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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혁명의지 미담으로 남은 손병문

  • 2018-05-17 07:36:22

[성도=신화통신] 한달전 의빈학원 기관 제1당총지부는 사천 의빈시 남계구 빈강로에 있는 주덕과 손병문 조각상을 찾아서 당활동의 날 주제행사를 전개하였다. 근 20명의 당원들이 이날 조각상을 첨앙하고 입당선서를 다시 되새겼다.

의빈시는 장강변두리 도시이다. 이곳 사람들은 영웅렬사를 손꼽을 때 언제나 주덕과 손병문에 대해 말한다. 한분은 몇년간 남계에서 생활한 사람이고 또 한분은 남계의 본토배기이다. 두 사람의 우의도 근대 혁명력사에 한단락의 미담으로 남아있다.

1885년, 손병문은 남계시교외 위가산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그는 줄곧 친척이 도와주어야 공부할수 있었기에 학습기회를 특별히 소중하게 여겼다. 1908년 손병문은 경사대학당(지금 북경대학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재학기간 손병문은 학습성적이 매우 우수하였을뿐만 아니라 또 자산계급민주혁명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혁명신념이 확고한 손병문은 붓을 창으로 삼아 국민혁명에 진력하였다. 그는 경상적으로 동맹회의 여러가지 회의에 참가하였고 선언, 문건 및 편지와 전보문을 썼으며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남북평화담판과 혁명이 실패한후 손병문은 "국민일보" 책임편집으로 추천, 임명되였다. 그의 문장은 예리하고 심오하였으며 선동성이 매우 풍부하여 독자들의 깊은 환영을 받았다. 후에는 나라정권을 찬탈하여 복벽하려는 원세개의 죄행을 꾸짖는 문장을 경상적으로 쓰고 게재한데서 북양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그는 하는수없이 안해를 데리고 고향 남계로 갔다.

남계로 간후 손병문은 "공부하여 나라를 구하고 교육으로 나라를 흥기시키겠다"는 생각을 갖고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여들었지만 여러가지 좌절을 겪으면서 웅대한 포부를 실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심심히 느끼였다. 1917년 손병문은 지인의 소개로 당시 운남군 장령 주덕을 알게 되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리상과 뜻이 같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모두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막역한 사이로 되였다. 1918년 손병문은 붓을 던지고 종군하기로 결심하였으며 주덕의 초청에 응해 주덕의 려단본부에 가서 군정사무보조관을 맡았다.

로씨야 10월혁명과 중국의 5.4운동이 폭발한후 손병문과 주덕은 함께 학습소조를 조직하고 혁명진보 서적과 간행물을 열독하고 소개하였으며 군벌에 의거해서는 나라의 정치를 진흥시킬수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자 당시 이미 부대를 떠났던 손병문은 그 소식을 듣고는 외국에 류학가서 구국구민의 진리를 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1922년 9월, 손병문과 주덕은 함께 대형 려객선에 올라 상해에서 프랑스 빠리로 갔다. 10월 하순, 두 사람은 베를린에서 직접 주은래를 만나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겠다고 말하였다. 주은래는 깊은 감동을 받고 두 사람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도록 소개하고 도와주었다. 이때로부터 손병문의 정치생명은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였다.

1925년, 5.30운동을 시작으로 대혁명의 고조가 일어났다. 혁명정세의 신속한 발전은 많은 혁명골간력량이 급히 수요되였고 중공중앙은 유럽에 있는 당원들이 귀국하여 혁명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해 가을, 손병문은 귀국하여 먼저 북경에 도착하였고 년말에 혁명의 중심인 광주로 가서 국민혁명군 정치부 비서, 황포군관학교와 광동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담임하였다.

1926년 6월, 손병문은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비서장으로 부임했고 주은래, 곽말약, 등연달 등과 밀접한 업무관계를 가졌다. 그해 7월, 북벌전쟁이 시작된후 그는 국민혁명군 총정치부 후방 잔류사무소 주임직을 담임하면서 한편으로는 광동, 광서 및 복건남부의 사업을 책임지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비, 총기, 의약 준비와 전투인력 보완, 골간훈련 사업을 맡았다.

1927년 봄, 장개석이 반공의 보조를 다그치고 반혁명정변을 음모, 발동하였다. 4월 6일, 손병문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연설을 발표해 그들의 음모를 단호히 폭로하였다. 4월 16일, 손병문은 업무관계로 상해를 거쳐 무한으로 갈 때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였다. 적들은 높은 직위와 후한 봉록으로 손병문을 유인하였지만 그의 호된 꾸짖음과 엄정한 거절을 당했다. 4월 20일, 손병문은 상해 룡화에서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당시 그는 42세밖에 안되였다.

손병문이 살해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주덕은 매우 비통해하였다. 1945년 제7차 당대회가 열리는 기간 주덕은 손병문을 기념하는 글을 직접 썼으며 "혁명의지가 견강한" "무산계급의 전사"라고 그를 칭찬하였다.

"적에 대해서는 원쑤처럼 여기고 한시바삐 소멸하려는 절개를 가져야 하고 동지에 대해서는 극진히 돌보고 친형제와도 같은 감정을 가져야 한다." 확고한 혁명의지와 고상한 품격은 후세들로 하여금 손병문렬사를 영원히 가슴속에 새기게 한다. 고향 남계구의 홍색관광전망계획에 따르면 손병문기념관이 새로 건설중이며 2020년에 준공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주덕생가진렬관, 주덕기념관 등과 함께 시민들에게 개방할것이고 관광객들이 찾아와 첨앙할것이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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