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녕 조선족문단의 ‘징검돌’ 김광명
문학 행보, 지금도 진행형

2022-05-11 08:45:57

료녕 조선족문단이 1957년에 학생작품집 《첫 수확》(등사본, 비공식 출판)을 펴내서부터 2018년에 95만자에 달하는 《료녕조선족문학통사》(상, 하)를 출판하기까지는 료녕 조선족문단의 1세대 문학인들의 피와 땀이 슴배여있다. 그중에는 평생 ‘문학’을 숙명으로 여기면서 사명감을 갖고 료녕의 척박한 조선족문단에 꽃을 피우기 위해 묵묵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온 료녕 조선족문단의 ‘징검돌’- 김광명이 있다.

1937년, 료녕성 무순에서 태여난 김광명은 1950년대말 료녕성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에 중앙민족학원을 졸업했다. 심양의 한 한족중학교 교원, 심양시조선족문화관 사업일군으로 근무하다가 1979년 《료녕신문》이 두번째로 복간되면서 <압록강> 문예부간 편집을 맡았으며 1997년에 정년 퇴직했다.

김광명은 중학교시절부터 문학 애호가였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조선의 문학 교과서를 직접 들여와 가르쳤는데 독서를 즐겼던 그는 자연스럽게 조선문학에 흥취를 가지게 되였다. 초중시절 글짓기에서 솜씨를 보여 그의 작문이 자주 학급에서 랑독되면서 문학에 뜻을 품게 되였고 고중시절에는 학교 문학써클의 주요 멤버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며 3만여자에 달하는 중편소설 <투사>를 써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문화대혁명’이라는 악재가 닥쳐 어쩔 수 없이 문학과는 담을 쌓게 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말, 《료녕신문》이 제2차로 복간되여 <압록강> 문예란 편집으로 전근하면서 문학의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 료녕 조선족문단은 초창기로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작가대오의 양성이였다. 이 사명은 숙명처럼 김광명의 어깨에 놓여졌다. 당시 료녕의 조선족문학도들이 자기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원지는 <압록강>이 유일했던 것이다.

신진작가 양성에서 김광명이 택한 길은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것이였다. 우선 그는 편집부로 보내온 작품 원고에 대해서 그 원고가 채용되든 채용되지 않든 빼놓지 않고 일일이 손편지로 회답을 보냈다. 채용된 원고에 대해서는 그 작품이 실린 신문과 함께 편지를 보내 고무격려해주는 동시에 미흡한 점을 지적해주었고 채용되지 않은 원고에 대해서는 그 원고에 대한 수정의견을 적어보내면서 작자와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그는 누구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보내오면 작자가 어디에 살든 꼭 발품을 팔아 그 집을 방문했고 그 집에서 작자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료녕에는 심양시외에 무순, 철령, 영구, 단동, 안산, 대련 등 도시와 신빈, 환인, 관전 등 편벽한 시골에 문학애호가들이 적지 않았는데 무릇 신진 작가들이 있는 곳이라면 김광명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김광명이 문학도들에게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언제 어디든 문학인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라면 무조건 달려가는 것이였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의 모임이라도 문학인들의 모임이라면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모임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문학인들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였다.

이렇듯 그는 집요하게 료녕 조선족문단의 신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였고 그것은 고스란히 풍성한 결실로 맺어졌다. 그 가장 대표적인 실례로 료녕의 ‘본토배기’ 작가, 시인들인 최렬, 강재희와 김군, 편도현, 김례호 등을 들 수 있다.

료녕 조선족문단에서 김광명은 그 발전의 고비마다에 자신의 자취를 뚜렷이 남겼다. 심양시조선족문학회는 1987년에 설립돼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료녕 조선족문단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그는 문학단체 설립 최초 발기자의 한 사람으로 문학인들의 뜻을 모으는 데 일조했고 몇몇 선두주자들과 수차 특별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론의했으며 문학단체 설립을 확정 짓고 구체적인 추진 단계에 이르기까지 1세대 문학인으로서의 조언과 성원을 아끼지 않고 큰 힘을 실어주었다.

료녕 조선족문단의 일대 희사인 《료녕조선족문학통사》의 출간(2018년 2월 출판)과 관련해서도 김광명은 일찍부터 문학인들과의 모임에서 료녕의 조선족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볼 때가 되였다고 건의했고 수차 문학사를 집필할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문학사 집필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처럼 김광명은 료녕 조선족문단의 초학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비춰주었고 ‘징검돌’이 되여 문학도들이 건너야 할 강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1997년, 김광명 선생은 정년퇴직을 맞았고 그 후로는 한동안 문학행사에 발길이 뜸해졌다. 불치의 병으로 10여차 수술대에 오르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것이다.

삶의 끝자락에서 결국 그의 손을 잡아주고 그에게 살아가야 할 리유를 안겨준 것은 역시 ‘문학’이였다. 그는 독서로 고독을 달랬고 ‘습작’으로 적막을 밀어냈다. 그는 다시 필을 들고 ‘문학동네’를 찾아나섰는데 때는 바야흐로 여든을 바라보는 년세였다.

김광명의 만년의 문학 행보는 작품 창작으로 시작됐다. 평론만을 고집했던 그의 필끝에서 수필, 시가 씌여져 간행물에 발표됐으며 따라서 그의 행보는 젊은이들에게 무언의 힘이 되여주었다.

비록 작품 창작으로 문단에 부활했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역시 문단 후비군 양성이였다. 예전엔 작품 발표의 주무대가 신문, 잡지의 제한된 공간이였지만 지금은 위챗이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주무대가 바뀌면서 집에 앉아서도 실시간으로 문학교류가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신세대 문학인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스마트폰 행렬에 가담했다. 컴퓨터를 다루는 데도 서툴었던 그는 지금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위챗 채팅방의 ‘단골손님’이 되였다. 그리고 채팅방에 오르는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빼놓지 않고 평을 달았고 특히 2, 30대 젊은이나 처음 작품을 선보이는 초학자들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17년,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서는 문학회 설립 30돐을 맞아 성대한 경축대회를 가졌는데 이 대회에서 주최측에서는 김광명 선생에게 ‘공로패’를 수여했다. 이는 김광명 선생의 문학인생에 대한 긍정으로서 본인도 이를 그 무엇보다도 값진 영예로 간주하고 있다.

‘먼동’이 터서 ‘금빛’을 발하다가 ‘노을’로 불타오르고 있는 김광명 선생의 문학 행보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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