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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신골이 낳은 영재들

—김원범

  • 2007-09-26 20:19:34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에서 차를 타고 약 40분쯤 가게 되면 내 고향 룡정시 덕신향에 이른다.

향간에서는 내 고향 덕신향을 <팔도하자(八道河子)라고 부른다. 언제부터인지는 딱히 몰라고 여덟갈래 골짜기에서 흘러내려 한곬으로 흐르는 물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6200여명의 인구(한족을 포함)에 경작지가 3700여 헥타르 되는 덕신향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자그마한 시골향이다.

우리 조상들이 개척한 이 땅은 살기좋은 고장이다. 이전부터 조, 옥수수, 콩, 수수 등 곡식이 매우 잘 되는 고장이라고 소문이 났다. 특히 콩은 과거에는 대량으로 일본 등 나라에 수출되였고 잎담배는 질이 좋아 중앙급 신문에 보도되였으며 지난 세기 50년대말 중앙기록영화촬영소에서 기록영화를 찍어 전국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연변에서는 과거나 지금이나 덕신의 남새를 알아준다. 김장철이 되면 도시의 주민들은 덕신의 고추, 마늘, 감자, 무우 등 남새가 시장에서 들어오기 바쁘게 사기 위해 아침부터 서둔다.

광복전 남먼저 마을마다 사립학교를 세우고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지극한 열성을 몰부었다. 교원들은 대부분 도꾜나 서울의 명문대 졸업생들로서 수준이 매우 높았다. 1945년 9월 석문출신의 유지 림현순의 발기로 덕신사립중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 기초를 닦았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전후 작은 이 시골향에서 많은 항일투사와 해방군전사들은 물론 고위급 지도자와 군사장령, 교육, 문화, 예술, 과학, 체육 등 분야의 인재들이 배출되였다. 덕신사람들은 일제와의 싸움에서 언제나 앞장섰다. 항일전쟁시기 유명했던 <연길작탄>도 덕신의 금곡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가짜 관속에 총과 폭발물을 감추고 간도성에서 제일 드센 남양경찰소를 습격한 항일투사들의 용맹하고도 슬기로운 전설도 바로 덕신골에서 나왔다.

1974년 11월말 필자는 평양에서 한달간 체류하는 기간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정치국 위원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으로 있던 한익수상장(덕신 룡암촌 출신)의 저택에서 한익수장군으로부터 항일투사들의 무용담을 밤새도록 들었다. 그때를 회억하면서 한익수장군으로부터 항일투사들의 무용담을 밤새도록 들었다. 그때를 회억하면서 한익수장군은 <금곡, 자동(개산툰), 룡암 등 곳에서 항일투사들이 많이 싸웠다. 자그마한 시골 팔도하자에 항일투사들이 제일 많았다. 지금 살아있는 항일간부들 가운데 덕신출신의 고위급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필자가 룡정시민정국을 통해 알아본데 의하면 룡정시 렬사 725명 가운데 덕신출신의 렬사가 97명, 참전용사가 274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고위급 지도간부와 군사장령 여러 명이 배출되였다. 교육분야에서도 많은 인재와 교수와 박사들이 배출되였다. 연변대학에만도 교수 10명, 연변농학원과 연변의학원에도 7명이나 있다. 초보적인 조사수치에 의하더라도 약 100명이 넘는다.

문화예술분야에서 배출된 인재들도 많다. 소설가 림원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그리고 사람들이 애창하는 《백산의 붉은 꽃》, 《수양버들》 등 노래의 작곡자 허원식선생도 덕신 숭민촌 출신이다. 덕신향에는 아나운서도 적지 않게 배출되였다. 지난세기 60년대중반까지 연변인민방송국의 50%방송은 덕신에서 나온 방송원들이 담당하다싶이 했다. 당시 아나운서는 8명이였다. 석문출신인 김창림아나운서, 역시 석문출신인 윤봉현아나운서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방송원으로 있다가 국제방송국에 전근되였고 장동출신인 최정자 등 방송원들도 쟁쟁하고 맑은 목소리고 사람들의 심금을 사로잡았다.

덕신향에는 과학자들과 로력모범도 적지 않게 배출되였다. 우리 나라 첫 인공위성 발사실험성공에 크게 기여한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덕신 석문촌 출신의 김민달연구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소학교때는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 소학교를 4년에 끝냈다. 1965년 길림대학 수학학부를 졸업하고 중국과학원 항전부에 배치받아 인공위성발사시험에 참가하였다. 그는 기상관측위성인 <풍운1호>, <풍운2호>의 설계, 연구, 제적, 발사에 참가해 우리 나라의 우주비행기술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신주6호>발사에 크게 기여한 미사일전문가로 불리우는 김수복연구원은 덕신 룡암촌 출신이다. 그는 룡암소학교를 마친뒤 왕복 30리되는 길을 통학으로 덕신중학교를 졸업하고 룡정2중을 거쳐 북경리공대학 미사일학부에 추천되였다. 5년간의 대학생활에서 공부를 잘해 1963년에 직접 중국항천부에 배치받았다. 42년간 줄곧 우리 나라 우주비행연구에 크게 기여했으며 중국과학기술진보 특등상, 국방과학기술상, 항천분야 과학기술상을 수상했으며 《중국우주항공협회》, 《항천보고》 등 잡지에 우주비행기술 등에 관한 론문 수십편을 발표했다.

리호천은 모택동, 류소기,주은래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접견을 수십번 받았으며 40여개 나라와 지구 기자들의 취재도 받았다. 공화국 창건 10주년 때는 중앙기록영화에까지 소개되였다. 리호천의 업적을 모델로 우리 나라 우전분야에서 처음으로 영화 <기러기>를 제작했다.

덕신향에는 축구인재도 많이 배출되였다. 덕신향 장동촌은 중국조선족축구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조선민족체육사>에 따르면 중국의 조선족축구는 1905년부터 조선애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도성(지금의 연변)》을 중심으로 각 지방들에 차츰 보급되였다고 한다. 관련자료에 의하면 1910년 단오절에 처음으로 장동소학교와 명동소학교가 대항경기를 치렀는데 이것이 연변에서 처음으로 되는 축구경기라고 한다. 또 민국년간에 팔도하자(지금의 덕신향)에서 체육운동대회가 많이 열렸는데 그때 장동팀과 남양팀이 그 당시 축구판을 독차지하다싶이 했다고 한다.

덕신 남양출신인 박주환과 박익환 형제는 축구를 잘해서 《간도성》과 《만주국》축구무대를 휩쓸었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8년 9월 23일자 스포츠일화 2446호는 <간도성>과 일본전역에 이름을 떨친 박익환이 고려대학을 다닐 때인 1940년에 일본축구대회에 학교팀선수로 출전하여 일본 간사이학원팀을 꺽는데 큰공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9년 5월 12일자 스포츠일화 2542호는 당대에서 가장 뛰여난 하프선수로 민병대와 박익환을 꼽았다.

덕신 남양촌 출신인 최태환과 최중석 형제는 지난 세기 50년대말까지 중국의 축구무대를 주름잡은 프로선수였다. 그들 형제는 모두 동북팀과 국가팀에서 활약했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국가체육건장>칭호를 수여받았다. 건국이래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축구건장이 두명이나 나오고 그것도 형제가 나란히 이런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며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동생 최중석은 중국국가팀선수로 선발된후 하룡원수의 지시로 웽그리아에 파견되여 축구기술을 배웠다. 국가팀의 공격수로 최중석이 쌓은 업적을 기려 수십년이 지난 1981년 10월 3일자 <체육보>눈 글을 실어 그를 극찬하기도 했다.

남양소학교와 덕신중학시절부터 축구로 유명했던 최호균선수도 국가팀 공격수로 역시 첫패로 웽그리아에 가서 기술을 연마하고 돌아와 우리 나라 축구무대에서 활약하다가 50년대말 조선으로 갔다.

덕신 금곡촌 출신인 손중천은 길림성팀에서 <분사식비행기>라는 별호를 가지고 중국 축구무대에서 소문난 축구명장였다. 속도가 빠른 손중천은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꼴을 많이 넣어 명성을 떨쳤다. 취재가운데서 손중천은 1936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의 6촌 동생이기도 하다. 국가체육건장칭호를 받은 손중천은 지난 세기 50년대 중반부터 1960년까지 길림성팀과 국가팀을 위해 크게 기여한 축구명장이다.

2004년 조선에서는 《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라는 책을 출판했다. 우리 나라 《인민일보》는 2005년에 관련기사를 실었다. 소식에 의하면 《허죽산(1925-1949)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 태생으로 〈기계다리〉라고 불리울만치 세계축구와 벨리와 못지 않게 뽈을 잘 찼다》고 평가했다.

1950년대말부터 1966년까지 길림성축구팀의 꼴문을 철벽같이 지켜선 유명한 꼴키퍼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박장수축구건장이다. 1936년 5월 덕신 중성골에서 태여난 박장수는 길림성팀의 꼴문을 잘 지켜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며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하룡원까지 그를 《철문과 같다》며 극찬했다.

덕신향에는 해방전에도 축구명장 여럿이 배출되였고 건국후에는 《축구건장》이 4명 배출되였다. 우리 나라에서 축구인재가 제일 많이 배출된 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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