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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조세염

  • 2018-05-30 07:34:34

“룡화에서 목숨 바쳐 단심을 보여주고, 호기는 무지개와도 같이 고금에 빛나네, 천그루 복숭아꽃은 푸른 피로 모여, 로동자들 자손만대 시영을 우러르네.”<조세염>라는 시에서 로세대 무산계급혁명가 오옥장은 우리 나라 유명한 로동자운동의 지도자 조세염동지를 이같이 높이 평가하였다. ‘시영’은 조세염이 당과 공회 간행물에 문장을 발표할 때 사용했던 필명이다.

1901년 조세염은 사천 유양(지금의 중경시에 속함)에서 태여났다. 조세염의 아버지는 그 시대 세태의 염량을 느끼고 작은 아들은 불덩이처럼 이 세상을 비추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그의 이름을 ‘세염’이라고 지었다.

1915년 조세염은 북경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신문화운동이 들끓던 시기 진독수가 주관한 《신청년》의 영향을 받아 조세염은 신문화운동에 뛰여들었고 리대소 등 사람들을 알게 되였다. 1919년 리대소의 소개로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고 5.4애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평민주간》, 《소년》 반월간과 《고학》 반월간 등 진보적인 간행물에 참여하여 반제반봉건사상을 선전하였다.

1920년 5월, 조세염은 프랑스에 가 고학을 하였다. 1921년 봄 장신부, 주은래 등과 함께 프랑스 중국공산당 조기조직을 발기, 건립하고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다. 1922년 주은래 등과 함께 유럽 중국소년공산당을 발기, 건립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서기를 담임했으며 그후 또 중공 유럽총지부 위원과 중공 프랑스조직 서기를 담임했다. 1923년 조세염과 진연년, 왕약비 등은 한패의 청년들을 거느리고 모스크바 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가 학습하였다.

1924년, 조세염은 귀국하여 사업하면서 선후로 중공북경지방집행위원회 위원장, 중공북방구집행위원회 선전부 부장 겸 종업원운동위원회 주임을 담임하고 리대소를 협조하여 북방 여러 성의 투쟁을 령도하였다.

1926년 3월, 조세염은 광주에서 열린 제3차 전국로동자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회의 후 당중앙은 조세염을 중공강절구위원회 조직부 부장, 상해총공회 중국공산당과 공청단 서기 겸 강절구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조세염은 ‘시영’이라는 가명으로 상해에 가 로동자와 군중들속에 심입하여 사회 각 분야 군중들에게 5.30정신을 발양하고 련합하며 혁명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제국주의의 학살과 진공에 맞설 것을 호소하였다. 중공강절구위의 령도와 조직하에 1926년 6월부터 9월까지 상해 각 분야 로동자들의 파업투쟁이 여기저기에서 련이어 일어났으며 성세호대하고 조직있는 로동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형성하였다.

1926년 10월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하면서 혁명형세가 진일보 발전하였다. 하지만 시기가 성숙되지 못해 상해로동자들의 제1, 2차 무장봉기는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27년 3월 21일 상해로동자들은 제3차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무장봉기에서 조세염은 몸소 병사들의 앞장에 서 용감히 적진에 뛰여들었다. 30여시간의 격전을 거쳐 봉기대오는 군벌부대를 물리쳤다. 이는 대혁명시기 중국로동자운동에서의 한차례 장거이며 북벌군의 강절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반혁명정변을 발동하였으며 대대적으로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군중들을 학살하였다. 준엄한 백색테로에 직면하여 조세염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공산당은 바로 전투의 당이다… 당이 생존하는 한 전투도 반드시 계속되여야 한다. 투쟁에 참가하려 하지 않는다면 어찌 공산당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고 단호히 말했다.

반역자의 배반으로 1927년 7월 2일 조세염은 불행하게도 체포되였다. 그는 갖은 혹형과 시달림 속에서도 시종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적들의 감옥과 법정을 강단으로 삼아 당의 주장과 공산주의리상을 당당하게 선전하고 반동파들의 죄행을 폭로하였다. 그는 격앙되여 "지사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혁명의 씨앗은 이미 중국의 곳곳에 뿌려졌고 반드시 건실하게 자라날 것이며 공산당은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이다."고 말했다. 7월 19일, 조세염은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그는 26세의 청춘과 뜨거운 피를 혁명사업에 헌신하였다.

조세염이 희생된 후 많은 가족 성원들이 선후하여 혁명의 길에 올랐으며 또 어떤 사람은 신앙을 위해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조세염의 손자 조신염은 "선배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고 자신의 리상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였다"고 말했다.

렬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신앙의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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