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부부의 피눈물 유서 세상을 감동시켰다-진각과 조운소

2018-07-12 09:12:18

피눈물 나는 유서 두장으로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진 혁명적 부부가 있다. 그들의 유서는 한세대 또 한세대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유서중 하나는 남편이 죽기전에 안해에게 쓴 리별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안해가 금방 태여난 딸애에게 남긴 것이다. 이 두개 유서의 필자는 각각 진각과 조운소이다.

진각은 원명이 진병상이며 1907년에 호남 예릉에서 출생했다. 15살 나던 해에 진각은 우수한 성적으로 예릉 현립중학교에 입학했고 진보적 사상을 가진 선생님의 영향하에 《향도》, 《신청년》 등 혁명간행물을 적극 열독했다. 1925년에 진각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조운소는 원명이 조봉배이며 하북 부평사람이다. 1906년에 출생하였고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5년, 조운소와 진각은 첫패의 선진적 중국청년으로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가서 공부했다. 학습기간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였으며 나중에 부부가 되였다.

1927년, 조운소와 진각은 함께 혁명에 참가했다. 1928년 봄, 진각은 성당위 특파원의 신분으로 중공 호남성 동부특별위원회와 예릉현당위에서 조직한 “예릉년말폭동”에 참가하였고 폭동을 지휘하였다.

당지의 각급 당조직이 엄중하게 파괴되자 진각부부는 부득불 예릉을 떠나 성당위 기관으로 돌아갔다. 그후 진각은 상덕으로 파견되여 호남성 서부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그당시 조운소는 임신한 몸이라 성당위 기관에 남아서 각지와의 련락사업을 책임졌다.

1928년 4월, 반역자의 밀고로 진각, 조운소는 상덕, 장사에서 각각 적들에게 체포되였고 장사 륙군감옥에 갇혔다.

반동당국의 위협과 회유, 모진 고문앞에서 진각부부는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았다. 여러번 심문을 해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반동당국은 “폭동을 획책하고 반란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진각, 조운소를 사형에 처했다.

진각은 죽기전에 안해에게 쓴 리별편지에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운! 누구인들 부모가 없고 누구인들 자식이 없고 누구인들 사랑하는 사람이 없겠소. 우리는 전 중국인민의 부모와 안해, 자식들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있소. 오늘 비록 우리는 죽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유지를 반드시 완성할것이요.”

1928년 10월 14일, 진각은 장사에서 희생되였다.

4개월 후 조운소는 감옥에서 녀자애를 낳았다. 어둠속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그녀는 딸애의 이름을 계명이라고 지었다. 딸을 낳은지 한달이 좀 지나 조운소는 딸의 곁을 영영 떠나야 했다. 그는 딸에게 쓴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나의 귀염둥이야, 너에게 똑똑히 알려주지만 너의 부모는 공산당원이였다…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워주지는 못하지만 네가 커서 공부를 잘하기 바란다. 그리고 너의 부모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훌륭하게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해야 한다.” 1929년 3월 26일, 포대기속에 있는 딸에게 마지막으로 젖을 먹인후 조운소는 결연히 사형장으로 나갔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23살밖에 안되였다.

진각의 고향에 가면 예릉시렬사릉원에 이 혁명부부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은 부부가 서로 의지해 서서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예릉시렬사릉원 관리소 부소장 양운지는 기자에게 지난해 청명을 앞두고 당지 강만소학교의 학생들이 두 렬사의 조각상 앞에서 그들의 유서를 읽었다며 “평화시대에서 살고 있지만 두 렬사의 유서에서 보여준 가정과 나라에 대한 사랑, 당에 대한 신앙과 혁명사업을 위해 몸바친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들을 감동시켰다”고 말했다. 신화통신

  •  
  • 많이 본 기사
  • 종합
  • 스포츠
  • 경제
  • 사회

주소:중국 길림성 연길시 신화가 2호 (中国 吉林省 延吉市 新华街 2号)

신고 및 련락 전화번호: 0433-2513100  |   Email: webmaster@iybrb.com

吉ICP备09000490号 | 吉新出网备字005号 | Copyright © 2007-2017

吉公网安备 22240102000014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