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물-프리츠 하버
암모니아로 인류 구원한 독가스의 아버지

2019-08-28 08:44:11

빌헬름 카이저 연구소에서의 프리츠 하버(오른쪽).


프리츠 하버는 1868년, 현재 폴란드의 도시 브로츨라프에서 태여났다. 그의 집안은 유복한 유태인 집안이였고 아버지는 도시에서 잘 알려진 상인으로 염색약과 페인트, 그리고 제약 회사를 스스로 설립해서 재산을 많이 모았던 사람이였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여난 지 3주 후에 사망했다. 그는 고중 때부터 화학실험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아버지는 실험을 금지했지만 엄마를 잃은 조카를 불쌍하게 여긴 외삼촌이 자기 사업장의 사무실 한편을 내주어 실험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암모니아의 합성을 포함해 하버의 연구 결과는 산업에 적용되는 것이 많았다. 전기화학을 스스로 공부하여 연구한 하버는 그것을 화학 공정에 어떻게 적용할지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가스 반응을 물리화학적 관점에서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화학열력학 분야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했다.

화학 산업이 발달하면서 화학 반응을 실험하는 것에 연구비가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화학반응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화학반응에 따른 에너지의 방출과 흡수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출발한 열력학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화학의 한 분야로 등장했다. 하버는 화학 반응에서 평형을 다룰 때 사용되는 ‘르샤틀리에 원리(평형상태에 있는 화학반응이 압력, 온도, 반응물과 생성물의 량 등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는 원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를 암모니아 합성반응에 잘 적용시켰다. 하버가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도전했던 암모니아의 합성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그가 과학자로서 필요한 력량을 미리 갖추고 노력한 결과였다.

그 후 하버는 카를스루에대학 정교수로 임명되면서 물리화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의 책임을 맡게 되였다. 하버는 연구소의 책임을 맡으면서 뛰여난 젊은 과학자들을 연구진에 합류시켰다. 그리고 이들중에 암모니아 합성에 크게 기여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고압 장비 등을 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테크니션 키르헨바우어였고 다른 한명은 이미 암모니아에 대한 연구를 경험했던 영국 과학자 로시뇰이였다. 로시뇰은 하버와 함께 암모니아 합성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하버 공정의 특허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암모니아의 합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며 연구소의 결과를 산업화 시키는 과정까지 여러 면에 기여했다. 그가 1918년 노벨상에서 빠진 것은 많은 이들을 의아하게 했을 정도였다.

1904년, 하버는 기체반응의 물리화학을 리용해서 질소기체와 수소기체를 서로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만드는 연구를 시작했다.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만드는 화학식은 간단하다.

N2(가스) + 3H2(가스) ↔ 2NH3(가스)

그러나 실제 과정에는 난관이 많았다. 우선 질소분자와 수소분자의 강한 원자 결합을 깨야 했는데 이것은 온도를 높임으로써 가능했다. 또 이 반응은 높은 압력에서 더 잘 일어났다. 그런데 온도를 높이면 만들어진 암모니아가 다시 질소와 수소로 분해되였다. 낮은 온도에서는 아예 암모니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하버는 화학반응의 속도를 높이는 촉매를 사용해서 낮은 온도에서 반응을 일으킴으로써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버는 오스뮴과 우라늄을 촉매로 쓰고 압력을 잘 조절하면서 실험을 한 결과 특정한 온도와 고압(대략 200기압)에서 암모니아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1904년이였다.

그렇지만 하버의 공정은 대량생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촉매 오스뮴이 희귀 물질이였고 압력을 더 올릴 경우에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버는 다른 방법을 고안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이 방법의 개발을 자신이 자문을 하던 BASF사에 넘겼다. BASF에는 하버보다 먼저 질소고정 연구를 시작했던 카를 보슈가 있었는데 보슈는 수만번의 실험 끝에 1909년에 철과 특정 화합물로 이루어진 촉매를 찾았다. 이들은 당시 알려져있던 거의 모든 원소에 대해 촉매활성을 조사했다. 이 성과로 인해서 비료 같은 질소 화합물을 대기의 질소로부터 쉽게 얻어낼 수 있게 되였다. 이로써 농업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수억명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였다. 현재에도 세계 인구 절반을 위한 식량은 합성암모니아를 사용한 비료를 써서 만들어진다. 하버는 이 업적이 부각되면서 1910년에 명예로운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물리화학-전기화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고 1918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하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전쟁 연구에 뛰여들었다. 그의 과업은 염소가스 같은 치명적인 독성 가스를 개발하는 것이였다. 하버는 독성 가스의 농도와 흡입 시간의 곱이 일정하다는 규칙을 발견해서 이를 자신의 연구에 적용했다. 그는 1915년 4월 22일에 수천명의 병사가 사망했던 벨기에의 전투에서 자신이 개발한 염소가스를 련합군에게 사용하는 작전을 직접 이끌었다.

그는 “평화로운 시기에 과학자들은 세계에 속한다. 하지만 전쟁중에 그들은 그의 국가에 속한다.”고 했고 과학자가 전쟁중에 조국을 위해서 연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자신의 연구를 정당화했다.

하버의 부인이며 역시 화학자인 클라라 하버는 이런 남편을 강하게 비판했다. 하버는 1915년 4월 22일에 벨기에에서 수천명의 사망자를 낸 첫 독가스 공격을 마치고 귀가했는데 클라라 하버는 남편과 계속 다투다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안해를 아들에게 맡긴 채 하버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날 로씨야 전장으로 출발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하버는 정신적인 공황을 겪었고 유태인 탄압도 겪으면서 어려운 시기를 지내다가 65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68년, 카를스루에대학은 프리츠 하버의 탄생 100돐을 기념하는 기념식을 열었는데 학생들은 “살인자를 위한 행사. 하버는 가스전의 아버지다.”라며 항의했다. 하버의 유산은 현대 과학의 딜레마가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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