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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내지역 조선족공산당원들의 항일활동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9)

  • 2008-09-07 20:32:08
1931년 9.18사변후 관내 조선족인민들은 “전국동포들은 단결하여 일본왜구를 중국에서 축출하자”는 공산당의 호소에 향응하여 항일투쟁에 돌입하였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제국주의가 상해를 진공하자 상해의 조선족인민들은 19로군의 항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관내 각지의 일부 조선족공산당원들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근거지에서 혁명투쟁에 적극 참가하였다. 일부분은 상해, 북경 등지에서 지하사업을 하면서 항일활동에 종사하였다.

홍군의 2만 5000리장정에서 홍색간부퇀의 참모장 양림(원명 김훈, 양녕, 필사제)은 퇀장 진갱과 함께 부대를 이끌고 전투를 벌려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금사강 교평나루터를 탈환하고 통안진을 점령하는 전투에서 우수한 군사지휘재능을 발휘하였다. 1935년 10월 섬북에 도달한후 양림은 홍군 제15군단 75사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 1936년 2월 홍군은 황하를 건너 동정항일을 하게 되였다. 양림은 명을 받고 223퇀 1영의 선봉부대를 거느리고 먼저 도하하였다. 양림은 부대를 지휘하여 강을 건넌후 부대를 거느리고 신속하게 적들을 궤멸하면서 종심에로 지쳐나갔다. 선봉부대가 가가양백을 점령한후 전장을 수습하는 도중 양림은 류탄에 가슴을 맞고 영광스럽게 희생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1934년초 천진에 파견되여 지하공작을 한 중공하북성위 선전부장 리철부(원명은 한위건)는 왕명 좌경로선의 착오적로선을 맞서 문장을 써 자기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도리여 “철부로선”으로 락인되여 반우경투쟁의 주요대상으로 되여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역경속에서도 계속 당을 위하여 사업하였다. 1935년 12.9운동시 리철부는 천진학생 1만여명을 조직하여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1935년 준의회의후 당내에서 왕명좌경로선의 통치적지위가 결속되였다. 같은 해 리철부는 당적을 회복하고 중공천진시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1937년 5월 리철부는 연안에서 적구사업회의에 참가하여 모택동동지의 고도로 되는 평가를 받았으며 연안에 남아 사업하게 되였다. 동년 7월 리철부는 병으로 서거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 중공중앙은 연안에서 그의 추도대회를 거행하였다.

그외에도 광주에서 학생운동령수로 있은 진광화(원명 김창화), “불사조”로 불리운 장지락(원명은 장명, 혹은 김산), 기동탄광로동자 항일무장의 발기인이며 중공기동특위조직부장 겸 란중지위 서기인 주문빈(원명 김성호), 조선족의 중공 첫번째 당원으로서 중국의 “비카소”로 불리웠던 저명한 화가 한락연,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등 저명한 노래의 작곡자로서 “중국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는 정률성 등 허다한 조선족동지들이 항일사업에 투신하여 투쟁가운데서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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