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그리고 오늘…

2019-08-28 09:05:02

박진범 로인과 외손녀 림소미양.

9일, 왕청현 배초구진 면전촌 그의 자택에서 만난 박진범(88세) 로인, 문앞에 걸린 두개의 ‘영광의 집’ 패쪽과 입고 있는 평범한 흰색 티셔츠의 가슴팍에 찍어넣은 ‘건군 92돐 기념, 중공왕청현위와 왕청현인민정부 증정’이란 내용의 눈에 띄는 빨간 글씨가 아니였다면 자칫 고령에도 두눈에 넘치는 정기를 간직한 평범한 농민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먼길 달려오느라 고생이 많소. 늙은이한테 무슨 들을 얘기가 있다고…그래도 이왕 오셨으니 들어나보슈. 가족들한테도 한번도 꺼내지 않은 내 군복무시절 얘기요.”

해방전쟁 3년, 조선전쟁 3년, 그리고 조선에서 군인으로 복무한 4년까지 합쳐 박진범 로인의 10년 군생활을 세시간 남짓 들어보았다. 조금은 두서없었지만 년월일까지 정확한 시간과 부대의 이동경로를 떠올려 들려줬고 질문을 던질 시간도 없이 부지런히 취재수첩에 기록했다.

취재를 마치고서야 기록해온 박진범로인이 몸담궜던 군부대, 그가 얘기해준 시간대와 력사사건을 다시 검색하며 정보를 맞춰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은 놀라움의 련속이였다.

요약해 정리해보면 이렇다.

1947년 9월 18일, 16살에 입대한 박진범 로인은 1950년 3월 조선으로 나가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 정치부 소속이였다.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의 전신은 동북야전군 제10종대였고 박진범 로인은 연길에서 3개월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돈화에서 1948년 1월 제10종대 공병부대에 편입됐다. 제10종대는 1948년 11월에 중국인민해방군 제47군으로 개편됐고 료심전역에서 대흑산저지전에 참여한 건 물론 평진, 의사 등 유명 전역에 참가했다. 그뒤에는 제2야전군 제3병퇀을 협조해 사천, 귀주로 진군해 작전에 참여했고 중경해방, 해남해방 당시 모두 그 현장에 있었다. 1950년 1월부터는 호남성 서부에서 방어진을 치고 호남성의 비적을 토벌하는 등 중국군 력사에선 유명한 군부대이다. 공병부대 병사였던 박진범 로인은 호북성 의창에서 학질로 3개월간 치료를 받은 뒤로는 호남성 원릉현에 머물며 사령부 직속 정치부에서 통신병을 지냈다. 원릉현 원릉진 승리문사회구역에 위치한 47군 군부  옛 건물은 원릉현의 현급 문물보호단위로 지난해 재건돼 지금도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박진범 로인이 머물던 그 곳이 말이다.

해방전쟁이 거의 마무리되고 호남성 서부 산악지대에서 비적 토벌을 하던중인 그때 해방군내 조선족군인들 집결 통지가 내렸다. 그렇게 조선족군인중 한명으로 박진범 로인 역시 호북성 무한시에 집결했다. 조선 함경북도 종성면 산성리에서 태여나 5살에 중국 왕청으로 건너온 그인지라 조선으로 간다는 소식에 무척 들떴다고 했다.

무한시에 집결한 조선족군인들과 함께 박진범 로인은 1950년 3월 조선인민군에 편입돼 조선으로 향발했고 1950년 4월 24일에 조선에 도착, 력사적으로 자타공인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유명한 조선인민군 4사단 18련대에 배치됐다. 그리고 47군 정치부에서 통신병을 지낼 당시 사령관 전용차 운전수들한테 짬짬이 배운 운전기술이 도움이 돼 박진범 로인은 조선에서 군복무하는 동안은 줄곧 박격포 운수차량 운전병을 지냈단다. 그러다 조선전쟁 당시 공주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부상을 입어 영구적인 장애를 남겼고 평양대폭격 당시에는 평양공항 재건을 위해 자재 실은 트럭의 휘발유통을 물에 적신 군복으로 감싸고 불길에 뛰여들어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정전 이후에는 1953년 8월 15일, 조선의 해방기념일 열병식에 포차를 몰고 맨 앞줄에서 열병을 받기도 했단다.

그가 다시 면전촌으로 돌아온 건 1956년 조선에서 군복무하던 시절 휴가차 찾은 고향이였다. 돌아온 그가 목격한 건 산후풍으로 실명한 어머니와 학교에도 못가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하던 어린 녀동생이였다. 그렇게 그는 가족들 곁으로 돌아올 결심을 굳혔고 1956년 11월에 귀국해 제대했다. 그뒤 길림성교통청 자동차대에서 대형 화물차 운전수로 근무하기도 했지만 고향이 그리워 1961년 면전촌으로 돌아와 쭉 농민으로 살았단다.

슬하에 딸 넷에 아들 한명, 여섯명의 손자 손녀를 둔 박진범 로인은 지난해 안해를 잃은 후부터 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부터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고는 하지만 두눈에 정기가 넘쳐흘렀고 깡마른 몸에도 치아는 세대만 빠진 고령에도 무척 건강한 모습이였다. 마당에서 유기농이라며 손수 도마도를 한가득 따줄 정도로 말이다.

“나라에서 우리 장애군인들에게 혜택을 참 많이 주고 있소. 그래서 걱정없이 살고 있소. 우릴 잊지 않아서 고마울 뿐이요.”

2004년부터 박진범 로인은 장애군인무휼정책을 향수하고 있다. 지금은 해마다 4만원의 우대 위로금이 내려온단다. 그리고 왕청현과 배초구진에서 해마다 조직하는 건군절 행사에도 꼬박꼬박 참가하고 있다.

바라는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없다는 박진범 로인, 그에게 남은 건 후손들의 무사무탈, 그리고 만년의 행복 뿐이 아닐가 싶다.


글·사진 박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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