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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문제》와 《간도협약》의 체결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2)

  • 2008-08-07 20:55:48
일로전쟁이 결속된후 1905년 11월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면서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 대한 확장의 첫 발자욱을 내디뎠다. 일본제국주의는 “만주경영”의 국책으로부터 출발하여 연변을 조선에서 중국 동북지역에 진입하는 중요한 통로로 간주하면서 “대련은 정문”이고 “연길은 뒤문이며 만주문제의 관건은 곧 간도문제이다”고 고아댔다.

소위 “간도”란 바로 길림성 연길청에 속하는 두만강중류지역의 광제욕(오늘의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의 길이 10리, 너비 1리 되는 약 2000무에 달하는 모래밭을 말한다. 일명 “가강(假江)”이라고 하였는데 토지가 비옥하였다. 1877년부터 조선종성의 농민들이 중국지방관원의 허가를 받고 이 땅을 세맡아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해마다 은 800냥을 세금으로 바쳤는데 력사서류로 남아있어 의문의 여지도 없는것이다. 하지만 일로전쟁후 일본은 연변지역을 집어삼키려는 야심에서 소위 “간도”를 연변의 전 지역에로 확장하였다. 더우기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된후 일본은 “간도문제”를 리용하여 중국동북지역에 대한 침략의 템포를 다그쳤다. 그러나 “간도” 즉 연변지역은 자고로 중국의 령토였는바 일본이 “간도문제”를 리용하여 개입하려면 반드시 구실을 만들어야 하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연변지역을 침략하고저 두가지 구실을 만들었다. 하나는 연변지역의 조선족을 보호한다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조간의 두만강국계의 쟁의가 미해결문제라는것이였다.

1907년 8월 23일,일제는 경찰을 파견하여 룡정촌에 “통감부간도파출소”라는 패말을 걸었다. 그리고 중국의 주권을 무시하고서 연변지역을 북도소, 회령간도, 종성간도, 무산간도 등 4개 행정구역으로 획분하였다.일제의 도발에 맞서 청정부는 동년 8월 진소상을 길림변무총감으로, 오정록을 부감으로 임명하였다. 오정록은 지혜가 비상하였는바 각종 국면에 능란하게 처리하면서 침략자들과 맞서 두려움없이 떳떳하게 응부하였다. 그리하여 효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야망을 막아냈다.

일본이 연변에 침입한후 조선족들은 한족 등 형제민족들과 함께 애국관원 오정록을 협조하여 일제의 연변침입에 항거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8월 국자가 등 지역의 조선족진보인사들로 조직된 “연의회” 등 반일비밀단체는 길림순무처에 대표를 파견하여 일본침략자가 강행하는 소위 “도사장제”취소를 강렬하게 요구하였다. 그리고 개태, 선화, 평강 등 도처에서 일본군경과 친일분자들을 타격하였다.

1909년 9월 4일, 중일 량국은 “두만강중한계무조항(즉 간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은 근 200여년간의 중조변계쟁의와 2년여에 걸친 “간도사건” 교섭의 종결을 의미하였다. 일본은 마침내 두만강을 중조국계로 승인하고 연변을 중국의 령토임을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주권을 보위하고 일본침략의 연변지역에 대한 침략음모가 실패를 고하였다. 그리하여 중대한 력사적의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약”을 통하여 연변조선족에 대한 령사방심권과 복심권 등 허다한 권익을 챙겼다. 소위 “간도조약”이 체결된후 국자가조선족진보인사들은 9월에 련명으로 길림변무공서에 상소하여 “백성은 나라의 기본이노니 얻으면 강성하여질것이요 잃으면 반드시 위태로와질것이다. 오늘날 개간도는 중화의 땅이요, 개간도민은 중화의 백성이다”고 엄정하게 성명하였다. 이처럼 일제가 조선족인민들에 대한 령사재판권을 강요한것에 대한 항의는 연변조선족인민들의 일본침략에 대한 반항과 중화보위의 견강한 신념과 왕강한 투지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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