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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백"인물속의 공산당원

  • 2011-06-21 08:48:29
모 택 담

올해 4월 25일은 모택담이 장렬하게 희생된 76돐이 되는 날이다.
모택담은 1905년 9월에 출생, 호남성 상담현 소산충사람이다. 1918년 맏형 모택동을 따라 장사에 가 호남제1사범부속소학교에서 공부했고 그해 신민학회에 참가하였다. 1921년 7월,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22년초, 모택동의 지도하에 청년들을 조직해 진보적인 간행물을 열독하고 청년단조직을 발전, 장대시켰으며 혁명간행물과 선전물들을 비밀리에 장사의 각 업종 공회와 학교에 전달하였다.
1923년 10월, 모택담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가을, 그는 모택동을 따라 광주에 가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선후로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중공광동구위, 광동성농민협회에서 사업하였다. 1927년 5월, 모택담은 광주에서 무한으로 비밀이동해 국민혁명군 제4군 정치부에서 서기를 맡았고 후에 엽정독립퇀을 따라 강서로 가 남창봉기에 참가, 봉기군 제11군 25사 정치부 선전과 과장을 맡았다. 봉기부대가 남하한후 그는 주덕, 진의가 거느린 부대를 따라 민월감상변계에서 싸웠다.
1930년 1월, 모택담은 홍6군(후에 홍3군으로 개칭) 정치부 주임을 맡았고 군장 황공략과 함께 전군을 이끌고 감수량안에서 유격전쟁을 벌려 감서남혁명근거지를 공고, 발전시켰다. 1931년 6월 중공 영(풍)길(안)태(화) 특위서기를 맡고 홍군독립5사 정치위원을 겸했으며 제3차 반”포위토벌”작전에서 사장 소극과 함께 부대를 지휘하여 부전, 로영반 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32년,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 비서장을 맡고 등소평과 함께 당내의 “좌”적오유와 견결히 투쟁하였다. 그는 중공쏘베트구역 력차의 반”포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탁월한 전공을 세웠고 2급 붉은별메달을 획득하였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주력부대가 장정한후 모택담은 중앙혁명근거지에 남아 유격전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중공중앙 쏘베트구역 분국 위원, 홍군독립사 사장, 민감군구 사령원을 맡았다. 1935년 4월 26일, 모택담의 부대가 강서 서금홍림산지역에서 국민당군에게 포위되였다. 그는 부대를 지휘하여 유격대원들을 엄호하다가 중상을 입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리 림

올해 4월 26일은 항일민족녀영웅 리림이 장렬하게 희생된지 71돐이 되는 날이다.
리림은 원명이 리수약이고 복건 우계현 사람이다. 그는 1915년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교포가족에 입양되여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 1929년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만강의 분노와 조국강산에 대한 열렬한 동경을 품고 양부모와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1936년, 리림은 북평민국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그해 12월 12일, 북평학생련합회는 국민당정부가 상해에서 구국회 “7군자”를 체포한데 항의해 대규모적인 시위행진을 조직하였는데 리림은 민국대학 시위대오의 선구자였다. 얼마후 리림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전국항일전쟁이 폭발한후 리림은 대동에 파견되여 희생구국동맹회 대동중심구위 선전부 부장을 맡았다. 후에 진수변경지역사업위원회를 따라 연북항일전선에 가 로동자, 농민, 학생들이 항일무장에 참가하도록 선전, 조직하였다. 1938년 봄, 리림은 재편성된 독립지대 기병영 지도원을 맡고 부대를 거느리고 연북, 수남에서 활약하면서 일본군, 괴뢰군과 싸워 루차 전공을 세웠다. 하룡은 그녀를 “우리의 녀영웅”이라고 칭찬하였다.
1940년 4월, 일본군과 괴뢰군은 1만 2000명 병력을 동원해 진수변경지역에 대한 “소탕”전을 벌렸다. 26일, 진수변경지역의 특위, 제11행정전원공서기관과 군중단체 도합 500여명이 포위되였다. 리림은 기관과 군중들을 엄호하기 위해 임신 3개월 몸이였지만 기병들을 거느리고 적들을 유인하였다. 그녀는 다리와 가슴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과 괴뢰군에 포위되였다. 그녀는 죽을지언정 적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본군과 괴뢰군 6명을 죽이고 마지막 탄알로 자살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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