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정치와 사회 평안을 위해 일생을 바쳐-연길시감찰위원회 원 위원 후동 동지 추기

2019-10-19 10:08:08

“나는 모든 하늘이 푸른색이도록 보장할 수는 없지만 나의 머리 우의 하늘은 푸른색이도록 보장할 것입니다.”

2018년 12월 16일, 연길시감찰위원회 위원 후동은 병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55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으며 생명으로 자신의 맹세를 실천했다.

일생의 마지막 1년간 그는 개혁에 적극 뛰여들었고 규률검사감찰 기관에 이전한 160일 동안에 전 주의 첫번째 류치사건을 맡았으며 규률과 법률의 련결, 법과 법의 관통 등 시험점 사업을 위해 경로를 탐색했다. 일생의 21년간 그는 반부패투쟁에서 600여건의 사건의 처리를 담당, 또 처리에 참가했고 국가, 집단과 군중을 위해 3000여만원의 직접적인 경제손실을 만회했다. 일생의 대부분 시간에 그는 기층일터를 지키고 병을 지니고 사업을 견지했으며 가정의 곤난을 극복하고 편안한 생활을 포기했으며 장기간의 외출로 15만킬로메터에 달하는 사건처리 려정을 쌓았다. 그는 여러차례 각급 당위, 정부의 표창을 받았고 련속 다년간 ‘우수사업일군’, ‘정법사업 선진개인과 선진사업일군’, ‘10대 성실 정법경찰’, ‘길림성검찰업무능수’ 등 영예칭호를 획득했다. 그는 생명으로 규률검사감찰 간부의 충성, 깨끗, 담당을 전석했다.


개혁에 뛰여들다: “향후 우리는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하루빨리 사업을 떠메고 임무를 짊어져야 합니다.”

2017년 12월 28일, 중국인민해방군에서 16년 동안 복역하고 연길시인민검찰원에서 20년 동안 반탐오회뢰 사업에 종사한 후, 54세가 되는 해에 후동은 또 한번 사업의 시작점에 섰다.

연길시검찰위원회가 설립되기 몇달 전에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후동은 인차 검찰원 동료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였다. 국가감찰체제 개혁은 전반 국면과 련관되는 중대한 정치체제 개혁이다. 반부패전선에서의 ‘로장’으로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기에 반드시 솔선수범하여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감찰위원회가 곧 설립됩니다. 규률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는 당신의 사업경험과 사건처리 능력이 매우 필요합니다!” 조직의 기대 앞에서 후동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무조건 조직의 결정에 복종합니다. 기필코 새로운 일터에서 직책을 참답게 리행하겠습니다.” 연길시 규률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 지도자는 이전하는 과정에 후동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복종’이라고 했다.

“금방 이전한 동안에 제가 후주임의 판공실을 찾아가 사업을 회보할 때마다 그의 손에는 늘 규률검사 업무서적이 있었고 책상 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그가 학습내용을 기록한 필기장이였습니다.” 후동의 동료는 이와 같이 회억하면서 금방 이전했을 때 후동은 항상 “향후 우리는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사유방식과 사업방식을 하루빨리 개변하며 하루빨리 사업을 떠메고 임무를 짊어지고 반부패사업을 더욱 잘해야 합니다.”고 동료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그의 인솔하에 연길시 규률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 규률검사감찰 6실은 인차 사업상태에 들어섰다.

연길시감찰위원회가 설립된 지 6일 만에 후동은 급한 임명을 받고 전담조 조장을 맡았고 전 주의 첫 류치사건인 팔가자림업국 목재중개판매처 원 출납 장모가 공금을 횡령한 사건을 주관했다. 법률의 준거가 없고 참조할 선례가 없으며 모든 것을 탐색해나가야 하는 정황하에 후동은 전담조 성원을 이끌고 류치기지에서 먹고 자면서 밤낮이 없이 연장근무를 했다. 사건을 처리하는 기간에 후동은 전담조 성원을 이끌고 연길과 화룡시 팔가자진을 몇십차례 왕복했고 100여명의 증인과 담화했으며 10년간의 장부 도합 800여권을 압수했다. 풍부한 사업경험과 사건처리 능력으로 후동은 이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냈고 순조롭게 종결함과 아울러 사법기관에 이송했으며 개혁의 ‘첫 포문’을 쏘아올렸고 규률과 법률의 련결, 법과 법의 관통, 감찰 전면 피복 등 개혁시험점 사업에 귀중한 실천경험을 제공했다.

후동이 전념하여 새로운 일터에서 분투할 때에 산동성에 있는 고향에서 어머니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천리 밖에 계시는 어머니는 병상에서 그가 가장 그리워하는 아들이 곁에 오기를 바랐다.

지도자와 동료들은 모두 그가 인차 일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돌보러 가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후동은 현재 처리중인 사건은 가장 긴장하고 가장 관건적인 시기에 들어섰기에 반드시 분초를 다투고 잠시도 떠나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가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고 나서 후동은 안해 왕연영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보살피도록 했다.

그러나 운명은 후동에게 다시 효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영원히 세상을 떠났고 후동은 더 이상 생명에서의 후회를 돌이킬 기회가 없게 되였다.

연길시감찰위원회에서 임직한 후, 후동은 짧은 160여일 동안에 51건의 사건을 초보적으로 조사하고 28건의 사건을 립안했으며 27명에게 당규률정무 처분을 내렸고 그중 4명을 사법기관에 이송하고 2명에게 류치조치를 취해 심사 조사했다. 이러한 수자의 뒤에는 후동의 희생과 대가가 얼마나 깃들어있는지 모른다.


용감히 칼을 빼들었다: “그 누구의 이름도 대지 마세요! 만약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조사에 림하라는 통지를 보낼 겁니다!”

“후동 동지에게 사건을 맡기면 우리 모두 시름을 놓습니다.” 이는 연길시 규률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와 연길시인민검찰원 지도자들이 후동에 대한 일치한 평가이다. “사건을 조사하지 않는다면 직책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건을 조사 처리할 수 없다면 무능한 거죠.” 이는 후동이 늘 하는 말이다. 장기간의 부패척결 투쟁중에 그는 용감히 칼을 빼들고 투쟁에 나섰다.

2000년 3월, 한 제보자가 반영한 민사사건이 후동의 주의를 끌었다. 단서가 적고 사건 발생시간이 긴 불리한 요소에 직면해 후동은 사업일군들을 이끌고 실지를 방문하고 자료를 찾아보고 개별적으로 종업원들과 담화하며 5차례의 조사를 거쳐 제보자가 반영한 중점문제가 모두 연길시공급판매사련합사 출납 박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초보적으로 장악했다. 이에 비추어 후동은 기세를 몰아 사건을 조사했는데 한개 단위의 5명이 집단적으로 부패에 젖어들고 공동으로 251만원을 탐오한 사건을 샅샅이 파헤쳤다.

강철을 주조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강철보다 더 강인해야 한다. 2007년 3월초, 후동은 연변배전망회사 생산부 주임 백모의 수뢰사건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사건은 락관적이지 못했다. 후동은 책략을 조절하고 뢰물를 바친 기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이 기업들의 책임자들은 허세가 대단하고 수완이 비상했으며 모두 손에 큰 ‘왕패’를 쥐여진 것마냥 크게 뻐기였다. 심문과정에 그들은 사업일군들을 안중에 두지도 않고 배합을 거부했으며 영향력이 있는 지도자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후동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 누구의 이름도 대지 마세요! 만약 사건과 관계가 있다면 그한테 조사에 림하라는 통지를 보낼 겁니다.” 협박에도 후동은 한치의 두려움도 없이 항상 관건적인 시각에 그들의 약점을 꼬집어내고 힘있게 주먹을 날려 그들이 순순히 배합하게 만들었다. 하나하나의 ‘기관’이 공략되고 하나하나의 증거들이 수면에 떠오르자 백모는 끝내 죄를 승인하고야 말았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후동은 공정무사하여 심지어 인정사정을 보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조사한 사람중에는 그의 동창이 있었는가 하면 그의 이웃도 있었다. 동료들은 그의 힘과 견지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잘 알고 그에게는 강대한 ‘긍정적 에너지’가 있다고 말했다.

“오랜 동창이고 그가 신체가 좋지 않은 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미 잘못을 알고 후회하고 있는데 한번 봐주면 안되겠습니까?” 2013년 4월의 어느 날, 후동은 동창 서모의 가족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당시 연길시인민검찰원에서 마침 연길시 하남사회구역 봉사중심 주임 서모의 회뢰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서모는 후동의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중의 한명이였다.

전화를 받은 후동은 아쉽게 생각했지만 규률요구와 어깨에 짊어진 직책은 그로 하여금 한치의 흔들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전화에서 서모의 가족에게 “국가의 공직일군으로서 잘못을 했으면 승인하고 다시 고치면 됩니다.”, “저를 인정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저를 믿으십시오. 지금이 잘못을 승인하는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언젠가는 그도 저의 마음을 알아줄 겁니다.” 규률요구에 따라 후동은 본 사건을 회피했다. 서모는 주동적으로 잘못을 승인하고 범죄사실을 교대했다.

부패척결사업에 종사하려면 사심과 두려움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청렴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관리할 수 없지만 자신을 관리할 수 있지 않습니까?” 후동은 늘 이 말을 입에 걸고 다녔다. 그는 ‘본인 청렴’은 외부 유혹의 가장 좋은 ‘방패’라고 말했다. 부패척결사업에 종사하면서 후동은 가족과 사건정황을 묻지 말고 다른 사람 대신해 말해주지 말고 뢰물을 받지 말자고 약속을 했다. 몇년간 후동이 참가한 모든 사건 가운데 단 한건의 인정사건, 관계사건, 금전사건이 존재하지 않았고 억울하거나 틀린 사건은 더욱 없었다.

후동은 사업능수로서 전 성 검찰기관에서도 이름이 자자하고 성검찰계통 인재창고 전문가에 편입되였으며 여러차례 상급 검찰기관에 파견되여 큰 사건들을 조사 처리하기도 했다. 그는 선후하여 주공안국 교통경찰지대 교통처 전임 부처장 장모 등 8명의 탐오사건과 도문시건설국 온난주택판공실 전임 주임인 김모 일련의 수뢰사건, 왕청현림업국 전임 부국장 류모의 수뢰사건, 주당위 선전부 전임 부부장인 박모의 수뢰사건 등 큰 사건의 조사에 참가했다.


마음속에 큰뜻이 있다: “우리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무정한 후동은 군중과 동료들에게는 따뜻한 사람이다. 특히 백성들의 절실한 리익과 관련된 사건이면 후동은 늘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동료들은 모두 알고 있다.

2006년, 후동은 대오를 거느리고 채모, 장모의 의약위생분야 상업뢰물제공사건을 조사, 처리했다. 한달여간 련이어 이어진 분투로 사건처리 대원들의 피로는 극에 달했고 혐오정서가 퍼지기 시작했다. 후동은 그들을 소집하여 사건정황을 분석하는 대신 의약분야에서 존재하는 상업뢰물로 인해 약품가격이 높아지고 백성들은 약품의 가격이 높아 치료할 돈이 없는 생생한 사실들을 전했다. 가장 마지막에 그는 이와 같이 물었다. “우리가 사건을 처리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고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의 한마디로 그들은 다시 사기를 진작했다.

2008년 후동은 단 2일 만에 농민의 알곡재배보조금 70만원을 횡령, 편취한 중대한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수사, 해결했다. 룡정시 조양천진에서 소집한 장물반환대회에서 후동은 피땀 흘려 번 돈을 돌려받은 농민보다 더 기뻐했다.

“부패척결사업을 하려면 반드시 손해를 감수하고 힘든 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후동은 늘 이렇게 동료들을 위로했다. 다년간 부패척결사업에 종사한 후동은 사업에 더욱 많은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고 보통사람들처럼 안일함을 누리거나 가정생활을 돌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늘 안해와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2000년 후동의 안해 왕연영은 메니에르 증후군에 걸렸다. 병이 발작하면 하늘과 땅이 돌고 구역질과 구토를 동반했으며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어느 하루는 후동이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데 왕연영의 병이 갑자기 발작했다. 홀로 집에 있던 그녀는 끝내 전화기너머의 후동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후동은 급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지만 일터를 떠날 수가 없었다. 안해를 돌봐줄 친척을 찾지 못한 후동은 결국 친구에게 안해를 데리고 병원을 갈 것을 부탁한 뒤 여전히 사업의 최전선에 남았다.

오랜 동료인 풍박은 결국 참지 못하고 후동을 꾸중했다. “직접 한번 가봐야지 않겠습니까? 나도 녀자니깐 하는 말인데 이럴 때일수록 남편이 얼마나 수요되는 줄 알기나 합니까? 그 마음을 왜 몰라줍니까?” 후동은 얼굴을 돌린 채 한참을 있었다. 그는 다시 머리를 돌리고 담담히 대답했다. “지금 한창 바쁘기 때문에 저는 떠날 수 없습니다. 어서 계속하여 일합시다.”

후동은 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다년간 높은 강도의 사업상태와 극히 불규칙적인 생활리듬은 그의 건강을 엄중히 해쳤다.

2017년 12월말 후동은 위가 또 한번 불편함을 느꼈는데 이때가 마침 감찰체제 개혁 이전의 관건시기였다. 후동은 안색이 어두워 늘 약을 복용했다. 동료들이 그에게 검사를 받고 휴식을 취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늘 정맥주사만 맞고 바로 일터로 복귀했다.

가족들도 그의 건강이 걱정되여 외지 병원에 예약을 한 뒤 그가 청가를 맡고 사람을 바꿔 대체할 것을 권유하도록 동료들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후동은 “지금이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바쁜 일이 좀 지나고 나서 다시 봅시다.”고 하면서 련속 3차례 치료시기를 포기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견결히 그가 휴식을 취하도록 할 것입니다.” 이는 후동이 떠난 뒤 그와 함께 사업한 지도자와 동료들에게 가장 후회로 남는 일이였다.

2018년 5월 후동의 병세는 악화되여 하는 수 없이 상해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진찰 결과 위암으로 판정되였고 상해의 병원에서도 이미 속수무책이였다.

상해에서 돌아온 뒤 후기치료기간에 후동은 한마디 말도 없이 극렬한 통증을 참아냈다. 암세포가 위를 단단히 둘러싸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자 의사는 그의 위에 지지대를 달고 억지로 위를 열어 음식을 주입하여 생명을 유지하도록 했다. 의사와 친인척들은 후동의 병세를 제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고 그 역시도 한줄기의 희망을 품었다.

“서기 동지, 사업이 금방 시작되여 최선을 다하고 싶었는데 신체가 변변치 않습니다. 아무래도 한동안 병가를 맡아야 될 것 같습니다.” 후동의 병세를 아는 연길시 규률검사위원회 감찰위원회 지도자는 그의 전화를 받고 심장이 칼로 에는 듯했지만 따뜻하게 그를 위로했다. “너무 급해하지 마시오. 몸을 잘 추스리고 하루빨리 일터로 복귀하길 바랍니다.”

2018년 12월 16일, 후동은 병치료에 효험을 보지 못하고 55년의 짧은 삶을 마쳤다.

후동은 생전에 늘 불처럼 타올라 맑은 정치와 사회 평안을 밝게 비추었고 그의 서거는 반부패사업이 영원히 진행형이고 부단히 전진하도록 격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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