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를 위해 끝까지 분투한 류평해

2018-08-23 08:42:55

혁명의 선구자 류평해가 출생한 이량현은 산이 높고 길이 험한 오몽산구에 위치해있다. 이곳은 이름 높은 로혁명근거지로 사천, 운남, 귀주 변경구역 홍군유격종대의 혁명근거지이기도 하다. 이량현성에서 류평해라는 이름만 들어도 많은 백성들은 “오몽산구 인민들의 자랑스러운 영웅이다.”고 말한다.

류평해는 자가 리단이며 류소유라고도 불렀다. 1902년 10월, 운남성 이량현 각규진(지금의 이량현성)에서 태여났으며 7살에 개인서당에서 책을 읽었고 1917년에 곤명성립1중에서 공부했다. 사상이 활약적이고 신생사물을 잘 접수하였던 그는 성립1중에서 맑스주의사상의 영향을 비교적 빨리 받은 학생이였다.

1919년, 5.4운동의 폭풍이 전국을 휩쓸 때 류평해는 곤명에서 “운남학생애국회”에 참가했고 학생운동에서 선두에 서서 북경학생들의 애국민주운동을 성원했다.

1922년 5월, 류평해는 학문을 탐구하러 북경으로 갔다. 리대소, 등중하 등 혁명선구자들의 인도하에 그는 맑스주의리론을 힘써 학습하고 반제애국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여들었다. 192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경한철도 로동자대파업에 참가하였고 장신점서 등중하를 도와 선전사업을 했다. 1924년 가을, 류평해는 중공 북방위원회와 리대소의 파견을 받고 하남 신양에 가서 로동자운동과 당의 사업에 종사했으며 선후로 중공 신양지방집행위원회 서기, 중공 하남-섬서지구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하고 백색테로가 뒤덮인 심각한 시각에 류평해는 중공 남경지방위원회 서기로 임명받았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들과 견결히 투쟁하였으며 후에 상해 호동구위 서기, 갑북구위 서기로 전근했다.

1928년 5월, 중공중앙은 류평해를 중공 호북성위 림서서기로 임명하여 적들의 파괴를 받은 호북당조직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형세가 아주 심각한 상황에서 일련의 과단한 조치를 강구해 당조직이 더욱 큰 손실을 받지 않게 하였고 당조직을 점차 회복시켰다. 1928년 말, 류평해는 중앙위원회의 파견을 받고 특파원의 신분으로 사각재와 함께 동북으로 갔다. 중공 만주 림시성위가 설립된 후 류평해는 성당위 서기 겸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얼마후 또 중공 제4기 만주성위 상무위원, 성당위 대리서기를 맡았다.

1929년 가을, 류평해는 사업수요로 운남에 갔고 1930년 봄에 중공 운남성위 상무위원, 조직부 부장을 맡았으며 성당위 서기가 운남 남부에서 가서 사업하는 동안 성당위의 일상사무를 책임졌다.

1930년 5월 5일, 적들의 대수배를 할 때 류평해는 성당위의 기밀문건을 보호하고 관련 동지들의 이동을 배치하다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그는 적들의 회유를 완곡히 거절하였고 적들의 잔인한 혹형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당의 비밀을 엄격히 지켰다. 끝까지 고집하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적들의 위협에도 류평해는 “대장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위협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류평해는 감옥을 새로운 전쟁터로 삼고 감옥의 전우들이 혁명적 기개를 유지하도록 고무격려해주었고 그들에게 맑스주의리론과 혁명투쟁경험을 가르쳤다. 감옥에서 안해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당의 사업과 인민의 해방을 위한 죽음이라면 나는 달갑게 여긴다. 공산주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고 끝까지 분투해야 한다.”고 격려해주었다.

1930년 7월 26일, 류평해는 28살 나이에 영용하게 희생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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