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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인물속의 공산당원

  • 2011-05-02 22:46:15
조세염

조세염은 1901년 사천성 유양현 룡담진에서 출생하여 1915년 북경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에 진학, 1919년 리대소의 소개로 중국소년학회에 가입하여 5.4애국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사상을 선전했다.
1920년 5월 조세염은 프랑스에 가서 고학했다. 1921년 봄에 장신부, 주은래 등과 함께 프랑스체류 중국공산당 조기조직을 설립하고 중국공산당원으로 되였다. 1922년 주은래 등과 유럽체류 중국소년공산당을 설립하고 중앙집행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뒤이어 유럽체류 중공 총지부 위원과 중공프랑스소조 서기를 맡았다. 1923년 조세염은 진연년, 왕약비 등과 함께 청년들을 거느리고 모스크바동방로동자공산주의대학에 가서 학습하였다.

1924년 리대소의 요구에 의해 귀국하여 선후로 중공북경지방집행위원회 위원장, 중공북방구 집행위원회 선전부 부장 겸 종업원운동위원회 주임을 맡고 리대소를 협조하여 북방 각성의 투쟁을 령도하였다. 1925년 5월 30일 상해에서 5.30참사가 발생한뒤 북경에서 시위행진, 파업등을 조직하여 상해인민의 투쟁을 성원했으며 또 천진, 당산 등지에 파견되여 로동자대파업을 조직하여 제국주의와 반동군벌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25년 10월 조세염은 내몽골지구 농공병대동맹 중앙위원회 부서기로 당선되였다.1926년 3월 조세염은 중공강절구위원회(강소, 절강, 안휘 3성과 상해시를 포함) 조직부 부장, 상해총공회 당, 단 서기를 맡았으며 강절구위원회 군위 서기를 겸임했다. 조세염은 “시영”이란 가명으로 상해로동자속에 들어가 파업을 조직하고 무장기의로 북벌군을 영접할 준비를 했다.

1926년10월 북벌군이 무한을 점령했다. 상해당조직은 조세염의 령도하에 북벌군의 승리적인 진군과 배합하여 무장기의를 일으켰으나 제1차, 제2차 기의가 모두 실패했다. 1927년 3월 21일 진독수, 주은래, 라역농,조세염 등의 지휘하에 상해로동자 제3차 무장기의를 일으켜 군벌부대를 격파하고 외국이 통제하는 조계지를 제외한 상해를 점령했다. 이는 대혁명시기 중국로동자운동의 쾌거이며 강절전장에서 북벌군의 승리를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27년 4월, 장개석이 혁명을 배반하고 4.12반혁명정변을 일으켰다. 5월 조세염은 중공 5차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후 중공강소성위 상무위원, 대리서기, 상해총공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여 백색테로가 심한 상해에 돌아와 혁명투쟁을 령도하였다.

반역자의 고발로 1927년 7월 2일 조세염은 불행히 체포되였으나 굴하지 않고 감옥과 법정에서 당의 주장과 공산주의리상을 선전하고 반동파의 죄행을 폭로했으며 7월 19일 적들에게 살해되였다.


라건부

지금의 사람들에 의해 잊혀진 도형발생기라는 보통전자설비에는 우리 나라 전자공업발전의 한단락 어려운 력사가 담겨있다. 지금 이미 선진기술에 의해 교체되였지만 이 설비의 연구제작은 항천전자공업의 발전에 돌출한 기여를 했으며 여기에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과학기술사업자 라건부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라건부는 생전에 원 항천공업부 섬서려산 마이크로 전자회사의 보통공정사였다. 지금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항천정신은 대대로 전해지고있다.

도형발생기는 전자계산기가 통제하는 자동제판설비이다. 이것이 없으면 반도체 대규모 집성 전기회로연구제작은 거의 불가능했다. 1969년 도형발생기 과제팀 팀장을 맡은 그는 34살밖에 안되는 해내기였다. 국제봉쇄와 당시 국내”문화대혁명”동란속에서 과학연구환경이 매우 간거했다.

대학에서 핵물리를 전공한 라건부는 모든것을 처음부터 배웠다. 그는 도서관과 신화서점에 박혀 가능한 관련자료들을 수집했다. 관련자료를 찾기 위해 그는 영어를 자습했다.1970년 라건부가 이끄는 과학연구팀도 “문화대혁명”의 충격을 받아 낮에는 “혁명”운동에 참가하여 “사상개조”를 하고 저녁이면 시간을 짜내여 과학연구를 했다.

1972년 3년만에 우리 나라에는 첫 도형발생기가 있게 되였다. 이 성과는 우리 나라 전자공업의 공백을 메웠다. 3년후 성능개진을 건친 Ⅱ형도형발생기 연구제작에 성공하여 대형 집성 전기회로 마이크로처리기를 제작하는데 기반을 닦아놓았다. Ⅱ형도형발생기는 1978년 전국과학대회의 장려를 받았다.

1981년 10월 라건부가 Ⅲ형도형발생기의 개량사업에 몰입하고있을때 병마가 그에게 덮쳐들었다. 하지만 Ⅲ형도형발생기를 조속히 사용에 투입하기 위해 그는 놀라운 의력으로 사업을 견지했다. 1982년 2월 그는 “간암말기”로 확진받았다. 이토록 큰 타격 앞에서 라건부는 병세를 가족에게 알리지 말것을 의사에게 부탁했다. 그가 가장 많이 생각한것은 여전히 손에 있는 과학연구사업을 놓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사업외 그가 가장 많이 생각한것은 남이였다. 그는 몇번이나 의사에게 “당신들은 지금 나의 몸으로 실험을 할수 있다. 내가 죽은후 나의 몸을 나라에 바칠테니 해부분석을 잘하여 다른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영예앞에서도 남을 가장 많이 생각했다. 그는 과학기술성과를 신청할 때 자기의 이름을 맨 뒤에 써넣었으며 두번이나 고급직함평의에 참가하지 않고 남에게 양보했다.

직무, 명예와 리익 앞에서 라건부는 언제나 담담했다. 그는 “보통전사”가 되는것을 달가워했다.

1983년 2월 라건부는 국무원에 의해 전국로력모범으로 추서되였다. 비록 47살이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나라의 도형발생기력사에는 라건부의 이름이 영원히 새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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