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인물-뤼미에르 형제
최초의 활동사진- 대중영화의 제작, 상영자

2019-09-24 14:53:04

영화를 대중화한 뤼미에르 형제. 왼쪽이 오귀스트, 오른쪽이 루이이다.


영화의 력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초창기였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다양한 과학기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등장했다. 영화도 그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과학자, 발명가, 사진가, 미술가들이 사진을 더욱 크고 활동적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세계 최초로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 공로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흥미롭게도 뤼미에르는 프랑스 말로 ‘빛’을 의미한다.

당시 사진술은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는 대학을 마친 후에 사진가인 아버지 앙투안의 연구를 도와 감광성이 뛰여난 젤라틴 감광액을 개발해 ‘블루 레이블’로 알려진 사진 건판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뤼미에르 가족은 1882년에 리옹의 몽플레지르에 있는 창고를 인수하여 건판 공장을 차렸다. 뤼미에르 가족의 건판 공장은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고용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당시의 활동사진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형 오귀스트는 활동사진을 대형 화면 우에서  보기 위해 필요한 장비로 긴 필림, 초당 최소한 16장 이상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고속 카메라, 필림을 카메라에 통과시키며 끌어내는 구동장치, 적절하게 작동하는 영사기, 그리고 사진을 대형 화면에 비추기 위한 렌즈와 광원을 꼽았다.

1894년 어느날, 동생 루이는 재봉틀을 돌리게 하는 노루발을 보고 필름을 일정하게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루이는 ‘시네마토그라프’라는 기계를 설계했다. 그것은 카메라인 동시에 영사기도 되는 기계로서 각 사진이 초당 16장의 속도로 화면에 비춰지도록 되여있었다. 1895년 2월 13일에는 뤼미에르 형제의 이름으로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가 등록되였다.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라는 단어도 시네마토그라프에서 비롯된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넘어섰다. 키네토스코프는 순간적인 영상을 틈이 난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장치였지만, 시네마토그라프는 필림을 련속적으로 영사하여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는 장치였다. 또한 키네토스코프의 경우에는 웬만한 방 하나는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야외촬영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에 반해 시네마토그라프는 이동이 가능한 크기를 가지고 있었고 전기가 없어도 수동으로 작동시킬 수 있어서 야외 촬영에도 적합했다. 더 나아가 키네토스코프로는 한 사람씩 영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반면, 시네마토그라프의 경우에는 많은 대중이 함께 영화를 관람할 수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부여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1895년 3월 19일에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를 설치하고 퇴근하는 로동자들을 찍었다. 세계 최초의 활동사진인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로동자들>이 촬영되는 순간이였다. 시간은 50초가 걸렸으며, 800개의 프레임이 소요되였다.

뤼미에르 가족은 활동사진이 큰 성공을 거둘 것으로 확신했다. 그들은 프랑스 산업발전협회로 가서 최초의 활동사진을 상영했고 사진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네마토그라프를 선보였다. 어떤 사람은 시네마토그라프를 보고 다음과 같이 감탄했다. “시네마토그라프에 비하면 앞서 나온 다른 기계들은 구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대단한 발명을 한 뤼미에르 형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후 뤼미에르 가족은 대중을 상대로 한 행사를 계획했다. 앙투안은 영화 상영에 장소를 제공한 건물 주인에게 총 관람료의 20%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건물 주인은 그 제안을 거절하면서 하루에 30프랑씩 지불하라고 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판단을 크게 후회했다.

최초의 대중영화로 평가되고 있는 <기차의 도착>(1895)의 한 장면.


세계 최초의 대중적인 영화는 1895년 12월 28일 오후 9시에 상영되였다. 그것이 바로 <기차의 도착>이다. 상영 시간은 3분, 입장료는 1프랑, 관객은 33명이였다. 첫 날에 올린 수입은 33프랑에 불과했지만 3주 뒤에는 하루 수입이 2000프랑을 넘어섰다.

관람객 중에는 당대의 유명한 마술사이자 사진사인 멜리에즈도 있었다. 그는 <기차의 도착>이라는 영화를 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처음에 정지화면을 보고 나는 옆 사람에게 설마 저런 사진을 보여주려고 한건 아니겠지요 하고 속삭였어요. 그때 말이 짐수레를 끌며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또 다른 기차들과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거리 전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어요.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거기에 앉아 있었지요.”

1895년에 발명된 시네마토그라프의 앞 모습.


시네마토그라프는 대성공이였다. 수많은 도시에서 수요가 비발쳤다. 몇년이 되지 않아 유럽은 물론 인도, 미국, 로씨야, 중국에까지 시네마토그라프가 진출했다.

1900년은 뤼미에르 형제에게 전환의 해였다. 그 해에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뤼미에르 형제는 초대형 스크린에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를 벌려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끝으로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 사업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사업가로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뤼미에르 형제의 판단이였던 모양이다.

1900년 이후에 뤼미에르 형제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루이는 영화에서 사진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1904년에 채색 사진용 건판을 발명하여 채색 사진의 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귀스트는 의학 공부에 매진해 결핵과 암을 연구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들은 1909년에 영화를 발명한 공로로 미국의 프랭클린 연구소가 수여하는 엘리엇 크레슨 메달을 수상했다.

20세기를 통하여 영화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영화는 무성영화였지만, 1927년부터 유성영화가 시작되였고, 1935년에는 채색 영화가 상영되였다. 1939년에 처음 개봉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범이 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영화산업은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모했으며 1970년대에는 생동감이 있는 특수 효과를 내기 위해 컴퓨터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화의 력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초창기였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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