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과 함께 걸어온 충실한 발자취□ 김동운

2019-09-29 08:55:32

이제 며칠이 지나면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돐을 맞는 경사스런 날이다. 이 시각 공화국과 동갑인 나의 70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니 하나하나의 발자취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1949년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의 한 보통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칠남매 가정의 맏아들인 나는 6살을 먹던 해 가족을 따라 소발구에 앉아 감자와 조이 농사를 짓던 강장골을 떠나 5킬로메터 떨어진 흥남촌에 와 어린시절과 청춘시절을 보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자가 섞인 조밥과 콩보리밥만 먹다가 11살에 처음으로 이밥을 먹어보았고 12살에 처음으로 사탕을 먹어보았으며 14살에 처음으로 전등불을 보았고 16살에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나의 아버지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셨지만 자식들에 대한 기대는 남달리 컸다. 혹 도회지에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면 공책과 고무지우개연필을 사다가 나의 손에 쥐여주면서 웅숭깊은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지군 했다.

“아버지는 때를 잘못 만나 공부를 못했는데 네나 공부를 잘하여 나라의 유용한 사람이 되여라.”

“예, 공부를 잘하겠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깊은 뜻은 잘 몰랐지만 자신있게 대답을 올리군 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대견한 눈길로 나를 보시며 장알이 두툼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시군 하셨다.

아버지는 가끔 날 데리고 두만강변에 고기잡으러 가기도 하셨는데 아버지가 반두질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나의 눈앞에 우렷이 떠오르군 한다. 어린 나에게는 두만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이 즐거운 놀이였지만 농사일에 지친 아버지한테는 고기잡이가 많은 식구들에게 맛있는 한끼를 마련하는 로동이였으리라.

나는 집에서 수십리 떨어져있는 남평중학교에 입학하여 공청단에 가입하였고 1970년 2월 28일 갓 21살 혈기방장한 청춘시절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진붉은 당기 앞에서 장엄하게 선서하던 그 감격적인 시각을 회상하면 가끔 가슴이 울렁거리군 한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첫 로농병학원으로 추천받아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하였다. 나는 당의 따사로운 해빛을 한몸에 안고 열심히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조직의 통일배치에 따라 장춘시 구태현 영성탄광자제중학교에 정치교원으로 배치받아 사업의 첫발자국을 떼였다. 그때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18개 사업단위, 기관에서 21번의 직무변동을 거치는 복잡하고 긴 직업생애를 경과하였다.

대학졸업 후 첫 배치가 연변지역을 벗어나 타지역에 가서 사업하게 되니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과 가족이 마냥 그리웠다. 고향에서 청춘의 삶을 빛내고 싶었지만 나한테는 개인의 욕망보다 조직의 배치가 더 중요하였다. 특히 나는 당원이였기에 더욱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야 했다. 이리하여 산 설고 물 설은 낯선 타고장에서 나는 사업의 첫 악장을 엮어나갔다.

그런데 기회가 행운스럽게 찾아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여 나한테 교환전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차례졌다. 나는 구태에서 고향 화룡현 와룡중학교로 전근하여 정치교원 겸 학교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현당위 조직부의 발령을 받고 용화공사 무장부 부장으로, 1년 후에는 공사당위 부서기,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사업하였다. 1976년 5월,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3기 청년간부양성반에 참가하였고 그해 년말에 공사당위 서기,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중용되였다. 그뒤 선후하여 화룡현 숭선공사 농촌공작대 조장, 공청단화룡현위 서기, 현당위 위원 등 여러 직무에 충실하였으며 1983년에 공청단주위로부터 제11차 전국공청단대표대회 대표 후보로 추천받기도 했다.

1986년 9월에는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부장으로 임명되였고 일년이 안되여 또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의 중책을 짊어지였다. 1990년초, 화룡현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받고 계속 현당위 선전부 부장을 담임하였는데 이 기간 당시 전 현 농촌과 농민의 사상실제에 착안하여 반년 동안의 조사연구를 거쳐 론문을 써냈는데 농촌에서 대문화 건설을 틀어쥐여 농민들의 종합자질을 높일 데 관한 관점을 제기함과 동시에 농촌 대문화 건설을 효과적으로 지도했다.

한편 통신원대오 건설을 틀어쥐고 선전보도 사업을 추진했다. 2년간의 노력을 거쳐 전 현 통신원대오가 50명에서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그중에서 20여명 골간을 중점적으로 틀어쥐고 역할을 발휘하도록 했는데 매 사람이 100편 이상의 원고를 써서 주, 현 신문, 라지오방송, 텔레비죤방송에 발표했다. 현에서 해마다 한번 내지 두번의 통신원강습반을 꾸리고 각 향, 진에서도 해마다 한차례 이상의 강습반을 꾸려 통신원들의 자질을 크게 높였는데 전 주적으로 원고 질과 량이 앞자리를 차지했다. 이로 하여 현당위 선전부는 여러차례 전 주 선전보도사업 선진단위로 되였다.

화룡현당위 선전부 부장으로 있은 몇년간 나는 선전사상사업의 새 길을 열심히 탐색하였다. 초기의 조사연구 및 추진을 토대로 농촌 대문화 건설에 대해 한층 더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농촌 대문화 건설에 관한 주요 내용과 방법, 조치를 내놓고 착실하게 실행하여 화룡현 농촌 경제, 사회 발전을 적극 추진하였다.

룡정시당위 부서기로 있은 2년 반 동안에는 농촌, 문화교육, 정법 및 군중단체 사업을 맡았다. 이 기간 나는 농촌형세가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 시기에 뒤따른 문제들을 연구, 해결하는 데 모를 박았다. 그리고 ‘새로운 형세하에 경제발전을 어떻게 틀어쥘 것인가’ 하는 과제를 놓고 반년 남짓이 조사연구를 진행하여 <소도시 건설을 힘써 강화하고 현구역 경제 발전을 적극 추진하자>는 론문을 써 발표하였다.

이 론문에서 나는 소도시 건설의 의의와 내용, 주요조치를 명확히 제기하고 세개 면의 문제를 비교적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끄집어냈는데 특히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룡정시의 향, 진 건설을 세개 차원으로 나누어 기획하고 지도할 데 대해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당시 룡정시의 경제발전에 적극적인 추진역할을 하였다.

1997년 8월, 조직에서는 나를 왕청현에 파견하여 현장사업을 맡게 했다. 왕청에 부임하자마자 가정에는 둘째딸의 공부문제로 하여 걱정거리가 생겼다.

“바늘 가는 데 실이 따라간다고 저는 기꺼이 당신을 따라 왕청에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사춘기를 넘기고 있는 딸애가 왕청에 가서 잘 적응하겠는지 모르겠어요.”

언제나 나의 사업을 군말없이 묵묵히 지지해주던 안해였지만 딸애의 공부와 관련된 문제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나도 딸애의 공부와 관련해서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조리정연하게 안해한테 말했다.

“나도 애가 전학을 하면 공부에 지장받을 거라 생각하오. 하지만 왕청인민들이 자기 자식을 공부시키는 학교에서 내 자식을 왜 공부시킬 수 없겠소? 현장인 내가 자식을 데려오지 않는다면 왕청인민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소? 현장은 전 현의 코기러기이니 모든 면에서 이신작칙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오.”

안해는 나의 생각을 리해하고 지지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딸애도 나의 말을 잘 따랐었는데 새로운 학교에 가서도 학습과 생활에 잘 적응하였다. 나는 아무리 사업이 다망하여도 학부모회의에 참가하였고 휴일이면 될수록 딸애들과 함께 있으면서 의사소통을 많이 했다. 지금 박사가 되여 북경 모 대학에서 부교수로 있는 큰딸과 박사학위를 따고 연변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는 둘째딸을 생각하면 건강하게 자라고 공부도 잘하여 훌륭하게 성장해준 두 딸한테 기특하고 고마움을 금치못하게 된다.

내가 왕청현에 부임할 때 왕청현은 길림성에서는 5개 현, 연변에서는 유일한 국가급 빈곤현이였다. 나는 왕청현의 빈곤해탈을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마음을 다잡았다.

1997년 현장으로 부임한 후 첫번째로 틀어쥔 일이 왕청에서 천교령에 이르는 도로를 닦는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를 실시하자면 엄청 많은 자금이 있어야 했는데 현정부에는 내놓을 자금이 없었다. 나는 현의 관련 지도자와 부문 책임자들을 이끌고 여러 달에 걸쳐 주와 성, 국가 관련 부문을 10여차례나 찾아가 해당 프로젝트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간곡히 호소하였다. 반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여 프로젝트가 비준됨과 동시에 6000여만원의 건설자금도 유치되였다. 근 2년간의 시공을 거쳐 길이가 37킬로메터 되는 왕청-천교령 도로가 완공되여 사용에 교부되였다.

왕청-천교령 도로 건설은 왕청현의 발전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왕청현의 대규모 도로건설의 서막을 열어놓았으며 소중한 경험을 쌓아주었다.

이 무렵 왕청현은 정부사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만큼 재정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단시일에 해결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참답게 재원건설을 연구하고 틀어쥐여야 한다고 판단한 나는 근 1년간의 시간을 들여 기층에 내려가 조사하는 한편 재원체계를 세우는 중요한 과제를 둘러싸고 깊이 있게 연구, 분석했다. 나중에 나는 현당위 리론학습중심조회의에서 론문 <왕청현 재원건설을 더한층 강화할 데 관한 사고> 를 내놓았는데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론문에서 제기한 4개 면으로부터 재원건설을 촉진할 데 관한 견해와 방법은 적극적으로 조직, 실시되였는데 당시 현의 재원건설에 일정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빈곤현의 현장사업을 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보람도 컸는데 사업실천을 통해 지도간부는 인민대중의 질고를 념두에 두고 항상 인민대중의 리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체득했다.

1988년 8월의 어느 날, 갑자기 대싸리 같은 큰비가 쏟아졌다. 혹시 홍수가 지지 않을가? 불길한 예감이 번개마냥 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이때 나는 공교롭게도 심장병이 도지고 감기까지 걸려 병을 진단한 현병원 김원장은 무조건 입원치료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내가 한참 망설이고 있을 때 하마탕향에서 홍수가 터져 위험하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어떻게 해야 할가? 홍수방지 일선에서 지휘해야 할 내가 아닌가? 언제 병원의 침대에 편안히 누워있을 사이가 있는가. 난 반드시 가야 한다. 작심을 내린 나는 약을 호주머니에 넣고 극구 말리는 의사와 안해를 뒤에 두고 관련 일군들을 거느리고 홍수방지 제1선에 가서 지휘했다. 우리들은 이틀 동안 악전고투하여 성공적으로 홍수의 피해를 막아냈다. 신기하게도 홍수가 물러가니 나의 감기도 거의다 나아졌다. 실로 일거량득이였다.

“우리가 홍수와 용감히 싸우니 감기란 놈도 무서웠던 모양이구만.”

내가 롱조로 말하니 모두들 상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2002년 12월, 나는 주 제12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여 교육과학문화위생사업을 맡게 되였다. 이 기간 민족교육이 직면한 실제 곤난과 문제에 립각해 주 제8차 당대회의 결책, 포치와 주인대 상무위원회의 립법계획에 따라 교육과학문화위생위원회와 주 직속 관련 부문 인원들을 조직하여 기층에 심임해 조사연구를 하고 국내 형제지역을 고찰하여 경험을 학습한 후 조선족교육개혁을 주요내용으로 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교육조례 (수정안)>을 내놓았는데 주 제12기 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심의, 채택되였다. 이는 이중언어교수를 중점으로 한 조선족 교육 개혁과 발전을 다그쳐 추진하는 데 중요한 법률적 보장 역할을 하였다.

2011년, 나는 직업생애를 마무리하고 영광스럽게 퇴직하였다. 그리고 2012년부터는 연변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사업을 맡고 새세대관심사업에 혼신을 불태웠는데 어언 7년이 된다. 그 사이 연변새세대관심사업위원회는 전 성 선진집단으로 평의되였고 나 자신도 영예롭게 전국 새세대관심사업 선진개인으로 되였다.

자신의 70년간 걸어온 길을 돌이켜보면 감개무량하다. 우리 세대는 공화국의 70년과 같이 하면서 상전벽해와 같은 위대한 변화를 겪었다.

인생 칠십을 회고하여 보니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만수천산을 다 넘어왔건만 나름대로 보람찬 삶을 살아온 선택받은 세대이고 시대의 행운아라는 자긍심을 가지게 된다. 나는 공화국과 동갑인 것으로 하여 무한한 영광과 가슴 뿌듯한 기쁨을 느끼고 있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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