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물-마리 퀴리
방사성 원소를 최초로 발견한 녀성과학가

2019-09-11 09:01:38


마리 퀴리는 노벨상을 수상한 첫번째 녀성, 노벨상을 두번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 프랑스의 국가적 영웅이 안장되는 빠리의 팡테옹에 묻힌 첫번째 녀성.

마리 퀴리는 1867년 당시 로씨야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에서 태여났다.

당시 폴란드나 독일의 대학은 녀자대학생을 받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는 녀학생을 받았다. 마리는 자신이 일해서 모은 돈과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빠리류학을 갔다. 초기에 그녀는 바르샤바 근처에 있는 산업과 농업 박물관의 실험실에서 화학실험을 하면서 과학을 혼자 공부했다. 마리는 24살인 1891년에 프랑스 소르본대학에 입학했고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공부한 끝에 가장 뛰여난 성적으로 1893년에 소르본대학을 졸업했다.

리프만의 실험실에서 강철의 자성을 연구하기 시작한 마리는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를 알게 되였고 1895년에 결혼을 했다. 피에르는 마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사랑이였고 파트너였으며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과학연구의 동업자였다. 이들은 두 딸을 낳았고 그중 과학자가 된 이렌 퀴리는 나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된다.

1895년에 독일의 물리학자 렌트겐은 음극선 실험을 하다가 엑스선(X-ray)을 발견했고 1896년에 프랑스의 저명한 물리학자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엑스선과 비슷한 투과력을 갖는 광선이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광선은 태양 빛을 담고 있다가 이를 방출하는 형광 같은 것이 아니라 우라늄 자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마리 퀴리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가 발명했던 예민한 전압기를 리용해서 이 현상을 연구한 결과, 우라늄에서 나오는 광선이 우라늄 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라늄 원자 자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봐냈다. 원자가 안정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추측할 수 있었던 놀라운 실험적 발견이였다.

당시에는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것이 알려져있지 않아서 퀴리는 보호장비를 갖추지 못한 채로 위험한 실험을 오래동안 수행했다. 1898년에 마리 퀴리는 토륨이라는 원소 역시 방사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지만 이 발견의 우선권은 마리 퀴리보다 조금 먼저 결과를 발표한 독일 과학자 게르하르트 카를 슈미트에게 돌아갔다.

마리 퀴리가 이런 연구를 하는 동안에 남편 피에르는 점점 더 그녀의 작업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1898년 중엽에는 자신이 원래 하던 연구를 그만두고 그녀와의 협동 연구에 돌입했다. 1898년 7월에 퀴리 부부는 마리 퀴리의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붙인 폴로늄이라는 새로운 방사능 원소를 발견해서 이를 공표했고 공동론문을 발표했다. 1898년 12월 26일에 퀴리는 그들이 라듐이라고 이름 붙인 두번째 새로운 방사능 원소를 발표했다. 이들은 우라늄 광석인 피치블렌드에서 염화바륨에 섞여있는 형태로 미량의 염화라듐을 추출해냈다. 1910년에는 마리 퀴리가 염화라듐을 전기분해시켜서 금속 라듐을 얻었다. 또한 이들 부부는 ‘방사능’이라는 단어도 만들어냈다. 라듐은 우라늄에 비해 훨씬 강한 방사능 물질이였고 이 발견은 방사능 물질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새 방사능 원소들을 탐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으로 1903년 퀴리 부부는 베크렐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마리 퀴리는 첫번째 녀성 노벨상 수상자가 되였다.

제1차세계대전 기간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사용된 마리 퀴리의 엑스선 트럭.


마리 퀴리는 1900년에 에콜 노르말 쉬피리에르의 교수가 되였지만 이 대학의 실험실은 보잘것없었다. 노벨상을 받고 피에르 퀴리가 소르본대학의 리공학부 교수가 되면서 마리는 남편 실험실의 주임이 되여 본격적으로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였다. 1904년에 퀴리 부부는 둘째딸 이브를 낳았다. 그런데 그즈음 피에르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폭우 속에서 마차에 치여 즉사했다. 마리 퀴리는 남편의 죽음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소르본대학은 피에르를 위해 만들었던 교수직을 유지하고 그 자리를 마리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피에르에게 보내는 헌사로 세계 수준의 실험실을 만들기를 희망하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마리 퀴리는 빠리에서 첫번째 녀성 대학교수가 되였다.

1910년에 퀴리는 금속 라듐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1년 뒤인 1911년에 예기치 못한 스캔들이 터졌다. 마리 퀴리가 이전에 피에르의 제자였던 5세 년하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때 랑주뱅은 안해와 별거상태에 있었던 유부남이였다. 그럼에도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1911년에 라듐과 폴로늄의 발견 그리고 라듐의 분리에 대한 업적을 기려 마리 퀴리에게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시상했다. 이에 따라 퀴리는 두개의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과학자가 되였다. 이 노벨상에 힘 입어 그녀는 스캔들을 이겨내고 1914년에 소르본대학에 라듐연구소를 건립할 수 있었다. 또 이 업적을 기려 방사능 단위와 화학원소 퀴륨에 각각 퀴리의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됐다. 한편 마리 퀴리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와 그녀의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 역시 1953년에 인공 방사능을 발명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리 퀴리는 해부학을 공부해서 전장에서 엑스선을 리용해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일을 자원했다. 이런 활약은 프랑스 사회가 퀴리를 프랑스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프랑스의 시민으로 남아있는 동안에도 마리 퀴리는 폴란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딸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쳤다. 퀴리는 1934년에 66세의 나이로 프랑스에 있는 한 료양원에서 사망했다. 그녀의 사인은 방사능에 과다 로출되여 생긴 무형성 빈혈이였다.

퀴리는 남편 피에르가 안장되였던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이들의 유해는 60년 뒤인 1995년에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장된 팡테옹으로 옮겨졌다. 이에 따라 마리 퀴리는 자신의 업적으로 팡테옹에 매장되는 영광을 얻은 첫번째 녀성이 되였다. 그녀는 사망할 때까지 방사능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로출된 방사능의 량은 상당한 것이여서 지금도 그녀의 실험실 노트 같은 사료는 납으로 코팅한 보호복을 착용해야만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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