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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의 발전과정과 그 연구방법

□ 김춘선

  • 2008-10-13 17:47:45
1. 조선의용대의 발전과정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무한에서 결성되였다. 이 시기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기간으로 설립초기에는 국민당의 후원을 받던 김원봉이 령도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조선의용대는 무정, 최창익, 리유민 등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련계하여 상당수가 화북지역으로 북상한 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였다. 이에 1942년 12월 임시정부의 전원은 중경에 잔류한 일부 조선의용대로 광복군 편입을 결정하였다. 물론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의 강한 압력도 작용하였다. 이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본부와 북상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사실상 별개의 조직이 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전신은 1941년 1월 중국공산당 팔로군전방총사령부 소재지인 산서성 동곡에서 설립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이다. 이 청년련합회는 중국공산당산하의 한개 조직으로서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던 소수의 조선인 당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였다. 련합회는 "전 화북의 조선청년을 단결시켜 조국광복의 대업에 참가시킬 것" 등 6개항의 강령을 채택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 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조로 한 선언도 발표하였다. 태항산일대에 도착한 조선의용대 병력은 1941년 7월경 3개 지대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였다. 이들은 팔로군과 함께 호가장전투 및 반소탕전을 비롯한 일본군과의 항전이나 선전사업 등에 참여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가 북상하고 화북 각지에서 조선인 청년들이 점차 결집되는 등 력량이 커지고 활동범위가 넓어지자 조직확대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942년 7월 마침내 화북조선인청년련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개편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도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이러한 조선의용군으로의 개편은 단순히 명칭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였다. 그것은 이제 조선의용군이 본격적 군사, 정치집단화를 시도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것이라고 평가할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용군으로의 변신은 중국공산당의 지원과 협조를 바탕으로 그들과의 련계를 강화하는 한편 해방후 독립국가건설에 대한 전망을 모색한것이다. 동시에 조선의용대 창설이래 조선인 민족해방운동가들의 숙원을 실현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에 만주지방을 거쳐 궁극적투쟁목표인 조국해방전쟁의 실현, 즉 "동북로선"의 구체화라는 전략적목표도 있었다고 평가된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국민정부에서 지원하는 한국광복군과의 경쟁관계라는 미묘한 라이벌 의식도 작용했다고 볼수 있다. 1945년 8월 조선의용군의 무정 등은 조선독립동맹과 별개의 독립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조선의용군의 중국국공내전참전은 1945년 8월 쏘련군의 대 일 참전이 결정되면서 중국공산당군대 총사령 주덕이 화북에 근거를 둔 조선의용군에게 동북(만주)과 조선해방을 위해서 만주지역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부터였다.

1946년초 중국공산당은 중국국민정부군보다 렬세에 있던 군사력을 만회하기 위해 만주지방에서 조선인 부대의 창설과 확대에 주력하였다. 이런 차원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가 심양에서 조직되였다.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1946년 2월 소위 통화 "2.3폭동"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중국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리홍광 지대로 부대명칭을 바꾸었다. 1946년 12월초 리홍광지대는 독립4사로 개칭되였다. 이후 남만의 림강전투, 사평전투(1947년말—1948년 3월), 료심전역(1948년 가을—1948년 11월) 등에 참전하여 크게 용맹을 떨쳤다. 독립 4사는 중국인민해방군이 심양을 점령한 다음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재편성되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주덕해, 리덕산, 김연, 리근산 등 19명이 중심이 되여서 심양에서 결성되였으며, 1945년 11월 리상조(김택명)의 할빈 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와 합류하였다. 1945년 11월—1946년 5월 사이에는 연변 각 현에서 주민들을 괴롭히는 토비소탕을 주도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의용군 제3지대에는 중국인 토비나 국민당 잔당, 토호, 마적 등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다수의 조선인 청년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남만의 조선의용군 제1지대와 같은 대규모 단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후 1948년 "동북인민해방군" 독립11사로 재편되였다. 독립11사는 병력의 90%가 조선인들이였다. 중국공산군이 심양일대에서 펼친 료심전역에 참전하였고 장춘 점령후 중국인민해방군 제164사로 개편되였으며 제3지대는 491단으로 개편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박일우(연변 화룡현 출신)가 지휘관으로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들이 중심이 되여 태항산에서 조직되였다. 이 부대는 1945년 11월 심양에서 연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연변지역에서토비토벌에 직접 참가하였다. 제5지대는 조선인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던 독립6사단으로 편성되였고 1948년 다시 156사단으로 재편성되였다. 156사단의 부사단장 전우가 지휘하는 4500여명의 조선인 간부와 병사들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 평안북도 정주로 이동하였는데 동북항일련군 출신의 김광협은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1950년 3월 중국인민해방군 독립15사단(사단장 전우)을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에 입국후 조선인민군 제7사단으로 개편되였는데 후에 12사단으로 편성되였다.

1949년 7월 조선의용군 제1지대의 개편부대인 중국인민해방군 166사단은 조선에 입국한 뒤에 조선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으로 개편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제164사단은 장춘시 방어임무를 마치고 리덕산의 지휘하에 조선으로 입국하여 조선인민군 제5사단(사단장 김창덕)으로 재편성되였다.


2. 금후 연구방법

(1) 조선의용대의 성격을 규명하여야 한다. 단계별 성격을 규명하여 조선족사의 범주에 귀속시켜야 한다.

(2) 1사2용(一史二用)의 원칙하에 한국사, 조선사, 중국사(조선족사)에서 공동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3) 조선민족사 연구의 시각과 국사 연구 시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하며 실시구시의 원칙에서 력사적 위치를 규명해야 한다.

(4) 항일련군, 광복군, 의용군 등을 비교연구해야 한다.

(5) 당사자들이 생존하여 있을 때 연구를 다그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기여를 충분히 긍정해야 한다.

(6) 력사학계에서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연변력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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