에 크리스티아니아 성당학교에 진학했다. 1818년 새로운 수학 선생님으로 홀름보에가 부임했다. 홀름보에는 상당한 수학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벨에게 홀름보에와의 만남은 큰 행운이였다. 홀름보에는 아벨의 수학적 재능을 간파하고 아벨을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홀름보에는 아벨의 성적표에 “믿기 어려운 천재성으로 수학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관심과 열정을 하나로 묶어낸다. 앞으로 별탈이 없다면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이다.”고 적었다.

그러던중 아벨의 아버지가 1820년에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집안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나빠졌다. 홀름보에는 노르웨이 정부의 보조금을 얻어 아벨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아벨은 1821년에 왕립 프리데릭대학에 입학해 수학을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도 뛰여난 수학실력을 발휘해 입학한 지 1년 뒤인 1822년에 졸업장을 받았다.

아벨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는 5차 방정식의 해가 없다는 점을 증명한 것이 꼽힌다. 16세기 동안 이딸리아 수학자들을 중심으로 3차 방정식의 해법과 4차 방정식의 해법이 발견되였다. 그리고 수학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5차 혹은 그 이상의 차수 방정식에도 일반적인 해법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쏠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수학자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고 5차 방정식의 해법을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던중 19세에 불과했던 아벨이 한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1824년에 아벨은 《5차 방정식의 일반적 해법에 관해》라는 소책자를 썼다. 이 문건에서 그는 5차 이상의 고차 방정식의 일반적인 해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명쾌하게 증명했다. 이로써 5차 방정식의 해를 찾는 문제는 무려 250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아벨에 의해 해결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곧바로 아벨에게 명예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아벨의 소책자는 자비로 발간되였는데 당시에 아벨은 돈을 아끼느라 내용을 축약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아벨의 책자가 몇몇 수학자들에게 전해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아벨의 주장을 충분히 리해할 수 없었다.

아벨은 1825년에 노르웨이로 돌아온 후 유럽 대륙으로 류학을 가기 위해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익히면서 국비류학생을 신청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처음에 2년간 200스페시달러를 제안했다가 결국은 1년간 600스페시달러로 인상해주었다. 이러한 지원은 당시 노르웨이 정부의 재정적 형편으로는 획기적인 일이였다.

류학을 떠난 아벨은 베를린에서 크렐레를 만났다. 크렐레는 토목기사에서 시작해 철도 건설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사람으로 굉장한 수학애호가였다. 크렐레는 아벨이 말한 것을 모두 리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수학의 천재라는 점을 직감했다. 당시에 수학 전문 잡지를 발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크렐레는 아벨이 자신의 잡지에 기고하도록 권유했다. 1826년에 크렐레는 《순수 및 응용수학 저널》을 창간했는데 창간 첫해에 아벨은 7편의 론문을 게재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잡지는 수학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세계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평가되고 있다.

아벨은 1826년 7월에 프랑스로 건너가 르장드르, 코시, 아셰트 등과 같은 수학자들을 만났다. 그러나 프랑스의 수학자들이 아벨을 맞이한 태도는 독일의 경우와 무척 달랐다. 아벨이 입을 열려고 하면 곧 그들은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벨은 후날 ‘아벨의 정리’로 불린 타원함수에 관한 론문을 작성해 코시에게 보여주었지만 코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에 아벨은 페결핵 진단을 받았다. 아벨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프랑스 남부를 려행하는 길에 올랐다. 그러던중 1826년 10월 10일에 아셰트는 <어떤 종류의 매우 확장된 초월함수의 일반적 성질에 관한 론고>라는 아벨의 론문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했다. 그 론문에 대한 심사를 맡은 사람은 르장드르와 코시였다. 그런데 르장드르는 아벨의 론문을 리해하지 못했고, 코시는 론문을 집에 가져와서 내던져두고 말았다. 결국 아벨의 론문은 그가 죽은 후에야 다시 발굴되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아벨은 1829년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이틀 뒤, 베를린에 있는 크렐레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베를린대학이 아벨을 수학 교수로 임용했다는 소식이 담겨져있었다. 크렐레는 아벨에게 매우 좋은 소식을 전했지만 아벨에게는 그것이 너무 늦은 소식이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아벨의 은사인 홀름보에는 《아벨전집》의 초판을 편집해 제자의 무덤에 바쳤다.

아벨의 타원함수에 관한 론문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독일의 수학자 야코비 덕분이였다. 르장드르는 야코비에게 아벨의 론문에 대해 언급했고, 야코비는 1829년 3월 14일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벨씨의 발견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 무엇 때문에 2년 전에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보내진 론문이 당신들 동료의 주의를 끌지 않았을가요?” 이를 계기로 빠리에 체류중이던 노르웨이 령사는 잃어버린 원고에 대해 항의를 했고, 1830년에 코시는 집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아벨의 론문을 찾아냈다. 같은 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야코비와 함께 아벨에게도 수학 부문의 대상을 수여했다. 이후에 아벨의 론문은 또다시 분실되는 사태를 거쳐 1841년에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론집》에 게재될 수 있었다.

500크로네에 그려진 아벨의 초상.


아벨 우표.


아벨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1929년에 노르웨이 정부는 아벨에 대한 우표 4종을 발행했다. 이어 1978년-1985년에는 아벨이 500크로네 화페의 초상인물로 선정되였다. 아벨 탄생 200돐인 2002년에 노르웨이 정부는 아벨상을 제정해 수학에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이룬 학자에게 수여하기 시작했다. 아벨 상은 노르웨이 학술원이 매년 수상하며 상금은 600만크로네(약 92만 딸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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