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고 층집들이 도처에 즐비하게 늘어서고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할 것 없이 물건이 풍부하고…생활의 변화가 참으로 빠르네.”
5월 23일, 연길시 진학가두 문화사회구역에 살고 있는 양려진 로인이 터놓은 감수이다. 로인은 오늘의 행복한 생활을 생각할 때마다 영웅인 외삼촌 리연록과 리연평을 떠올리게 된단다.
“그들이 지금 생전이라면 아름답고 번영한 고향모습에 얼마나 기뻐하겠나!”
1948년생인 양려진은 39년의 당령을 갖고 있는 로당원일뿐더러 동북항일련군 제4군 군장을 담임했던 리연록, 리연평의 외조카이다. 양려진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서 외삼촌들이 전장에서 영용하게 싸운 이야기를 들었고 집사람들과 함께 리연평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면서 로세대 혁명가들의 홍색정신의 영향을 입으면서 자랐다. 양려진은 자치주 창립 초기 연변은 물자가 결핍하여 형제자매들이 물림으로 의복을 입었고 산과 들에 나가 산나물을 캐서 살림에 보탬했다면서 비록 당시의 생활조건이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전례 없는 평화와 안전을 소중히 여겼고 평화와 안전이 외삼촌과 같은 혁명선렬들의 피와 목숨으로 바꾸어온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돐을 맞이하여 양려진이 연길시인민공원 광장에서 경축공연 련습을 할 때였다. 외삼촌 리연록이 몇해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양려진은 무작정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가 들려준 영웅이야기 속의 주인공 외삼촌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이였다.
“외삼촌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너 많이 컸구나, 당의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잘해야 한다…’라고 말했네.”
양려진은 외삼촌이 당부할 때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몇년 후에야 그 잊혀지지 않는 눈빛이 뭘 말해주는가를 알 것 같았네. 고향인민들이 고난에서 벗어난 걸 보면서 전쟁에서 희생된 전우와 동포들을 그리는 마음이였을 수 있고 우리 새세대들이 하루빨리 성장하여 고향을 더욱 아름답게 잘 건설하기를 바라는 기대였을 수도 있지.”
1983년, 원 연길제일백화점에서 촬영기자재를 판매하게 된 양려진은 북경으로 물건을 구입하러 가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때면 그는 병원에 입원한 외삼촌 리연록을 찾아가뵈였다.
“제일 처음 찾아갔을 때 외삼촌이 나한테 묻는 첫마디가 ‘연변이 지금 어떻게 발전했냐? 오래동안 가보지 못해서 그립구나.’였다네.”양려진은 숙질간이 만날 적마다 리연록은 연변 군민이 단결하여 외적과 싸운 혁명년대에 대해 이야기했고 양려진은 고향의 발전변화를 이야기해주었다면서 고향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면 외삼촌이 매우 흥미진진하게 듣더라고 말했다.
1999년, 퇴직한 양려진은 진학가두의 추천과 선거를 거쳐 경승주민위원회 당지부 서기를 맡게 되였다. 사회구역에서 사업하는 기간 그는 사회구역에서 설립한 ‘세시 반 교실’을 리용하여 관할구역 학생, 사회구역 사업일군, 주민 및 가두주재 단위 사업일군들에게 동북항일련군 력사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작된 양려진의 선전강연은 점차 그 범위가 연길시로, 연변주로, 전국 각지로 넓어졌다. 양려진은 가는 곳마다에서 연변대지에서 발생한 항일전쟁이야기를 전파해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일깨워주었다.
“동지섣달 찬물을 마실제 방울방울 물방울 떨어져 얼음 되네. 왜적들을 동북에서 몰아내지 못한다면 이 내 몸 죽어서도 편치 못하리.” 이 시는 리연평이 생전에 가족에 남긴 시이다. 양려진은 매번 선전강연을 할 때면 눈물을 머금고 이 시를 읊는다.
“외삼촌은 전국이 해방되면 우리 집과 전국인민들 모두가 먹고 입을 게 있는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네.”
양려진은 이같이 말하면서 오늘날 고향의 번창한 모습은 리연평이 바라던 ‘먹고 입을 게 있는’ 생활보다도 더 잘 나라를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친 혁명선렬들을 위로할 것이라고 정숙히 말했다.
갈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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