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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해 영용히 희생된 혁명부부 전파양과 진창보

  • 2018-05-28 07:30:54

[장사=신화통신] 늦은 봄날 초록빛이 무르익는 가운데 여름 기분이 한결 짙어가고 있다. 기자는 비할바없이 숭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호남 류양시 북성진 천수촌을 찾아 전파양, 진창보 렬사묘지를 참배했다.

전파양, 진창보 렬사묘지는 남에서 북향으로 되였는데 앞에 사다리가 있고 좌우 량측에는 측백나무를 심었으며 중간에 제단이 있고 그 뒤에는 무덤이 있었는데 부지면적은 약 300평방메터였다. 한가운데 묘비에는 렬사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박혀 있고 묘비 왼쪽아래에는 "전파양부부 영생불멸하리"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북성진 당위 서기 리빈은 "전파양, 진창보 동지가 우리를 떠난지 어언간 9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그들은 수천만명 혁명선렬들과 마찬가지로 고향인민들의 깊은 숭경과 끝없는 그리움을 받고 있으며 후세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계속 개척전진하도록 격려하고있다"고 말했다.

전파양은 1904년 3월에 출생하였으며 호남 류양사람이다. 어릴적에 장사에서 공부할때 곽량, 하희, 하명한 등 진보적인 청년들과 사귀였으며 1921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23년 5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뒤 전파양은 련이어 호남 장사 상구중국사회주의청년단위원회 학생위원회 위원, 호남성학생련합회 총무위원, 전국학생련합회 상무위원으로 추대되여 호남과 장사 등 지의 학생운동에 대한 령도와 조직에 참여했다. 1925년 여름 북경중국대학에 입학했고 1926년 3월에 퇴학하여 장사로 돌아와 교원 신분의 엄호하에 로동자 농민 군중과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북벌전쟁을 지원하였다.

1926년 6월부터 전파양은 선후로 공청단호남성위 선전부장, 공청단성위 서기직을 담임하였다. 1927년 무한에 가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발언하여 모택동, 채화삼, 구추백 등 사람들의 정확한 의견을 지지하고 우경기회주의의 착오를 비판하였으며 국민당 새군벌의 학살정책에 반항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진창보, 녀, 1905년 6월 출생하였으며 호남 류양사람이다. 1921년 전파양과 결혼하였다. 1923년 장사에 가 학문을 닦고 얼마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다. 1927년 봄, 공청단호남성위 련락원직을 맡고 전파양의 사업을 협력하였다. 이들 부부는 "생황에서 친밀한 반려이고 사업에서 혁명적인 동지이며 투쟁에서 참된 전우"로 불리웠다.

1927년 5월 21일, 국민당 반동장교 허극상이 혁명을 배반하고 "마일사변"을 일으켜 호남이 백색테로속에 빠졌다. 국민당 새군벌의 대학살에 반항하기 위하여 전파양은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중국공산당 제5차 대표대회가 끝나자 즉시 무한으로부터 장사에 돌아와 반항투쟁을 조직 전개하였다.

5월 30일 저녁, 반역자의 밀고로 전파양, 진창보 부부 등 8명의 동지들이 체포되였다. 적들은 전파양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대나무 꼬챙이로 그의 열손가락을 찌르고 나무 막대기로 그의 두 다리를 눌러 끊어놓으면서 그더러 자수하여 당의 비밀을 말하라고 핍박하였다. 일곱낮과 일곱밤의 생사를 오가는 학대와 시달림속에서도 전파양은 "머리를 자르고 피를 흘릴수있어도 뜻은 굽힐 수 없다!", "내가 가는 길은 광명정대하기에 후회와 뉘우칠 필요가 없다!"면서 시종 떳떳했으며 굴복하지 않았다.

적들은 또 진창보를 고문하고 괴롭히면서 부부정과 생사리별로 이들을 협박하고 동요시키려고 망녕되게 시도였으며 진창보더러 전파양을 대신해 자수서에 싸인 하라고 강요했다. 진창보는 "나는 그를 대신해 죽을 수는 있어도 절대로 그를 대신해 당을 배반할 수 없으며 공산주의자들을 다 죽일 수 없으며 피값은 반드시 갚고야 말 것이다!"라고 적들에게 당당하게 대답했다.

전파양과 진창보 이 젊은 혁명부부는 삶과 죽음의 시련속에서 공산당원의 혁명과 리상을 위하여 죽음을 초개같이 여기는 호연정기를 보여주었다.  1927년 6월 6일 새벽, 잔폭한 적들은 이 젊은 혁명부부를 총살하였다. 전파양이 희생될 때 나이는 겨우 23세였으며 진창보는 22세였고 임신중이였다.

류양문사연구자 감무에 따르면 전파양과 진창보가 정의를 위해 영용히 희생된후 중공호남림시성위의 동지들과 그들의 친척들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 두사람의 유체를 거두어 류양으로 운반하여 영웅렬사의 고향 북성진의 한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안치하였다.

전파양, 진창보 렬사가 희생된지 9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당시 편벽하고 락후하던 고향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최근년간 람사과학기술, 염진점포 등 유명한 기업, 상장회사들이 류양경제개발구 북성지역에 정착하였다. 리빈은 "우리는 한창 단지와 진의 융합 및 향촌진흥을 주공방향으로 생산지와 도시의 융합전략, 도시와 농촌의 일체화전략, 민풍순박화전략을 중점적으로 실시하여 류양 금양신도시 부중심을 힘써 구축함으로써 산업이 더욱 강대하고 향촌이 더욱 아름다우며 민풍이 더욱 순박하고 생활이 더욱 행복한 새로운 북성을 건설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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