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절자로 몰린 비운의 혁명가 리상묵
□ 리광인 2018-08-06 09:03:07
리상묵 연구자료에는 1933년 8월에 동만특위 선전부장으로 취임하고1934년 2월에 조직부장으로 되였다고 하지만 문제점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리상묵의 동만특위 조직부장 취임은 전임 동만특위 조직부장 김성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김성도(金圣道)에 대하여 전개하진 않지만 1933년 9월 중순, 동만특위가 왕청현 소왕청근거지에서 제1차 확대회의를 가진 것은 말해야겠다. 그번 회의에서 김성도는 이른바 ‘파벌수령’이라는 루명을 쓰고 동만특위 조직부장 직무를 해임당하였다. 동만 특위는 다시 구성되면서 동장영(童长荣)이 계속 서기를 맡고 리상묵이 조직부장으로 나서게 되였다. 그러면 리상묵의 동만특위 조직부장 취임은 1933년 9월이라 해야 할 것이다.어찌하든 리상묵은 1933년 4월부터 9월에 이르는 6개월 사이 중공연길현위 선전부장으로부터 일약 중공연길현위 서기로,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으로 승승장구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급이다. 중공동만특위 서기가 한족인 동장영이라 할 때 리상묵은 연변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항일혁명가들의 최고 수령인물로 떠올랐다고 볼 수 있다. 인물로서의 리상묵의 모습이 생생히 안겨진다.
2018-07-30 08:57:00
이름없는 영웅 리상재
리광인 2018-07-16 09:58:47
1946년 6월 이후 장개석 국민당은 정전협정을 찢어버리고 전면적인 내전을 발동하면서 선참 장춘, 길림을 망라한 길림성 남만지구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한 뒤 동만으로 진공하면서 라법, 신참, 교하, 로야령 등지에까지 기여들며 발광하였다. 리상재 소속 퇀은 명령을 받고 안도, 교하를 거쳐 길림 쪽으로 진격하였다. 때는 이미 새해 1947년에 들어선 2월 이후의 시절, 리상재는 부대가 길림 쪽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큰형님과 둘째 형님께 알리고는 다시 소식이 없었다.
여덟 녀용사들 넋이 세세대대로 영원하리라
2018-07-02 08:53:30
주신옥 등 6명 녀전사의 장렬한 최후
□ 리 함 2018-06-25 09:10:27
1938년 10월의 8녀 투강 전투가 있은 후 주변환경은 보다 험악하게 번져갔다. 11월에 이르러 적들은 오늘의 림구현 조령지역(刁翎地区)과 목단강 북안지역(北牡丹江沿岸地区)들에서 또 전례 없는 동기대토벌을 벌리였다. 적들의 동기대토벌의 중심은 주보중 장군이 이끄는 항일련군 제2로군 총지휘와 5군 부대였다. 주신옥을 대장으로 하는 5군 부녀퇀의 제2대도 2로군 총지휘부와 같이 움직이였다.
8녀 투강 후 부녀퇀 녀전사들
□ 리 함 2018-06-19 09:22:23
1938년초 이후 북만항일련군부대들에 대한 일제놈들의 토벌은 갈수록 잦아갔다. 이해 5월과 10월 사이 서란과 오상 쪽으로의 서정에 참가한 5군 부대들의 손실은 너무도 참중하였다. 서정에 참가한 5군 부녀퇀의 제1대와 제3대는 이해 10월 하순의 우스훈하 8녀 투강 전투까지 벌리며 산산쪼각이 났다. 한데서 항일련군 5군 부녀퇀 관련 적지 않은 글들에서는 부녀퇀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음을 알리고 있다.
8명의 녀용사들이 투강 뒤 이야기
□ 리 함 2018-06-11 08:55:01
8녀 투강 장거 이후 그날 적들의 포위를 헤치고 나간 항일련군 5군 1사에서는 하나의 소부대를 파견하여 우스훈하반의 싸움터를 수습하면서 희생된 전우들의 시체를 찾아 고이 묻어주었다. 그러나 강심에서 쓰러진 여덟명 녀전사의 유체는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여덟명 녀전사 유체를 두고 당년 부녀퇀의 녀전사이고 5군 군장 시세영(柴世荣)의 부인인 호진일(胡真一)이 회고자료를 남기여 귀중한 연구자료로 되고 있다.
여덟 녀전사 우스훈하에 뛰여들다
□ 리 함 2018-06-04 08:53:43
저명한 화가 왕성렬이 1957년에 창작한 명화 <팔녀투강>. 1 1938년 5월 이후 항일련군 제2로군 4군과 5군으로 구성된 서정부대의 서란(舒兰), 오상(五常) 일대로의 서정길은 피로 얼룩진 서정길이였다. 안순복, 리봉선 등 녀전사들은 강의한 의력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1938년 8월말에 부대를 따라 할빈 이서의 오상현 경내에 들어섰다. 서정부대는 오상현 경내에서 싸우다가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빠지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대거 진공하였는데 낮에는 비행기가 마구 폭격하고 밤에는 포사격을 퍼부었다. 전투는 도처에서 가렬처절하게 벌어졌다.
이어지는 김현철이야기와 안순복 부부
2018-05-28 09:03:07
한족분들이 나를 키워주었다
2018-05-21 09:16:20
여덟 아이들 한족 집에 맡기다
2018-05-07 09:17:54
밀산현 서대림자 조선인마을
2018-04-28 06:53:15
상상할 수 없는 고생과 아픔을 겪었던 녀투사들
2018-04-16 09:11:20
새 지대로의 피어린 전이 길에서 …
2018-03-12 08:57:17
목단강시목단강반의강빈공원에세워진‘8녀투강조각상’(2017년7월31일현지촬영) 1 훈춘현연통라자근거지의군중들은1933년겨울에마적달남골유격근거지로전이하지않으면안되였다.1934년초까지기간에남구가또잔혹한토벌을받아1933년12월에만해도남구의군중60여명이비참히살해되였다.이해겨울대황구근거지도적에게점령되고군중들은산속밀영생활을해야만했다. 왕청현소왕청근거지도종당에는점령되고야말았다.1933년12월련속40일간의대‘토벌’에서소왕청근거지의1500여명군중들중대부분이흩어지고죽고400여명밖에남지않았다.그중비혁명군중들은왕청일대로옮겨가고나머지200여명혁명군중들은하마탕,다홍왜,요영구,라자구등지로전이하였다. 1933년겨울부터1934년초에걸친일제의제2차동기대토벌은파괴성적인재난을가져왔다.근거지군민들은준엄한시련을이겨내면서1933년한해사이에150여차의전투를벌리여동기토벌대6000여명을항격하였지만우리항일유격근거지들이받은손실이너무도커서시급히대책을강구하지않으면안되였다. 1934년3월하순,중공동만특위와유격대주요책임자리상묵,왕덕태등10여명은연길현삼도만능지영의한산에서중요한회의를가지였다.회의는동만의현유유격대를토대로하여인민혁명군제2군제1독립사를건립하라는1933년12월3일의중공만주성위지시정신에근거하여소집되였다.회의는연...
주신옥 최순선은 훈춘현유격대 출신
2018-03-05 09: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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