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의 시련을 이겨낸 리운생

2018-11-13 08:49:45

1932년 6월 8일, 중공남경특별위원회 서기 리운생이 우화대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적들이 그에게 “할 말이 없는가?”고 묻자 그는 “친인들이 너희들과 끝까지 투쟁하기만을 갈망한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산동성 동영시 광요현 대왕진 서리촌 문화원안에 있는 리운생 사적진렬실에는 그의 생전 사적과 위대한 공적, 혁명정신이 전시되여있으며 이는 광요혁명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리운생 사적진렬실은 동영시의 첫 렬사사적 주제관으로서 오늘날 광범한 당원간부와 군중들이 당의 력사와 애국주의교육을 받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되여 각계의 호평을 받고 있다.

리운생은 1905년에 서리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왔으며 품행이 좋고 학문이 뛰여났다. 1919년 봄, 우수한 성적으로 산동성립 청주제10중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5.4’운동이 폭발하였으며 리운생은 진보적인 사생들의 인도하에 애국열정으로 들끓어 거리에 뛰쳐나가 청주 각계 인사들이 조직한 만인대회와 시위행진에 참가했다.

1923년 10월, 리운생은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24년 2월 왕진미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6년 2월, 리운생은 중공 산동지방위원회에 전근되여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1926년말, 북벌전쟁의 수요에 의해 중공중앙은 각지에서 많은 우수한 간부들을 선발하여 무한에 파견하였다. 1927년 1월, 리운생은 무한으로 가서 중공 무한교구특구 구위 서기직을 맡았다. 대혁명이 실패한 후 리운생은 중공 무창시위 서기직을 맡고 지하투쟁으로 넘어가 사업을 견지했다. 1928년 봄, 리운생은 중공 남경시위로 전근하여 리립장으로 개명하고 사업하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반동당국에게 ‘공산당 혐의범’으로 10개월간 갇혀있다가 석방되였다. 출옥 후 당조직에서는 그를 경호선 철도로동자로 전근시켰다.

1931년 2월, 리운생은 중공 강소성위의 파견으로 남경에 가서 시당위를 재구성하였다. 그는 리척진이라고 이름을 고친 후 남경시당위 부서기 겸 조직부 부장직을 맡고 중학교 교원 신분으로 당원을 발전시키고 당조직을 재건설하였다. 1931년말에 중공 강소성위의 결정으로 남경특별위원회가 설립되였고 리운생은 특별위원회 서기직을 맡고 남경 및 부근 지역 각 현의 당사업과 무장사업을 책임졌다.

1932년초, 반역자의 밀고로 남경당조직은 또 한번 엄중하게 파괴되였고 리운생은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적들이 그를 백방으로 회유하고 혹독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당의 비밀을 말하라고 하면서 “지금 당신 앞에는 두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사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는 길이다. 당신이 전향하겠다고만 하면 살 수 있다.”고 위협했다. 리운생은 “공산주의자는 무산대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며 이는 나의 분투목표이다. 전향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장개석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인민과 맞서 싸우는 너희들이다.”고 엄하게 꾸짖었다.

리운생은 감옥에 있는 전우들에게 “인민을 위해서라면 목이 떨어지고 피를 흘릴지라도 의지를 굽히지 않겠다.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시련을 이겨낼 것이다.”고 말했다.

그해 6월 8일, 리운생은 우화대 사형장으로 끌려가서 살해당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27살밖에 안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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