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현유격대대 첫 대대장 박동근 렬사 (1)
리광인 2020-06-01 10:40:56
중국조선족 항일력사 연구에서 보면 항일렬사 이름과 략력 정도는 알려지지만 다른 연구자료가 따르지 못하고 신상이며 가족관계가 밝혀지지 않아 인물전기로 정리하지 못하는 항일혁명가들이 적지 않다. 당년 성망이 뜨르르했던 연길현유격 대대 첫 대대장이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연길 1퇀) 퇀장인 박동근(朴东根) 렬사도 례외가 아니다. 어렴풋한 략력은 보이지만 구체적인 년도가 흐리터분하고 출신이나 가족관계, 혁명활동 부분 모두가 미지근하여 유감의 항일렬사로 남아있었다.
우복동전투와 두 항일소녀의 이야기
리광인 2020-05-25 09:07:24
1933년 3월, 화룡현유격대는 3개 중대를 가진 현유격대대로 발전하였다. 투쟁의 시련을 거친 현위 산하 삼도구유격대 출신 차룡덕은 현유격대대 첫 정위로 임명되였다.
녀성혁명가 김새별과 남편 홍완구
리광인 2020-05-18 08:41:18
지난 세기 20년대 후반 화룡현 명신사 천수갑 남양동에는 김새별이라는 한 녀인이 살고 있었다. 새별은 이름이 아닌 별호인데 가난한 집 출신이다 보니 어려서부터 집안일, 바깥일로 잔뼈를 굳히였다.
항일련군 제7군과 세 항일혁명가
리광인 2020-05-09 09:02:33
1932년 10월, 조선족을 중심으로 하는 중공요하중심현위에서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자기의 항일무장을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처음 알려지는 혁명가 김홍선
리광인 2020-04-20 08:55:26
최석천과 리춘만, 김홍선(채평), 리인근 등은 송동모범학교를 기지로 련속 2기에 걸쳐 매기 2개월을 기한으로 하는 군정간부학교를 꾸리면서 170여명(어떤 자료는 140여명이라고도 한다.)의 혁명간부를 양성해냈다.
리광인 2020-04-13 08:49:08
지난 20년대 초기의 룡정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 두 중학교 학생들 속에서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과외써클소조ㅡ‘광명회’가 조직되고 ‘사회과학연구회’, ‘친목회’, ‘독서회’ 등이 조직되면서 동흥중학교는 부글부글 끓었다. 동흥중학교 교원으로 활동하는 김홍선은 그 시절 리주화, 리린구(李麟求), 박윤서(朴云瑞), 주청송(朱青松) 등과 더불어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과 맑스주의 새 사상을 전파하는 운동의 진두에 나섰다.
리광인 2020-04-07 09:01:27
북만이라 불리운 오늘의 흑룡강성은 조선족 항일혁명가들의 발자취가 곳곳에 스민 불멸의 땅이다.
이름난 항일녀성혁명가 김순경
리광인 2020-03-30 08:54:15
1934년 11월, 오빠 김문철을 걱정하던 김순경은 남편 장문렬과 함께 상해에서 할빈행에 올랐다. 이들이 언제 결혼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으나 중공상해중앙국의 지령에 의해 할빈에 자리잡은 중공만주성위로 전근하는 길이였다. 장문렬은 중공만주성위 상무위원 겸 공청단만주성위 서기로 부임하고 김순경은 공청단만주성위 선전부장인가 부녀부장인가를 맡아 나섰다.
리광인 2020-03-23 08:57:23
1930년대초 상해에는 공청단중앙국이 활동하고 있었다. 1932년말에 공청단중앙 서기 호균학(胡均鹤)과 조직부장 오대해(吴大海), 비서장 진탁문(陈卓闻)이 체포됨에 따라 1933년초에 이르러 상해의 공청단중앙국은 대파괴를 면치 못하였다. 다행히 그날 선전부장 개풍(凯丰)이 공청단중앙 기관에 있지 않은 데서 적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리광인 2020-03-15 15:57:24
중국혁명 속 조선족혁명사를 펼치면 지난 세기 30년대 북경과 상해 공청단북평시위, 공청단중앙과 공청단강소성위, 할빈 공청단만주성위에서 활동한 저명한 항일녀성혁명가 김순경(金顺卿, 1913ㅡ1936)이 떠오른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에서는 이렇듯 저명한 항일녀성혁명가를 거의 모르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에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 련재 77회로 지금까지 알려지는 김순경 녀사를 처음 소개하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보고저 한다.
3로군의 출중한 지하공작자 진정산
리광인 2020-03-09 08:46:02
어느덧 1936년 겨울이 지나고 1937년 봄이 다가오자 3군밀영의 식량 문제가 자못 큰 난제로 대두하였다. 적들의 련속되는 토벌과 엄밀한 봉쇄정책으로 항일련군과 지방군중들과의련락이 끊어진 바람에 얼마 안되는 식량은 인차 거덜이 났다. 감자가 식량해결로 되였지만 감자마저도 떨어지니 고사리, 산배추, 버섯 등 산나물을 얻어들여야 했다. 그나마 산나물이나 산열매도 이어대기가 쉽지 않았고 소금과 기름은 구경하기도 어려워서 물에 산나물을 데쳐서 그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리광인 2020-03-02 09:16:46
동북항일련군 제3군과 6군, 9군, 11군으로 무어진 제3로군의 력사를 헤아리면 3군 재봉대 10여명 녀전사들 거개가 조선족으로 알려진다. 3군부대의 제1임 재봉대 대장이고 출중한 지하공작자인 공산당원 진정산(陈静山)도 에누리없는 조선족이다. 진정산을 두고 그의 고향이며 가족관계, 래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3군 재봉대 대장으로 활동하면서부터는 진정산의 모습이 나름 대로 서서히 밝혀져 고무적이다.
어랑촌당지부 서기 리명배 이야기
리광인 2020-02-24 09:06:30
화룡시 서성진소재지에서 10여킬로메터가량 떨어진 어랑촌은 100년 전만 해도 수풀이 우거진 한적한 고장이였다.
중공하강특위 서기 황성식
2020-02-08 09:48:38
강국신 퇀장의 말에 따르면 그들 일행 8명은 먼저 요하현 경내의 원 주둔지 십팔상지(18垧地)를 찾았지만 부대의 행적은 오리무중이였다. 그들은 다시 7군의 장병들로부터 7군의 요람으로 불리우는 요하 폭마정자(暴马顶子)밀영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한무리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과 맞띄웠다. 오옥광은 동지들을 이끌어 적들과 생사판가리 전투를 벌리였지만 오옥광, 김철 등 6명은 중과부적으로 적들과의 격전에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였다. 강국신 퇀장과 그의 경위원만이 가까스로 혈로를 헤치고 나왔을 뿐이다.
리광인 2020-01-19 08:57:47
그때 중공하강특위기관은 화천현 다무쿠(达木库), 오늘의 가목사시 교구 다래진 북성자(大来镇北城子) 부근에 설치되면서 하강특위 서기로 부임한 황성식은 특위기관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던 황성식은 특위기관을 떠나 가목사시위 사업지도에 나섰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여 총상을 입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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